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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갈 데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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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蘇說) : fleer 01

2011.06.12 08:54

넷카마2호 조회 수:238

한 가지 상상을 해보자.

괴물이 한 마리 있다. 전설에나 나올만한 덩치의 괴물이다. 풀어두면 얼마 지나지 않아 지상위의 모든 생물을 잡아먹어버릴 정도의 최강의 괴물. 그 어떤 함정도 피하는 지혜도 가지고 있고, 그 어떤 무기도 뚫지 못하는 가죽을 두르고 있으며, 수백 수천의 창이 날아와도 피할 수 있을 정도로 날래고, 길을 막는 바위도 가볍게 부숴버리는 힘을 가지고 있다. 무엇보다 절대 포기하지 않는 끈기와 사냥하려는 자를 오히려 함정에 빠뜨릴 정도로 교활하다. 먹이사슬의 최정상에 군림하고 있는, 그 어떤 약점도 없는 무조건적인 포식자다.

하지만 이 괴물이 언제나 날뛰는 것은 아니다. 평소에는 주변에 있는 풀이나 조금 뜯어먹는 온순한 초식동물같다. 배고프다고 사냥하지 않는다. 기분이 나쁘다고 살육하지 않는다. 화가 난다고 살해하지 않는다. 강자의 미덕이라는 듯이 자신의 본능을 최대한 억제하고 발톱을 드러내지 않은 채 산책하고있는 무해한 생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괴물은 위험하다. 다른 이들이 괴물을 괴롭히고, 폭행하고, 배고프게 하고, 짜증나게 하고, 설령 괴물의 사지를 자르려 한다고 해도 그들을 공격하지 않는 생물이지만, 이 괴물은 이유없이 날뛴다. 공복을 느낀다고 사냥하는 것이 아니다. 짜증이 난다고 살육하는 것이 아니다. 분노했다고 살해하는 것이 아니다. 아무도 이해하지 못할 이유로, 혹은 그런 이유도 없이, 괴물은 모든 것을 파괴한다.

그런데 이런 괴물과 단 둘이 작은 숲 안에서 살고 있다고 상상해보자. 당신이 아무리 괴물과 접촉하려하지 않고, 실제로 그렇지 않더라도 괴물은 당신의 존재를 알고있다. 그렇기에 괴물이 이유없이 사냥을 시작하면 숲 안에 있는 자신 외의 유일한 생물인 당신을 먼저 노린다. 사냥을 시작했다는 것조차 알아채기 전에 달려온다. 달려오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기 전에 뛰어든다. 뛰어든 것을 인지하기 시작할 무렵 공격한다. 약자를 상대한다고 해서 그 어떤 자비도 주지 않고, 그 몸이 가진 온 힘을 다해 당신을 사냥한다.

상상해보자. 당신은 도망칠 수 있을까? 살아남을 수 있을까? 그 생명을 조금이라도 더 길게 유지할 수 있을까?

 

 

 

 

 

 

 

 

 

 

 

 

"그러네. 솔직히 말해서, 나답지 않게 질려버렸어."


갑자기, 괴물이 말했다.

전조도 없이, 사냥의 끝을 고했다.

복선도 없이, 자비를 베풀었다.


"사실 나한테 그렇게 강한 끈기 같은 건 없었는지도 모르지, 사냥같은 건 대개 순식간에 끝나버렸으니까. 제일 길게 갔던 게 이 일대의 주인을 먹을 때였나? 그 때가 아마 반달정도 걸렸을 거야. 그렇다곤 해도 그 때는 그 녀석이 저항을 했으니까 이 내가 별로 경험해보지 못한 부상이라는 것을 입었으니까 그정도 시간이 걸렸었지. 도망치는 상대를 사냥하는데 하루 이상 걸린 건 정말 처음이네."


나도 이렇게 오랫동안 도망다닌 것은 처음이다. 애당초 이런 실제 공포체험 자체가 난생 처음이다...라는 말은 나오지도 않았다. 계속해서 사냥당했던 나로썬 이 괴물의 심기를 거슬리지 않게 입다물고 있을 수 밖에 없다. 어쩌면 침묵을 싫어할 수도 있지만, 적어도 말실수를 하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야, 정말 최고라고, 너. 비록 죽이진 못했지만 재밌었어. 나중에 엄청나게 심심해지면 다시 사냥해줄게. 그 때도 잘 도망쳐줘."


엄지를 치켜세우고 칭찬하는 괴물의 입에서 말도 안되는 말이 튀어나왔다.

그야, 나도 열심히 도망쳐서 너 같은 괴물에게 죽지 않은 나에게 마음속으로 눈물의 박수를 치고있지만 말이다. 다시 이런 경험을 하는 건 절대 사양이다. 말을 하지 않고 어떻게든 넘길 생각이었지만 순식간에 상황이 바뀌었다. 이대로 입을 다물고 있으면 긍정의 의미로 받아들일 분위기다.


"아니...그건 좀 곤란한데."


용기를 짜내 말했다.


".......요."


하지만 어째선지 존댓말을 해버렸다. 무서우니까 어쩔 수 없다. 어린 시절 지팡이를 들고 쫓아오는 앞집 할아버지를 봤을 당시보다 무섭다. 비교도 안되는 기억이긴 하지만, 굳이 비교할 만한 경험이 이정도밖에 없다. 그만큼 최악의 경험이었다고, 지금까지 도망쳐온 것은. 그러니까 다시 사냥당한다는 것은 절대 사양이다.


"아? 어째서?"

"...그야 내가, 버티지 못할 거니까."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언제 덮쳐올 지 모르는 괴물을 상대로 도망치는 것은 한계다. 언제나 한계라서, 정말 엄청나게 아슬아슬하게 도망쳐왔다. 이미 평생의 운을 지금까지 다 써왔다고 본다.


"...그러냐. 아까운데..."


괴물이 진심으로 아쉽다는 표정을 하며 말했다. 최악의 경험을 하게 한 것 치곤 이야기에나 나올 법한 괴물의 이미지는 아니기에 약간 죄책감이 들었지만, 죄책감을 느낄 때가 아니다. 누가 봐도 내가 피해자고, 저 괴물은 재범률이 근 100%인 최악의 범죄자다. 내가 사는 것이 최우선이다. 내가 살아서 네가 고통받는다고 해서, 내가 신경쓸 것 같냐. 오히려 이쪽은 목숨이 달려있고 넌 그저 무료함을 느끼게 될 뿐이잖아. 난 절대 나쁘지 않다.


"좋아, 그럼 말이지."


시무룩했던 표정이 거짓말이라는 듯이 활짝 웃는 얼굴로, 괴물이 손뼉을 치며 말했다. 안좋아안좋아. 절대 안좋을 것 같은 느낌이다.


"너, 내가 말하는 녀석 하나만 죽여라. 그럼 다시는 널 쫓지 않을게."

"...아?"


안좋은 예감이 바로 적중해버리면 어쩌라는 거냐고.


"뭘, 걱정하지 않아도 돼. 엄청나게 강한 녀석이겠지만 나한테서 도망친 너라면 충분히 죽일 수 있을거야."

"엄청난 과대평가다."


나도 모르게 말해버렸지만, 괴물은 별로 신경쓰지 않는 듯이 멋대로 말을 계속했다.


"내가 잡아먹어도 별로 상관없긴 하지만 말이지. 아니, 오히려 잡아먹고싶은 녀석이지만 어쩔 수 없지. 죽여버려."

"그럼 나도 사냥하지 못하고 그 녀석도 사냥하지 못하니까 손해 아냐. 도대체 무슨 논리냐고."


존대 같은 것은 잊은 지 오래다. 대체 뭐야, 이 괴물의 논리는. 사냥당하기 시작했을 때도 그렇고 사냥당하던 도중도 그렇고, 이 괴물의 행동은 이해가 안된다. 그저 말을 할 줄 아는 괴물은 아닐텐데, 행동원리 같은 것이 없는 것 같다.


"무슨 소리야, 내가 널 사냥하지 못하게 만들 거면 너도 그정도의 피해를 볼 생각은 해야지."


단순한 화풀이였던 것 같다.


"그러니까, 나에게서 도망치고 싶으면 그 녀석부터 죽이고 가라! 라는?"

"뭐야, 잘 알잖아?"

"보통 나를 죽이고 가라, 아닐까..."


엄청난 자비를 베풀고 있으면서 이상한 곳에서 자비가 없다.
그보다 어째서 제 3자를 죽이고 가라는 거야.


"그치만 너, 날 죽일 수 있을 리가 없잖아?"

"...그건 그렇네."


도망치는 것으로도 일생의 운을 다 쓴 느낌인데 이런 괴물을 죽이라니, 전생이나 후생이 있다면 최소한 지구가 멸망해서 우주의 먼지가 될 때까지의 환생을 하고, 그 모든 삶의 운을 걸어도 죽일 수 있을까나, 하는 느낌이다. 그정도를 걸어도 확률이 반반도 안될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다고...생판 모르는 남을 죽이라니."

"생판 모르는 남이니까, 죽일 수 있는 거 아냐?"


괴물이 이상한 눈을 하면서 대답했다. ...그야 지인을 죽이는 것이 더 힘들겠지만, 보통.


"그렇다고 나 때문에 남을 죽이라니, 그런 일..."

"그렇지만, 살고 싶었던 거 아니었어?"


괴물이 내 변명을 잘라내며 말했다.
부정할 수 없다.
괴물답지 않은 순수한, 어린 아이 같은 눈으로 추궁당해서가 아니라, 도망칠 때는 잘 몰랐는데 알고보니 여자아이였네. 하긴 이정도 장발이면 보통 그렇게 생각하겠지... 같은 생각을 무심코 하고 있어서가 아니라, 지금까지 나를 사냥한 상대라서 부정할 수 없다.
이 괴물이 죽이라는 사람을 죽이지 않겠다고 한다고 생각해보자. '언젠가 심심해지면'이라고는 했지만 곧바로 다시 나를 사냥하려 할 수도 있다. 혹은 모처럼 자비를 베풀었더니 거절하다니, 라면서 기분나빠하며 날 죽여버릴 지도 모른다. 다른 가능성이 있다 하더라도, 최악이 될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난 절대로 이 괴물에게 잡혀서, 땅에 처박혀서, 비명을 지르면서, 도망다닌 것을 빼면 그다지 스펙터클하진 않았던 짧은 인생을 회상하며, 고통에 몸부림치며 잡아먹히겠지. 그런 건 절대 사양이다. 절대 거절이다. 절대 사절이다.
만약 이 도주의 기억이 세월이 흘러 풍화된다면 주제에 맞지 않게 진지하게 고민을 시작했겠지만, 지금은 막 도주가 끝나고 살 길이 보이는 상황이다. 이 제안을, 절대 거절할 수 없다. 미로에서 출구가 보이는데도 다시 미궁으로 돌아가버릴 정도로 난 변태가 아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좋아. 누굴 죽이면 되는거지?"


그 제안을 수락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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