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다이바나시 [눈, 거짓말, 야구방망이]
2011.12.26 03:25
그 날, 나는 내가 좋아하는 그녀를 죽였다. 이유는 고의로 머리속에서 지워버렸다. 어차피 그녀를 죽인 지금에서는 뭐든 상관없으니까.
야구방망이로 그녀의 머리를 강하게 내리쳤다. 그녀가 풀썩 쓰러지고 나는 그녀를 확인사살이라도 하듯 거듭해서 그녀를 내리쳤다. 그녀의 배, 가슴, 다리, 팔, 얼굴까지 하나도 남김없이 모두 내려쳤다.
그렇게 수십 번 야구방망이를 휘두르고 마침내 그녀가 다진 고기가 되었을 때 나는 방망이질을 멈췄다. 그녀가 쓰러지기 전에 이미 쌓여있던 눈이 붉은 피로 물들어서 마치 흰 종이 위에 붉은 물감으로 그려진 꽃을 보는 듯했다. 다만, 그 꽃은 예술작품을 보는 듯한 숭고한 마음이나 아름다움에 대한 감탄은커녕 구역질만 날 뿐이었다.
나는 그 피묻은 방망이를 산 아래 멀리 던져버렸다. 쇠방망이가 나무에 부딪혀 깡 하고 산을 울렸다. 나는 그게 마치 사이렌소리라도 되는 양 비명을 지르며 산을 뛰어내려왔다.
그 후, 나는 집에 뛰어들어가 거실에서 머리를 쥐어뜯고 있다가 화장실로 달려가서 구토를 했다. 어젯밤에 먹은 김치찌개가 다시 붉은 꽃을 연상시키는 바람에 없는 속까지 모두 토해냈다. 위액이 입에서 흘러내리고,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한참을 구역질을 한 후 나는 변기물을 내리고 입을 씻은 후 거실소파에 누운 후 바로 잠들었다. 유일하게 위안을 받을 수 있는 장소는 꿈밖에 없을 듯했다.
다음 날, 창문을 열었을 때, 온 세계가 하얗게 뒤덮여있었다. 뉴스에서는 17년만의 폭설이라는 단어를 언급했다. 하늘이 붉은 꽃 위에 백지를 덧씌운 것이다.
내가 기억하는 그 날은 그런 날이었다. 17년만의 폭설이 서울을 뒤덮은 날이 아니라 그녀를 죽인 날.
그렇게 나는 그날의 추억을 새하얗게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녀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갈색 짧은머리와 그에 매치되는 연갈색 눈. 백자와 같이 하얀 피부와 환한 웃음. 이름까지 한 글자빼고 모두 똑같았다. 마치 도플갱어라고 할 정도로 그녀는 내가 사랑에 빠진, 그리고 내가 죽인 그녀와 닮았다.
우연일까? 나는 생각했다. 하지만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소름끼칠 정도로 똑같았다. 그녀가 나에게 친절하게 대할 때마다 나는 마음속으로 그녀를 몇 번이고 죽였다. 무서웠으니까.
하지만 나는 동시에 그녀에게 사랑에 빠졌다. 내가 죽인 그녀도 내가 사랑했던 그녀기 때문에. 점점 그녀에게 빠져들었고, 그때마다 그녀가 무서워졌고, 그때마다 그녀를 마음속으로 죽였다.
장작을 패듯 도끼로 머리를 찍었다.
고기를 저미듯 식칼로 그녀를 저몄다.
못을 박듯 망치로 그녀의 머리를 힘껏 쳤다.
쇠붙이를 지르듯 톱으로 그녀를 잘랐다.
시체를 박제하듯 포름알데히드로 그녀를 절였다.
그녀가 흐물흐물해지고 머릿속이 피로 물들어도 나는 멈추지 않았다. 쉼없이 그녀를 죽였다. 이윽고 야구방망이가 떠올랐을 때, 나는 구역질이 나서 교실을 뛰쳐나왔다. 속을 게워내고 나왔을 때 그녀가 내 앞에 서있었다. 괜찮냐며 나를 걱정해주는 그녀에게 거짓말을 하며 나는 그녀를 다시 죽였다.
어느덧 나는 아무도 보지 못할 때 그녀의 책상을 부수고 있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사물함을 난장판으로 만들어놓고, 체육복을 물감으로 망쳐놨다. 의자에 칼로 죽으라고 새겨넣고, 칠판에 그녀의 이름이 적힌 인형을 못으로 박았다. 매일 밤마다 붉은 펜으로 흰 종이에다 그녀의 이름을 적었고, 매일 아침마다 그 편지를 그녀의 집 우편함에 넣었다.
나는 거짓으로 그녀를 위로해주고 그녀를 더욱 괴롭혔다.
그리고 그 날, 그녀는 크리스마스 트리 아래에서 나에게 키스했다. 혀가 오고가지도 않은 입맞춤을 살짝 하고 한 걸음 뒤로 물러나 반짝반짝 빛나는 크리스마스 전구를 배경으로 귀엽게 웃었다. 고백이었다. 나는 그 고백을 받아들인 척 떨리는 눈을 감추기 위해 그녀를 안았다. 그렇게 나는 그녀에게 사랑에 빠졌다. 그리고 그녀를 죽이지 않으면 안될 정도로 그녀가 무서워졌다.
보여주고 싶은 게 있다는 핑계로 그녀를 그 자리로 데리고 갔다. 어두운 산은 한치 앞도 안 보였지만 나는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는 주변을 둘러보며 내 손을 잡고 산을 올라왔다.
마침내 그 자리에 다다랐을 때, 나는 그녀를 바닥에 쓰러트리고 목을 졸랐다.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은 볼 수 없었다. 벌써 추워졌는지 눈에서는 이슬방울이 맺혀 떨어지고 있었다. 대략 두세 방울 쯤 떨어졌을 때 그녀의 팔에 들어가던 힘이 풀렸다. 이번에는 사이렌소리를 낼 만한 물건도 없었다. 나는 그저 웃었다. 이제야 그녀를 떠올리게 하는 모든 걸 없앴다고. 그리고 내 앞에 누워있는 무언가를 꼭 껴안았다. 뭐라도 껴안고 싶었다. 그것만이 나를 위로해줄 것 같았다.
왜 나는 이렇게 되는 걸까. 사랑하는 사람을 저주할 수밖에 없는 걸까. 사랑하는 사람을 죽일 수밖에 없는 걸까. 사랑하는 사람의 머리를 야구방망이로 치고, 사랑하는 사람의 목을 조를 수밖에 없는 걸까.
그 해답을 찾았을 즈음에, 나는 이미 야구방망이 대신 저 아래에 떨어지고 있었다.
그녀가 남긴 흔적에서 벗어나는 방법 중 이렇게 쉬운 방법이 있었는데 왜 나는 이때까지 모르고 있었을까? 하고 생각하는 순간 모든 것이 까맣게 물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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