2011/05/19 산다이바나시
2011.05.19 14:10
나무 연필 창문
11: 56 시작
사람의 손이란 참 신기한 물건이다.
밥을 먹고, 글을 쓰고, 악기를 연주하고.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소중한건 또 다른 누군가의 손을 쥐어주는것.
그때의 나는 그걸 알지 못했다.
나는 내 손을 가지고... 하염없이 나무를 깎고 있었다.
우리집은 전통적인 나무꾼 집안이였다.
할아버지는 이 근방에서 모르는 사람 없을 정도로 유명한 나무꾼이였고,
아버지도 할아버지의 명성에 지지않는 호쾌한 사람이였다.
그런 집안에서 태어난 허약한 나는.. 쉽게 말해 미운오리새끼였다.
아버지와 숲 깊숙이 나무를 하러 들어가면 도중에 쥐가 나질 않나,
언제는 도끼날 관리를 잘못해서 같이 일하던 집안 사람들이 나무에 깔릴 뻔 한 적도 있었다.
뭘 시켜도 어중간하고 어리숙한 녀석. 이런 집안의 아들로 태어나 기대가 컸던 만큼,
나에게 쏟아지는 실망은 보통이 아니였다.
태어나서 아버지께 칭찬 받은적은 단 한번. 처음으로 나무를 베었을 때 한번뿐 일 정도다.
그런 나에게도 잘하는것 하나 정도는 있었다.
그건 바로 나무를 조각하는일.
다른 사람이 보면 무슨 그런 조그만한 일을 자랑스럽게 얘기하냐고 할지도 모른다.
그래. 확실히 난 아버지나 할아버지처럼 남자답고 커다란 일은 못한다.
하지만 그런 나에게, 나무를 조각하는건 단순히 손을 놀리는것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우리집 작업장에는 장작 사이즈의 작은 나무조각들이 널부러져 있었는데,
큰 나무를 베어서 작업장으로 가져온뒤, 제재소에 납품할만한 커다란 녀석들을 제외한 잔 가지나 못생긴 조각들은
미처 처리하지 못한 채 그렇게 작업장에 굴러다니는 일이 잦았다.
내 일과중 하나는 그런 나무토막중 쓸만한 걸 찾아서 내 '비밀기지'에 가지고 가는 일이였다.
본디 나무꾼이란 그렇게 재미를 보는 직업이 아니였고, 사실상 재미를 보는건 우리가 벤 나무를
가공해서 큰 상인에게 팔아넘기는 제재소 사람들이었다.
물론 그만큼 제제소 사람들은 나무꾼들에게 경의를 표하면서 지내왔지만,
허름한 옷차림의 아버지에게 보석반지를 낀 제재소 아저씨가 굽신거리는건 나에겐 웃긴일이 아닐 수 없었다.
우리집말고도 다른 나무꾼들에게서 목재를 받아들이는 곳인 만큼, 제재소는 왠만한 시장만한 크기의 건물, 부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 넓은 제재소 한 구석에, 내 '비밀기지'가 있었다.
나무 밑둥과 마침 그 위로 그늘지는 커다란 나무가 하나. 근처는 돌담으로 싸여 지나가는 사람들에겐 보이지 않는다.
돈은 못벌면서 자존심만 강한 아버지에게 들킨다면 보통 혼날일이 아니였지만,
미운오리새끼인 나에겐 어찌되든 상관 없는 일이었다.
그 날도 나는 나무토막을 가지고 비밀기지에 도착했다. 오후의 따뜻한 햇살을 맞으며
나무를 조각하는 건 내가 정말로 좋아하는 일이였다.
사람, 동물, 때로는 나무토막으로 작은 나무를 조각하는 일도 있었다.
내가 조각에서 단순히 손을 놀리는것 이상의 의미를 가지게 된건, 물론 우리집 덕분이다.
나무꾼 집안의 아들로써 나는 나무를 사랑하라고 가르침 받았다.
그러나 작업장에 굴러다니는 작은 나무가지나 토막은 그런 나무꾼의 '사랑'을 받지 못했다.
나무꾼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미운오리새끼인 내가,
나무꾼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나무토막에게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는일.
동병상련이라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렇게 해서 그들을 버렸던 이들뿐만 아니라
이 세상 모든 사람에게 사랑 받을 수 있는 물건이 된다면,
그건 정말 멋진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날도 그렇게 나는 내 손을 가지고... 하염없이 나무를 깎고 있었다.
귀퉁이가 마음대로 잘 깎이질 않아 고심하고 있는 내 머리위로, 종이비행기 하나가 내려온다.
나는 내심 크게 놀랐다. 누군가가 여길 보고 있다면 비밀기지가 더 이상 비밀기지가 아니게 되는거 아닌가.
오히려 멍청한 꼬맹이 한명이 묵묵히 나무를 깎는, 재미없는 쇼의 무대위와 다를 바가 없다.
그런 쓸데 없는 걱정을 하고 있는동안, 두개 째의 종이비행기가 이마에 부딪혔다.
누구의 소행인지 궁금해진 나는, 종이 비행기를 펼쳐 보았다.
조금은 삐뚤빼뚤한 글씨로
[ 여기서 나가. 바보]
라는 다분히 도전적인 내용이 써져있었다.
두번째 종이비행기에는...
[ 동쪽 입구쪽. 작은 건물 2층]
이번에는 방향지시다. 순순히 써져있는 곳을 바라본다.
그곳에는 나랑 비슷하거나 좀더 어린듯한 소녀가 한명, 창문에 걸터 앉은채로
있는 힘껏 눈꺼풀을 뒤집고 혀를 내밀고 있었다.
메롱이다.
내가 이 비행기를 알아차리고 볼때까지 저러고 있었던건가. 대단한 노력이다.
세번째 비행기가 날아온다.
[ 여긴 우리집이니깐 나가라고. 바보]
이제야 사태가 파악되기 시작했다. 아마 저 소녀는 이 제재소의 아가씨나 되는 분이시겠지.
제재소에 종이야 산처럼 쌓여있을거고, 심심한 아가씨는 수상한 사람에게 화풀이를 하고 계시는게 틀림이 없을거다.
하지만 나에게 여기서 나가달라는 건 꽤나 힘든 부탁이였다.
여기가 아니면 마음놓고 나무를 조각할 곳이 없단 말이다.
어떻게든 저 아가씨와 협상해서 이곳을 '비밀기지' 인 채로 놔둬야 했다.
제재소 주인에게 일러 바치기라도 한다면 절대로 내쫒길 테니깐.
그렇게 조그마한 아가씨와의 종이비행기 필담이 시작되었다.
허약한 내가 창문에 정확히 종이비행기를 집어 넣기까지는 수많은 시행착오가 필요했지만,
그것보다 더 힘든건 소녀의 설득이였다.
처음엔 여기서 뭘 하고 있는지부터 설명해야 했고, 내가 나무꾼 집안의 아들이라는 사실이나
나무꾼 아들이면서 왜 제재소에 있는지에 대해서도 해명해야 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드디어 무뚝뚝한 소녀는 어느정도 납득 한 듯 보였다.
톡. 새로운 비행기가 하나.
[ 너, 재밌는 녀석이네. 그럼 여기 있는 대신에 내가 ]
톡.
[ 원하는걸 만들어서 가져다 줘야 해. 그게 조건이야.]
그정도로 내 비밀기지를 지킬 수 있다면 괜찮은 조건처럼 보였다. 저 소녀가 뭘 요구하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만들어서 가져다 달라는걸 보면 목제품이겠지. 조각할 거리를 받는건 나로서도 흥미로운 제안이였다.
[좋아. 그럼 뭐가 필요한데? 대단한건 못만들다고?]
이번엔 내쪽에서 비행기를 날린다.
톡. 금방 답장이 날아온다.
정말 제재소엔 종이가 넘쳐나는건가... 비행기를 주우면서 그런 생각도 해봤다.
[너한테 많은건 바라지도 않아. 우선은 연필을 만들어줘]
제멋대로인 아가씨다. 돈 많은 제재소 사람들의 생각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게 조건이라면
나는 받아 들일 수 밖엔 없겠지.
연필은 흑연만 구할 수 있다면 쉽게 만들 수 있었다. 가게에서 파는듯한 그럴듯한 물건은 아니지만
글씨를 쓰는데는 지장이 없을정도의 물건은 나도 깎을 수 있었다.
문제는 연필을 어떻게 만드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전달하느냐 였다.
몇번 종이비행기가 오가고 나서야, 결국 내가 저녁에 비밀기지에서 나올때
나무밑둥위에 연필을 가져다 놓고, 다음날 내가 오기전에 소녀가 가지고 가기로 이야기가 정리되었다.
그리고 그 다음날 아침, 내 비밀기지에는 조그마한 초콜렛 상자와, 종이비행기 하나가 놓여져 있었다.
[제대로 만들어. 바보]
해달라는 대로 해줬는데도 이 모양이다. 역시 부잣집 아가씨의 생각은 알 수 가 없다.
그 날 이후로도, 소녀는 매일같이 종이비행기를 날려 나랑 이야기하곤 했다.
어떤때는 조그만한 말을 만들어달라, 또 어떤날은 나비를 만들어달라...
작업속도가 더뎌지는건 귀찮았지만, 적어도 고정 손님이 한명 생겼으니 그걸로 만족했었다.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봄날의 하늘엔 꽃에 관한 이야기,
여름엔 나에게 있어서 조각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도 이야기했다.
가을엔 마을서 추수한 곡물이나 제재소 사람들 이야기.
겨울엔 나무꾼의 이야기도 해 주었다.
비가 오거나 눈이와서 종이비행기가 날 수 없을땐, 서로 지긋이 바라보기만 하는 시간이 대부분이였다.
부잣집 아가씨가 하는 생각은 그래도 도통 알수 가 없어서, 나는 시선을 피하고 작업에 몰두하기 일쑤였지만.
그도 그럴게 종이비행기 위에 실린 이야기는 일상잡담이나 내 이야기 밖엔 없었다.
소녀는 자신에 대해서는 이상할 정도로 얘기하길 싫어했다.
나야 비밀기지가 남아있어 준다면, 또 꼬마 손님한명이 있어준다면 그걸로 족했으니 더 깊게 파고들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렇게 창문위의 신비한 아가씨와의 생활이 시작된지도 1년이 다 되어가던 때,
점점 소녀의 비행기가 날아드는 횟수가 줄어들었다. 글씨체나 내용은 평소와 다름이 없었지만, 눈에띄게 그 빈도가 줄어들었다.
나는 드디어 아가씨가 새로운 심심풀이 상대를 찾았거나, 나한테 질린거겠지 하고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그리고는 처음 비행기를 받은 그 날로부터 1년 반이 지났을까,
창문에서 종이비행기를 날리던 꼬마손님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졌다.
제재소는 예나 지금이나 번창하고 있으니 어디 도시로 이사를 보냈거나 유학을 시킨거겠지.
솔직하게 조금은 서운했지만, 소녀가 이런 미운오리새끼랑 지내는거보단 더 즐거운 나날을 보내고 있으리라 생각하면, 오히려 안심이 되기도 했다.
나의 첫 손님은 그렇게 어디론가 떠났고, 그 뒤로 10년이상의 세월이 흘렀다.
도시에 나가 멋지게 미운오리새끼에서 백조로 탈바꿈한 허약한 소년은, 지금은 개인 화랑을 가지고 있을정도로 번듯한 예술가다.
아버지나 할아버지에게도 인정받아, 나무를 사랑하는 우리집안의 가르침을 지키는 녀석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다.
마침 큰 개인전이 끝나고 조금은 마음의 여유를 가질 겸해서, 10년만에 '비밀기지'를 찾아 온 참이다.
어렸을적엔 그렇게도 위풍당당해 보였던 제재소는 더이상 그 역할을 하고 있지 않았다.
몇년전에 발각된 상인들과의 비리에 연루된 제재소 아저씨가, 제재소에 불을 지르고 야반도주했기 때문이다.
소녀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그 후로 알 수 없었다.
조금은 귀찮고 귀염성이 없었지만 소중한 내 첫 손님, 그리고 말동무였던 꼬마 아가씨.
지금은 터만 남아있는 제재소 건물에 살고있는 옛 고용인에게 소녀에 대해 물어보았다.
그리고.
나는 이야기의 전말을 듣게 되었다.
그녀는 어디론가로 떠난게 아니였다.
꼬마 아가씨는, 이 세상엔 더이상 없었다.
소녀는 원체 몸이 약했다고 한다.
밖을 걸어다니는것 조차 마음대로 하지 못하고, 언제나 자기 방 안에서 조용히 지냈다고 한다.
학교에도 가지 못하고 친구조차 한명 없는 소녀는, 부모에게도 언제나 무뚝뚝했다고 했다.
그 어느 유명한 의사도 그녀의 병을 고칠 수 없었다.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다는 의사도 있었다.
그런 소녀가 어느날을 기점으로 종이를 잔뜩 달라고 했다. 글을 쓰겠다며 연습할 종이가 필요했다고 했다.
하지만 그녀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그녀의 방에선 어떠한 습작도, 소설도 찾을 수 없었다고 했다.
대신에 소녀의 방에서 나온건 누군가가 만든건지 삐뚤빼뚤한 연필에, 몇가지 목예작품이라고도 했다.
아니다.
그녀는 분명히 글을 쓰고 있었다.
조그마한 창문을 통해 , 글을 쓰고 있었다.
묵묵히 나무를 깎는 소년과 창밖 세상만을 바라보는 소녀의 이야기.
그녀가 쓴 글은, 분명히 아름다운 것이였다.
그 누구도 몰라준다고 해도, 소년은 알아주어야만 했다.
동시에, 소년은 자신의 바보같음을 깨닫는다.
그는 1년이 넘도록 소녀와 종이비행기를 주고 받았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한번도 들은 적이 없었다.
사람의 손이란 참 신기한 물건이다.
밥을 먹고, 글을 쓰고, 악기를 연주하고.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소중한건 또 다른 누군가의 손을 쥐어주는것.
그때의 나는 그걸 알지 못했다.
소년은 그녀의 손을 잡아 줬어야 했다.
창문을 바라볼게 아니라 창문위를 타고 올라가서라도 그녀의 목소리를 들어야 했다.
그녀가 싫어한다고 해도 소녀의 이야기를 들었어야 했다.
한번이라도.... 소녀를 이해하려고 했었어야 했다.
한때 소년이였던 남자의 눈가에 눈물이 맺힌다.
- 바보는...네가 훨씬 바보였잖아...
나는 또 다른 누군가의 손을 쥐어 주지 못했다.
그런 내가 지금 할 수 있는거라고는, 이것 밖엔 없을거다.
조금은 오래된 비밀기지에서,
나는 내 손을 가지고... 하염없이 나무를 깎고 있었다.
지금 내 조그만 손님이 원하는건, 삐뚤빼뚤한 연필 몇자루 일테니깐.
14:08 종료
시간제한 없이 걍 가는대로 썼습니다 고갱님
퀄이 망이라서 죄송합니다 고갱님ㅜ
11: 56 시작
사람의 손이란 참 신기한 물건이다.
밥을 먹고, 글을 쓰고, 악기를 연주하고.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소중한건 또 다른 누군가의 손을 쥐어주는것.
그때의 나는 그걸 알지 못했다.
나는 내 손을 가지고... 하염없이 나무를 깎고 있었다.
우리집은 전통적인 나무꾼 집안이였다.
할아버지는 이 근방에서 모르는 사람 없을 정도로 유명한 나무꾼이였고,
아버지도 할아버지의 명성에 지지않는 호쾌한 사람이였다.
그런 집안에서 태어난 허약한 나는.. 쉽게 말해 미운오리새끼였다.
아버지와 숲 깊숙이 나무를 하러 들어가면 도중에 쥐가 나질 않나,
언제는 도끼날 관리를 잘못해서 같이 일하던 집안 사람들이 나무에 깔릴 뻔 한 적도 있었다.
뭘 시켜도 어중간하고 어리숙한 녀석. 이런 집안의 아들로 태어나 기대가 컸던 만큼,
나에게 쏟아지는 실망은 보통이 아니였다.
태어나서 아버지께 칭찬 받은적은 단 한번. 처음으로 나무를 베었을 때 한번뿐 일 정도다.
그런 나에게도 잘하는것 하나 정도는 있었다.
그건 바로 나무를 조각하는일.
다른 사람이 보면 무슨 그런 조그만한 일을 자랑스럽게 얘기하냐고 할지도 모른다.
그래. 확실히 난 아버지나 할아버지처럼 남자답고 커다란 일은 못한다.
하지만 그런 나에게, 나무를 조각하는건 단순히 손을 놀리는것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우리집 작업장에는 장작 사이즈의 작은 나무조각들이 널부러져 있었는데,
큰 나무를 베어서 작업장으로 가져온뒤, 제재소에 납품할만한 커다란 녀석들을 제외한 잔 가지나 못생긴 조각들은
미처 처리하지 못한 채 그렇게 작업장에 굴러다니는 일이 잦았다.
내 일과중 하나는 그런 나무토막중 쓸만한 걸 찾아서 내 '비밀기지'에 가지고 가는 일이였다.
본디 나무꾼이란 그렇게 재미를 보는 직업이 아니였고, 사실상 재미를 보는건 우리가 벤 나무를
가공해서 큰 상인에게 팔아넘기는 제재소 사람들이었다.
물론 그만큼 제제소 사람들은 나무꾼들에게 경의를 표하면서 지내왔지만,
허름한 옷차림의 아버지에게 보석반지를 낀 제재소 아저씨가 굽신거리는건 나에겐 웃긴일이 아닐 수 없었다.
우리집말고도 다른 나무꾼들에게서 목재를 받아들이는 곳인 만큼, 제재소는 왠만한 시장만한 크기의 건물, 부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 넓은 제재소 한 구석에, 내 '비밀기지'가 있었다.
나무 밑둥과 마침 그 위로 그늘지는 커다란 나무가 하나. 근처는 돌담으로 싸여 지나가는 사람들에겐 보이지 않는다.
돈은 못벌면서 자존심만 강한 아버지에게 들킨다면 보통 혼날일이 아니였지만,
미운오리새끼인 나에겐 어찌되든 상관 없는 일이었다.
그 날도 나는 나무토막을 가지고 비밀기지에 도착했다. 오후의 따뜻한 햇살을 맞으며
나무를 조각하는 건 내가 정말로 좋아하는 일이였다.
사람, 동물, 때로는 나무토막으로 작은 나무를 조각하는 일도 있었다.
내가 조각에서 단순히 손을 놀리는것 이상의 의미를 가지게 된건, 물론 우리집 덕분이다.
나무꾼 집안의 아들로써 나는 나무를 사랑하라고 가르침 받았다.
그러나 작업장에 굴러다니는 작은 나무가지나 토막은 그런 나무꾼의 '사랑'을 받지 못했다.
나무꾼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미운오리새끼인 내가,
나무꾼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나무토막에게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는일.
동병상련이라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렇게 해서 그들을 버렸던 이들뿐만 아니라
이 세상 모든 사람에게 사랑 받을 수 있는 물건이 된다면,
그건 정말 멋진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날도 그렇게 나는 내 손을 가지고... 하염없이 나무를 깎고 있었다.
귀퉁이가 마음대로 잘 깎이질 않아 고심하고 있는 내 머리위로, 종이비행기 하나가 내려온다.
나는 내심 크게 놀랐다. 누군가가 여길 보고 있다면 비밀기지가 더 이상 비밀기지가 아니게 되는거 아닌가.
오히려 멍청한 꼬맹이 한명이 묵묵히 나무를 깎는, 재미없는 쇼의 무대위와 다를 바가 없다.
그런 쓸데 없는 걱정을 하고 있는동안, 두개 째의 종이비행기가 이마에 부딪혔다.
누구의 소행인지 궁금해진 나는, 종이 비행기를 펼쳐 보았다.
조금은 삐뚤빼뚤한 글씨로
[ 여기서 나가. 바보]
라는 다분히 도전적인 내용이 써져있었다.
두번째 종이비행기에는...
[ 동쪽 입구쪽. 작은 건물 2층]
이번에는 방향지시다. 순순히 써져있는 곳을 바라본다.
그곳에는 나랑 비슷하거나 좀더 어린듯한 소녀가 한명, 창문에 걸터 앉은채로
있는 힘껏 눈꺼풀을 뒤집고 혀를 내밀고 있었다.
메롱이다.
내가 이 비행기를 알아차리고 볼때까지 저러고 있었던건가. 대단한 노력이다.
세번째 비행기가 날아온다.
[ 여긴 우리집이니깐 나가라고. 바보]
이제야 사태가 파악되기 시작했다. 아마 저 소녀는 이 제재소의 아가씨나 되는 분이시겠지.
제재소에 종이야 산처럼 쌓여있을거고, 심심한 아가씨는 수상한 사람에게 화풀이를 하고 계시는게 틀림이 없을거다.
하지만 나에게 여기서 나가달라는 건 꽤나 힘든 부탁이였다.
여기가 아니면 마음놓고 나무를 조각할 곳이 없단 말이다.
어떻게든 저 아가씨와 협상해서 이곳을 '비밀기지' 인 채로 놔둬야 했다.
제재소 주인에게 일러 바치기라도 한다면 절대로 내쫒길 테니깐.
그렇게 조그마한 아가씨와의 종이비행기 필담이 시작되었다.
허약한 내가 창문에 정확히 종이비행기를 집어 넣기까지는 수많은 시행착오가 필요했지만,
그것보다 더 힘든건 소녀의 설득이였다.
처음엔 여기서 뭘 하고 있는지부터 설명해야 했고, 내가 나무꾼 집안의 아들이라는 사실이나
나무꾼 아들이면서 왜 제재소에 있는지에 대해서도 해명해야 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드디어 무뚝뚝한 소녀는 어느정도 납득 한 듯 보였다.
톡. 새로운 비행기가 하나.
[ 너, 재밌는 녀석이네. 그럼 여기 있는 대신에 내가 ]
톡.
[ 원하는걸 만들어서 가져다 줘야 해. 그게 조건이야.]
그정도로 내 비밀기지를 지킬 수 있다면 괜찮은 조건처럼 보였다. 저 소녀가 뭘 요구하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만들어서 가져다 달라는걸 보면 목제품이겠지. 조각할 거리를 받는건 나로서도 흥미로운 제안이였다.
[좋아. 그럼 뭐가 필요한데? 대단한건 못만들다고?]
이번엔 내쪽에서 비행기를 날린다.
톡. 금방 답장이 날아온다.
정말 제재소엔 종이가 넘쳐나는건가... 비행기를 주우면서 그런 생각도 해봤다.
[너한테 많은건 바라지도 않아. 우선은 연필을 만들어줘]
제멋대로인 아가씨다. 돈 많은 제재소 사람들의 생각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게 조건이라면
나는 받아 들일 수 밖엔 없겠지.
연필은 흑연만 구할 수 있다면 쉽게 만들 수 있었다. 가게에서 파는듯한 그럴듯한 물건은 아니지만
글씨를 쓰는데는 지장이 없을정도의 물건은 나도 깎을 수 있었다.
문제는 연필을 어떻게 만드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전달하느냐 였다.
몇번 종이비행기가 오가고 나서야, 결국 내가 저녁에 비밀기지에서 나올때
나무밑둥위에 연필을 가져다 놓고, 다음날 내가 오기전에 소녀가 가지고 가기로 이야기가 정리되었다.
그리고 그 다음날 아침, 내 비밀기지에는 조그마한 초콜렛 상자와, 종이비행기 하나가 놓여져 있었다.
[제대로 만들어. 바보]
해달라는 대로 해줬는데도 이 모양이다. 역시 부잣집 아가씨의 생각은 알 수 가 없다.
그 날 이후로도, 소녀는 매일같이 종이비행기를 날려 나랑 이야기하곤 했다.
어떤때는 조그만한 말을 만들어달라, 또 어떤날은 나비를 만들어달라...
작업속도가 더뎌지는건 귀찮았지만, 적어도 고정 손님이 한명 생겼으니 그걸로 만족했었다.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봄날의 하늘엔 꽃에 관한 이야기,
여름엔 나에게 있어서 조각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도 이야기했다.
가을엔 마을서 추수한 곡물이나 제재소 사람들 이야기.
겨울엔 나무꾼의 이야기도 해 주었다.
비가 오거나 눈이와서 종이비행기가 날 수 없을땐, 서로 지긋이 바라보기만 하는 시간이 대부분이였다.
부잣집 아가씨가 하는 생각은 그래도 도통 알수 가 없어서, 나는 시선을 피하고 작업에 몰두하기 일쑤였지만.
그도 그럴게 종이비행기 위에 실린 이야기는 일상잡담이나 내 이야기 밖엔 없었다.
소녀는 자신에 대해서는 이상할 정도로 얘기하길 싫어했다.
나야 비밀기지가 남아있어 준다면, 또 꼬마 손님한명이 있어준다면 그걸로 족했으니 더 깊게 파고들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렇게 창문위의 신비한 아가씨와의 생활이 시작된지도 1년이 다 되어가던 때,
점점 소녀의 비행기가 날아드는 횟수가 줄어들었다. 글씨체나 내용은 평소와 다름이 없었지만, 눈에띄게 그 빈도가 줄어들었다.
나는 드디어 아가씨가 새로운 심심풀이 상대를 찾았거나, 나한테 질린거겠지 하고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그리고는 처음 비행기를 받은 그 날로부터 1년 반이 지났을까,
창문에서 종이비행기를 날리던 꼬마손님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졌다.
제재소는 예나 지금이나 번창하고 있으니 어디 도시로 이사를 보냈거나 유학을 시킨거겠지.
솔직하게 조금은 서운했지만, 소녀가 이런 미운오리새끼랑 지내는거보단 더 즐거운 나날을 보내고 있으리라 생각하면, 오히려 안심이 되기도 했다.
나의 첫 손님은 그렇게 어디론가 떠났고, 그 뒤로 10년이상의 세월이 흘렀다.
도시에 나가 멋지게 미운오리새끼에서 백조로 탈바꿈한 허약한 소년은, 지금은 개인 화랑을 가지고 있을정도로 번듯한 예술가다.
아버지나 할아버지에게도 인정받아, 나무를 사랑하는 우리집안의 가르침을 지키는 녀석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다.
마침 큰 개인전이 끝나고 조금은 마음의 여유를 가질 겸해서, 10년만에 '비밀기지'를 찾아 온 참이다.
어렸을적엔 그렇게도 위풍당당해 보였던 제재소는 더이상 그 역할을 하고 있지 않았다.
몇년전에 발각된 상인들과의 비리에 연루된 제재소 아저씨가, 제재소에 불을 지르고 야반도주했기 때문이다.
소녀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그 후로 알 수 없었다.
조금은 귀찮고 귀염성이 없었지만 소중한 내 첫 손님, 그리고 말동무였던 꼬마 아가씨.
지금은 터만 남아있는 제재소 건물에 살고있는 옛 고용인에게 소녀에 대해 물어보았다.
그리고.
나는 이야기의 전말을 듣게 되었다.
그녀는 어디론가로 떠난게 아니였다.
꼬마 아가씨는, 이 세상엔 더이상 없었다.
소녀는 원체 몸이 약했다고 한다.
밖을 걸어다니는것 조차 마음대로 하지 못하고, 언제나 자기 방 안에서 조용히 지냈다고 한다.
학교에도 가지 못하고 친구조차 한명 없는 소녀는, 부모에게도 언제나 무뚝뚝했다고 했다.
그 어느 유명한 의사도 그녀의 병을 고칠 수 없었다.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다는 의사도 있었다.
그런 소녀가 어느날을 기점으로 종이를 잔뜩 달라고 했다. 글을 쓰겠다며 연습할 종이가 필요했다고 했다.
하지만 그녀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그녀의 방에선 어떠한 습작도, 소설도 찾을 수 없었다고 했다.
대신에 소녀의 방에서 나온건 누군가가 만든건지 삐뚤빼뚤한 연필에, 몇가지 목예작품이라고도 했다.
아니다.
그녀는 분명히 글을 쓰고 있었다.
조그마한 창문을 통해 , 글을 쓰고 있었다.
묵묵히 나무를 깎는 소년과 창밖 세상만을 바라보는 소녀의 이야기.
그녀가 쓴 글은, 분명히 아름다운 것이였다.
그 누구도 몰라준다고 해도, 소년은 알아주어야만 했다.
동시에, 소년은 자신의 바보같음을 깨닫는다.
그는 1년이 넘도록 소녀와 종이비행기를 주고 받았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한번도 들은 적이 없었다.
사람의 손이란 참 신기한 물건이다.
밥을 먹고, 글을 쓰고, 악기를 연주하고.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소중한건 또 다른 누군가의 손을 쥐어주는것.
그때의 나는 그걸 알지 못했다.
소년은 그녀의 손을 잡아 줬어야 했다.
창문을 바라볼게 아니라 창문위를 타고 올라가서라도 그녀의 목소리를 들어야 했다.
그녀가 싫어한다고 해도 소녀의 이야기를 들었어야 했다.
한번이라도.... 소녀를 이해하려고 했었어야 했다.
한때 소년이였던 남자의 눈가에 눈물이 맺힌다.
- 바보는...네가 훨씬 바보였잖아...
나는 또 다른 누군가의 손을 쥐어 주지 못했다.
그런 내가 지금 할 수 있는거라고는, 이것 밖엔 없을거다.
조금은 오래된 비밀기지에서,
나는 내 손을 가지고... 하염없이 나무를 깎고 있었다.
지금 내 조그만 손님이 원하는건, 삐뚤빼뚤한 연필 몇자루 일테니깐.
14:08 종료
시간제한 없이 걍 가는대로 썼습니다 고갱님
퀄이 망이라서 죄송합니다 고갱님ㅜ
댓글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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앱씨
2011.05.19 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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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하
2011.05.19 14:42
중간에 비가 좀 내렸거나 소녀가 보라색을 좋아했으면 소나기 ㅋ
충분히 훌륭하게 잘 썻구만 왜 퀄이 똥망이라그래... -
AugustGrad
2011.05.19 14:46
와 잘썻네. 산다이바나시가 키워드 3개로 글쓰는거 말하는거임? -
롤링주먹밥
2011.05.19 17:42
원래는 라쿠고(落語)에서 즉석으로 3가지 단어를 받아 이야기를 진행하는건데
여기선 마찬가지로 3개 키워드로 즉석에서 글쓰는것도 산다이바나시라고 함요ㅋ
리체트리사라고 나갈없에 산다이바나시 소개한 분의 룰은 50분이나 1시간내에 쓰는거인데
내는 즐기려고 하는거라 시간내 완성은 뒷전이랑께ㅜ -
AugustGrad
2011.05.20 13:14
아하 그러한 거였구나. -
★렌키아
2011.05.20 17:10
와 진짜 잘썼네..ㅠㅠ
단순히 눈에 보이는 3가지만 말했을 뿐인데 이렇게 대단한 글을 쓰실 수 있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