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날에 시드노벨 공모전 냈다가 떨어진 거
2011.12.30 21:57
마지막으로 연필을 썼던 게 언제쯤이었을까.
초등학교 때는 꽤나 애용했던 기억이 나니 아마도 중학교 때일 것이다.
연필을 쓰는 것을 그만뒀던 이유를 되새겨보자면 아마도 부끄러웠기 때문이지 않은가 싶다. 당시의 아이들─나를 포함해─연필을 쓰는 것은 어린이뿐이다, 라는 말에 나는 쥐고 있던 연필을 놓았던 것이다.
어린이는 연필, 청소년은 샤프, 어른은 볼펜.
누군가가 딱히 정하지도 않은 것에 이끌려 우리는 쥐고 있던 연필을 놓아버렸다. 변명거리라면 ‘우리는 이제 중학생이니 더 이상 어린이가 아니다’ 정도.
물론 나이를 먹어 연필을 놓는 것에 이유가 있을 리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연필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애써 의식하며 갖은 이유를 대 그것을 놓아버렸다.
성장한 것도 아니고, 자연스러운 것도 아닌, 그저 ‘어린이’ 라는 것을 놓고 싶었을 뿐.
그런데 아직도 연필을 쓰고 있는 사람이 있고, 그 사람이 눈앞에서 연필을 깎고 있다고 한다면 무슨 기분일까.
어린애 같다?
아니, 솔직히 아무런 기분도 들지 않는다.
있다면 그건 “연필이라……오랜만에 보는군.” 정도의 소소한 감상뿐.
그토록 ‘어린이’ 라는, 족쇄처럼 느껴지던 그것이 이제는 별 것 아닌 것처럼 느껴지게 된 것은, 시간이 지나 이제 더 이상 연필이라는 것에 대해─어린이라는 것에 대해─벗어나려는 충동을 느끼지 못하게 되어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도 그 당시 연필이라는 것을 어린이의 명함──이라고 생각했었기에 할 수 있었던, 사치스러운 시간낭비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젠 신경 써야 할 것이 너무 많다.
고등학생에게 연필 따위 이제 어찌 되도 좋은 그런 하찮은 것이 되어 버린 것이다.
어린이에서, 청소년으로. 청소년에서 어른으로.
나는 무엇 때문에 어린아이를 벗어나 어른에 가까워지고 싶어 했는지, 당시 연필을 쥐고 있을 때 무슨 생각을 했는지 같은 건 이젠 생각나지 않는다.
아마도 이제 버려질 저 연필 부스러기와 같이 버려져 사라진 것일 테지.
왜였을까, 라고 생각하며,
손에 쥔 샤프를 휙 한 바퀴 돌렸다.
1/ 그 남자의 시선♂
시간이라는 것은 정말로 알 수 없는 것이다.
어떤 때는 눈 깜짝할 사이 몇 시간이 흘러가버리는가 하면, 눈 한 번 깜짝 안 하고 지켜보면 채 5분도 흐르지 않은 상황이 존재하는 것이다.
어떤 때는 인생이라는 긴 의미로, 어떤 때는 순간이라는 짧은 의미로.
수없이 모습을 바꾸어 간다.
바뀌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시간의 방향.
언제나 일방적으로 흘러갈 뿐이다.
아마도 인생이라는 것은 시간이라는 홍수에 떠내려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며, 그 속에서 허우적대는 것이 바로 ‘산다’라는 것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18살의 고등학생인 나는 아직 열심히 허우적대고 있다.
물론 허우적대는 것에 급급해 다른 무엇인가를 생각할 겨를도 없이 떠내려가고 있는 중이지만.
과연 이 인생에 얼마나 가치가 있는 것일까, 라는 철학적인 문제라기 보단 누구나 한 번쯤 생각할법한 보편적인 고민을 하면서, 계단을 내려간다.
회색 계단. 빛이 바래져 조금 아픈 듯한 색.
발로 밟혀 신발자국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계단. 인생의 계단이 있다면 이런 것일 테지. 밟히고 더러워져 뒤돌아보면 인생의 자국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그런 것.
그리고 지금 눈앞에 그 계단의 끝이 있다. 이 계단을 내려가면─인생의 막바지에 다다르면─그 다음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만약 아무것도 없다면,
지금 이 삶에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깊은 사색을 잠시 그만두고서, 신발장의 문을 연다.
끼이이이, 조금 오래된 철제 캐비닛의 기괴한 울음소리. 밖의 누군가가 듣는다면 이 어두운 밤에 충분히 오해할만한 소리였다.
천천히 교내용 슬리퍼를 벗어 한 편에 두고 조금 화려한 메이커 신발을 꺼내 신는다.
이로써 귀가 준비는 모두 끝. 남은 건 도보로 집에 도착하는 것뿐이다.
평소와 동일하게 진행되는 일상에 조금 진저리가 나면서도, 어쩌겠느냐는 마음이 애써 달래고 있다.
그렇게 캐비닛에서 손을 떼고 교사校舍를 떠나려던 찰나,
무엇인가 본 듯한 느낌이 들었다.
새하얀…….
물론 이 상황에서 ‘새하얀 무언가’라고 한다면 이구동성으로 ‘귀신’을 떠올릴 테지만, 내가 그 새하얀 무언가를 본 게 캐비닛의 안이라는 점에서 탈락.
뒤로 돌아 다시 캐비닛 앞에 선다.
누군가의 장난인가? 무얼 넣어놓은 거지? 여러 의문이 스쳐지나간다. 잠시 고민하다 열지 않고서 이러고 있는 것이 무슨 소용인가, 라는 올바른 답을 도출해내었다.
나는 이제 이 ‘슈뢰딩거의 고양이 상자’를 열려고 하는 것이다.
반쯤 기대, 반쯤 우려를 하면서 찰칵.
끼이이이, 익숙하지만 별로 친숙하진 않은 소리.
그리고 덩그러니 놓여있는 편지 하나.
새하얀 무언가.
새하얀 봉투.
이건 혹시……러브레터?
도대체 누가? 어째서 넣어놓은 거지? 아니 그 이전에 러브레터가 아닐 수도 있잖아? 다시금 여러 고민이 스쳐지나간다. 역시나 이번에도 열지 않고서 이러고 있는 것이 아무 소용 없다는 결론에 당도했다.
나는 지금 이 ‘상자 속의 상자’를 열려고 하는 것이다.
반쯤 기대, 반쯤 우려를 하면서 편지의 봉인을 뜯었다.
편지 안의 편지──라는 별로 달갑지 않은 전개는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나의 예상은 보기 좋게 틀렸다.
나는 이 고양이를 ‘죽어 있는 것과 살아있는 것이 공존하는 형태’로 남겨뒀어야 했다.
나는 어처구니없게 가스에 질식해 죽어버린 고양이의 시체를 봐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 가스는 상자에서 올라와 나에게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판도라의 상자를 연 여인의 심정이 이런 것일까.
나는 다소 충격적인 내용의 편지를 손에 쥐고 신음했다.
『당신은 더 이상 이성과 접촉해서는 안 됩니다.
이를 어길 시 당신에게 접촉한 여성들에게 좋지 않은 일이 생길 테니 각별히 주의해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더 이상 이성에게 다가가지도, 다가오지도 못하게 하세요. 』
서론, 결론은 간데없고 있는 것은 오직 본론뿐.
그것도 상당히 서툴고 위협적인 내용의 ‘협박편지’
되새겨 보아도 별로 누군가에게 원한 살 만한 짓은커녕 켕기는 짓도 하지 않았다……라고 하는 것은 명백한 거짓말이지만 그렇다고 누군가에게 ;이런 짧고 무성의한 ‘협박편지’를 받을 만큼 잘못한 것도 없다는 것이 사실이다.
아마도, 라고 뒤늦게 수식어를 붙이고서, 나는 손에 쥔 편지를 지긋이 노려보았다.
2/ 그 여자의 시선♀
요즘 조금 신경 쓰이는 사람이 생겼습니다.
보고 있으면 좋고, 안 보면 보고 싶은 그런 사람.
이런 게 바로 ‘사랑’이라는 걸까요?
저는 아직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를 계속 보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그는 잘생기고, 키도 큽니다.
물론 외형을 보고 좋아하는 게 아니라 그가 내뿜는 분위기에 빠져버린 겁니다.
그는 언제나 투명한 눈빛으로 무언가를 바라보고 있는 걸요.
누군가 말을 걸지 않으면 그저 창밖을 보면서 무언가를 주시하고 있습니다.
하늘을 보고 있는 걸까요?
왠지 신비스러운 그의 분위기가 너무 좋습니다.
그런데 요즘 조금 신경 쓰이는 일이 생겼습니다.
어째서 다른 여자애들이 그에게 가서 말을 걸면 마음이 조마조마한 것일까요?
이런 게 바로 ‘질투’라는 걸까요?
저는 아직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와 이야기하고 있는 여자애들을 보면 가슴이 쑤셔옵니다.
사실……조금 부럽기도 합니다. 아니, 많이요.
저는 그와 좀 더 사적이고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사실, 전부터 생각해온 방법이 있긴 합니다만…….
하지만 그런 짓을 한다면 전 나쁘고 이기적인 여자가 되어버립니다.
그런 여자는 그도 싫어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 방법을 쓰지 않으면 다른 누군가 그를 데리고 멀리 가버릴 것만 같습니다.
저는 이제 어쩌면 좋을까요?
3/ 그 남자의 시선♂
대개 게임에는 힌트나 찬스가 있기 마련이다.
……아니면 치트키나 버그가 있거나.
애석하게도 현실에 그런 편리한 게 있을 리 없다. 이건 힌트 하나 주지 않은 채 막연하게 답을 맞히라는 것과 같은 것이다.
문제를 주지 않은 채 답을 맞히라는 퀴즈나 면접에서 흔히 쓰이는 즉석에서 골프공의 구멍 개수를 맞히라는 그런 것.
다른 점이 있다면 창의적인 발언을 한다고 해도 합격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내가 직면한 이 문제에서 창의력이나 난센스 같은 건 통하지 않는다. 오직 통찰력과 추리력이 요구될 뿐.
현실에 어떠한 자물쇠(상황)라도 열 수 있는 마스터키(능력)은 없는 것이다. 어떤 자물쇠가 있으면 맞는 열쇠를 얻어야 한다.
그런데 아무래도 내 열쇠가 들어가지 않는 것을 보니 녹이 슬어버렸나 보다.
그렇담, 억지로 밀어붙이는 수밖에.
나는 살며시 ‘자물쇠가 잠긴 문’을 꺼내 들었다.
예쁘고 반듯한 글씨로 쓰여진, 글씨와는 전혀 매치되지 않는 ‘협박편지’를 말이다.
도대체 누가, 어떠한 목적으로, 왜 나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는가. 이것이 나에게 주어진 문제이며, 당연하게도 힌트나 찬스 따위 있을 리 없다. 오직 내 힘으로 해결해야 한다.
후우, 크게 한숨을 내쉬며 살며시 눈을 감는다.
해결해내는 것이다.
이 모든 게 누군가의 악취미적인 장난이라고 해도, 정말로 누군가 나에게 악의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반드시 찾아내 나에게 ;이런 짓을 한 이유를 묻고 잘잘못을 따져야 한다.
그렇게 다짐하고 다시금 눈을 떴다.
현재 단서는 이것──협박편지.
예쁘고 반듯한 글씨로 쓰인, 유일한 단서.
4/ 그 여자의 시선♀
저질러버렸습니다.
그의 신발장에……협박장을 넣어놓고 와버렸습니다.
캐비닛이 열릴 때 이상한 소리가 나서 놀라긴 했지만요.
그 협박장은 다른 여자애들에게 접근하지 말라는 그런 내용의 편지입니다.
저는 이제 나쁘고 이기적인 여자가 되어버렸습니다.
제가 생각해도 제가 싫어집니다.
거기다 그는 요즘 뭔가 골똘히 생각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평소에도 뭔가 생각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이번만은 분명 저를 찾고 있는 것이겠죠.
만약 들키게 된다면, 저는 끝입니다.
분명 그는 저를 싫어하게 될 테죠.
그렇게 되면……저는 더 이상 버틸 수 없을 것입니다.
일을 저질러버린 것만으로도 다리가 후들거리고 후회가 밀려오는데 들켜버린다면…….
그런 상황은 상상하기도 싫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제 자신을 철저하게 숨겨야 합니다.
하지만 일을 저질러버렸다는 죄책감에 더 이상 이 짓을 계속할 용기가 없습니다.
이젠 그의 얼굴도 똑바로 바라볼 수 없습니다. ……아니, 그건 원래 그랬지만요.
그만두고 싶습니다. 하지만 지금 그만둔다면 그는 분명 저에게서 멀리 떠나버릴 테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제 자신의 존재를 철저하게 숨기고서, 계속하는 수밖에 없단 말입니다.
나쁘고 이기적인 여자가 되어서라도 말입니다.
5/ 그 남자의 시선♂
범인은 여자.
그런 결론이 나왔다.
이런 글씨체는 여자가 분명하다. 작고 반듯한 글씨, 이런 걸 쓸 수 있는 남자가 과연 몇이나 되겠는가. 그리고 이만한 글씨를 쓰는 남자 따위 들어본 적도 없다. 만약 이걸 쓴 게 남자라면 당장에라도 잡아다 내 필기담당으로 쓰고 싶을 정도다.
거기다 주위에 검증을 요청한 결과 그쪽에서도 역시 여성이라는 결론이 나온 듯 했다.
“그럼 범인은 나에게 원한을 가진 여성이라는 건가?”
골똘히 생각해보아도 여성에게 원한을 살만한 짓을 한 기억은 떠오르지 않았다. 애초에 여성과 관계되었던 일 중 특별한 것이 없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전에 사귀던 애도 자기가 먼저 차버렸기 때문에 논외, 아니 애초에 우리 학교 학생이 아니잖아. 혹시 저번에 실수로 옷을 더럽혔던 그 애가 원한을 품을 걸지도…….”
의심되는 일은 몇 가지 떠올랐으나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렇게까지 일방적으로 협박편지를 받을 만큼의 일들은 없었다. 아니 했다고 해도 조건이 맞지 않는다.
캐비닛에 편지를 넣어둘 수 있을 만큼 활동이 자유롭고, 주위에서 의심을 받지 않는 인물. 즉 교내에 범인이 있다는 소리. 하지만 교내의 사람에게 ;이런 편지를 받을 만큼의 일을 벌인 기억은 없다.
그렇담……원한이 아니라, 다른 이유가 있다는 건가?
“장난이겠지.” “켕기는 게 없는데 생각한다고 나오겠냐.”
무성의하게 돌아오는 대답.
처음 흥미를 가지고 접근해온 녀석들은 금세 흥미가 떨어졌는지 이 일을 그냥 ‘장난’으로 치부해버린 채 하나 둘 제 자리로 돌아가 버렸다.
저 녀석들에게 ;이 문제는 그저 장난으로 치부해버려도 어떻지 않은 단순한 흥미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결국 나 혼자서 해결해 보이는 수밖에 없다, 고 생각하는 것과 동시에 ‘장난’이라는 가능성을 진지하게 검토하고 있는 내 자신을 발견한다.
서론도, 결론도 없는 그저 본론뿐인 협박편지에다 내용은 황당하게도 ‘이성과 접촉금지’ 이를 어길 시엔 좋지 않은 일이 생길 것이라는 엉성한 위협까지.
애초에 이런 편지를 받고서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라고 생각하며 장난일 가능성이 농후해 보이는 편지를 진지하게 받아들였던 내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일반적으로 생각해보면 이런 편지 따위 사람들이 장난으로 돌리는 행운의 편지와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차이점이 있다면 이 편지는 18세기 영국에서 시작하지 않고 이상한 소리를 내는 내 회색 철제 캐비닛에서 시작되었으며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치지 않고 내 선에서 끝날 것이라는 것 정도.
나는 불행이 닥칠 것이라는 그 편지의 내용을 곧이곧대로 믿은 채 열 사람에게 같은 내용의 편지를 돌릴 뻔 했던 것이다.
……이 얼마나 유쾌한 멍청이인가.
멍청한 것도 정도가 있지, 라고 생각하며 어색하게 자신에 대해 옅은 조소를 날리고는 의자에 걸터앉은 채 뺨을 책상에 밀착시켰다.
시원하다, 체온에 열을 채 빼앗기지 않은 철제 책상은 굉장히 차갑게 느껴졌다.
설령 열을 다 빼앗겼다고 해도, 조금 지나면 다시 이렇게 차가워지겠지.
어쩐지 나와 좀 비슷한걸, 이라고 생각하며,
“──그래도 잠시 동안은 뜨거웠으니, 된 건가…….”라고 중얼거린 후 천천히 눈을 감았다.
6/ 그 여자의 시선♀
문제가 생겨버렸습니다.
그가 아무렇지도 않게 다른 여자와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힘겹게 협박편지까지 보냈는데 역시 그런 건 아무런 효과도 없는 걸까요?
역시나 장난이라고 생각한 것이겠죠.
솔직히 처음 보낼 때부터 장난으로 생각하지 않은 것이 의외였지만요.
그의 평소 분위기를 생각하면 그런 건 통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을 보고 그의 새로운 면을 보게 된 것 같아 기뻤습니다.
하지만 결국엔 저렇게 장난으로 여기고 다른 여자와 웃고 있습니다.
그에게 더 이상 협박편지는 의미가 없는 것일 테지요.
그 협박편지가 단순한 ‘장난’이기에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넘겨버린 것입니다.
다른 여자들하고 대화하고 있는 그를 전 두고 볼 수 없습니다.
저는 깨달았습니다. 저는 그에게 호의를 품고 있다는 것을요.
저는 그를 좋아하고, 독점하고 싶습니다.
그러기 위해선, 그 협박편지가 장난에서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비록 비열하고 이기적인 여자가 되더라도 말입니다.
7/ 그 남자의 시선♂
──뭔가 잘못되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천천히 천장을 올려다본다.
들리기로는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하던데, 어째서인지 구;멍은 없고 회백색 콘크리트 천장만이 시야를 가로막고 있을 뿐이다.
바둑판식으로 나열된, 손을 뻗으면 닿을 만한 높이의 천장.
분명 이 회색의 벽이 내 회생의 구멍을 막고 있는 것이다, 라고 생각하니 부쩍 짜증이 밀려올라왔다. 더군다나 이 참을 수 없는 불쾌감을 방출할 환기구마저 없다는 데서 하릴없는 분노가 솟구쳤다.
혼란, 분노 그리고 자책.
연이은 감정은 차례대로, 갑작스런 상황을 맞은 당혹감에서 놈에 대한 분노로 바뀌어갔고, 결국엔 나란 놈에 대한 자괴감으로 바뀌어 내 몸을 짓눌렀다.
잘못된 판단을 내려 시베리아로 가버린 나폴레옹이 이런 심정이었을까.
차갑고 날카로운 눈보라를 맞으며, 금방이라도 넘어질 것 같은 동토凍土를 지나는 노력 끝에 얻은 것이 엘바 섬에서의 유배생활.
끝은 비참하고, 과정 역시 비참하다.
이길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은 채 혹한의 땅을 지나, 수많은 병사를 잃은 채로 쓸쓸히 귀환했던 그처럼──.
나는 놈의 위협을 막아냈다고 착각한 채로, 바둑판식의 회색의 땅을 지나, 종국엔 같은 반 급우에게 피해를 입힌 못난이인 것이다.
아무래도 내 사전에 행운이란 없는 것 같다.
어쩌면 성인잡지의 한 페이지처럼 누군가 찢어갔을 수도 있다……그것도 찢어갔다는 것을 알아채지도 못할 만큼 매끄럽게 말이다.
또한 이 상황에 내 자신에 대해 매도를 퍼붓는 것이 엎질러진 물을 손으로 떠 담으려 하는 것처럼 의미 없다는 것 역시 알기에 그런 것보다 지금 내가 해야 하는 것을 하기로 했다.
나폴레옹 역시 유배지에서도 독서를 통해 지식을 쌓았다고 하지 않던가. 자신의 실수를 되짚어보기보다 현재 상황에 어울리는 행동을 하는 것이 더 이득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종국엔──다시 권력을 잡기 위해 기회를 노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현재 내가 해야 하는 일──쓰러져 있는 급우를 양호실로 옮기기 위해 그녀의 팔을 목에 두르고 일으키며 말했다.
“두고 보자, 프랑스(협박범)──!”
8/ 그 남자의 회상♂
의외로 아침의 학교는 평소의 인상과는 이질적이게 아주 고상한 분위기를 내뿜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스릴을 즐기려는 것인지, 학생들 대부분이 아슬아슬한 시간대에 등교하기 때문에 이른 아침에 등교하는 사람이 적기 때문이다.
조금 경사진 오르막을 올라 아침의 교내를 둘러보다보면 혹시 이곳은 내가 다니던 학교와 똑같이 생겼지만 사실 외계인의 실험장이 아닐까 라는 엽기적인 생각마저 들게 된다. 그리고 꽤 이른 아침임에도 등교한 사람은 꼭 있어서 어디선가 괴성이 들려오기도 한다.
아마도 저마다의 자유를 만끽하고 있는 것일 테지.
……어쩌면 실험을 당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렇듯 사람이 없음에도 이른 아침의 학교는 여느 때와는 다른 고상한 분위기를 내뿜고 있는 것이다.
바람이 불면 초목들에게서 풍기는 향긋한 풀내음과 조금 오래된 건축물의 고풍스러운, 조금 쾌쾌한 쌓인 먼지의 냄새.
텅 빈 회백색 복도와 투명한 아침햇살을 투과하고 있는 창문들.
이런 것들이 이루어져 아침의 학교를 한껏 치장하고 있는 것이다.
좀 있으면 혼잡해져 느끼지 못할, 이른 등교생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며 내가 이런 이른 시간에 등교를 하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여유롭다, 라는 감상을 그대로 옮겨 배경으로 칠해놓은 것 같은 풍경.
그리고 나는 그 여유로움에 마지막으로 그려진 이방인인 것이다.
게다가 어떤 이방인이든 낯선 장소에는 익숙해져야 한다는 것이 원칙으로, 익숙해지기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하는 일은 바로 신발을 환경에 맞게 갈아 신는 것이다.
끼이이이, 몇 번을 들어도 익숙해지지 않는, 오래된 회색 캐비닛의 소리.
어쩌면 우주인 웃음소리일지도 모르는 소리를 들으며, 조금 화려한 메이커 신발을 넣은 후 다시금 찰칵.
그리고 교실로 직행……한다면 평소와 똑같은 일상이 반복되겠지만, 아무래도 이 우주실험장은 실험용 모르모트에게 별로 관대하지 않은 듯하다.
나는 벌써 발견해버린 것이다, 실험에 쓰일 도구를.
이전에 같은 것을 본 것 같은 기시감을 느끼면서, 또 다시 찰칵.
역시나 그 새하얀 실험도구는 척 하니 여봐란 듯 놓여있었다. 이전과 같은 새하얀 협박지가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음습해오는 불안감.
“──장난이, 아닌 건가…….”
일찍이 장난이라도 치부해버렸던, 그 악질적인 장난은 장난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것은 명백한 경고, 그리고 이번의 그것은 2차 경고 혹은 아웃을 상징하는 레드카드가 되어 내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한참을 바라보다, ‘이대로 못 본 척해 버리면 되지 않나.’ 라는 생각이 들어──계단을 오르고, 교실의 문을 열고, 들어가 안착.
아무도 없는 텅 빈 교실은 마냥 적막하지 않……
하아, 일단 크게 한 숨을 내쉬고──
──끝나버렸다. 때 아니게 아름다운 아침의 교내풍경을 묘사해 ‘아무 일도 없어요.’라고 생각하게 할 이 모든 일들이 모두 허사가 되어버린 것이다.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내 하루의 시작을 저 편지 하나가 망쳐버렸다.
나는 이제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교실의 문을 열고, 계단을 내려가, 약물첨가 초콜릿이 들어있는 회색 상자 앞으로 가게 될 것이다.
나는 그것이 함정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걸려들어야 하는 멍청한 모르모트가 되어버린 것이다.
하아, 몇 번째인가의 한숨을 크게 쉬고 곧장 계단을 내려가 기이한 소리를 내는 내 지정 캐비닛을 열어 모든 일의 원흉인 새하얀 편지봉투를 꺼내들었다.
내 심정을 십분 발휘하는 것처럼 거칠게 봉인을 뜯고 내용물을 꺼냈다.
『분명 저번에 이성과 접촉하지 말라고 경고 드렸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접촉했다는 것은 이성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든 상관없다는 걸로 간주하고 처벌하겠습니다. 더욱 강력한 경고의 의미로 첫 번째 통보 후에 당신과 접촉한 여성에게 피해가 갈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이성과 접촉하지 마십시오. 』
저번과 같은 서투른 협박편지. 바뀐 점이라고 하면 오직 본론뿐인 편지에서 결론이 추가되어 있다는 것이다.
편지 쓰는 법이라도 배우고 있는 건가, 라는 영양가 없는 생각을 하면서, 뒤쪽으로 쿵. 그대로 몸을 벽대 기댄 채 신음을 내뱉었다.
너무 쉽게 본 것이다, 라는 때늦은 후회가 몸을 짓누르고 있다.
두 번째 경고.
그것은 말이나 통보가 아닌, 행동으로 직접적으로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그것도 꽤나 악취미적으로.
그렇기에 나는 두 번째 경고를 받은 뒤 곧바로 평소에 어울리던 여자애들의 신발장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우리 교내의 신발장은 비밀번호 형식으로, 내용물을 넣지 않으면 비밀번호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기 때문에 접근은 쉬웠다. 그것은 범인 역시 마찬가지였을 터.
예상은 적중했다.
평소 나와 어울리던 여자애들의 신발장에는 여러 피해가 속출하고 있었던 것이다.
꽤나 정교하게 만들어진 모형 거미부터 파티용품점에서나 팔고 있을 모형 팔까지. 장난이라 하기엔 조금 심각하고, 위협이라 하기엔 조금 귀여운, 그런 것들.
모아놓고 보니, 팔 한 무더기 정도는 되는 양이어서 왠지 이걸 다 준비하려면 고생 꽤나 했겠는걸, 하고 저도 모르게 말이 새어나왔다.
‘무엇 때문에 자신에게 ;이 정도의 수고를 하는 것인가’, ‘도대체 이런 일을 벌이는 것이 누구인가’라는 근본적인 것들을 제쳐두고서 어째서인지 이 정도의 사고만 계속된다면 의외로 “어울려 줄 만 하지 않나.” 라는 생각도 들었다.
솔직히 이처럼 빠른 급류急流를 타고 있음에도 이런 유쾌한 나뭇가지를 잡을 수 있는 기회는 얼마 되지 않을 것이다.
솔직히 고백해보자면……조금 뜨거워지기도 했고.
상대의 정체와 목적을 제외한다면 이건 썩 유쾌한 놀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도 회의에 빠져 열심히 헐떡이고 있는 나에게는 말이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현재의 나는 역시 이 약물이 첨가된 초콜릿의 맛을 음미하는 채 상황을 즐기고 있는 것이다.
어쩐지 아이러니한 생각이 들어 고개를 푹 꺽은 채 책상에 몸을 기대었다.
그렇게 두 번째 경고를 해프닝으로 일단락 시켰다, 라고 생각하니 왠지 안심이 되는 것 같아서 이른 학교일과(수면)을 취하려는 찰나,
드르륵. 문이 열리는 소리에 감았던 눈을 떴다.
벌써 애들이 등교하는 시간이 되어버린 것인가, 시계를 확인해보니 아직 발소리가 난잡한 러시아워까지는 시간이 많이 남은 때였다.
이른 이방인은 혼자가 아니었던 것이다.
누군가, 고개를 돌려본다.
그 과정에서 양 팔이 얼굴에 비벼져 조금 까칠한 느낌이 든다.
느낌과는 반대일 것으로 보이는, 내딛을 때마다 찰랑거리는 허리까지 내려온 흑발이 시야에 들어온다. 아무렇게나 방치해 둔 듯 무심하게 보이지만 의외로 가지런하게 흔들거리는 그것은 부드럽게 눌러 오르는 피아노의 검은 건반과 닮아 있었다. 연약한 듯 보이면서도 막상 손을 대보면 그 무게감이 느껴지는 그런 것.
순간 시선을 빼앗겨 얼굴이 팔에 비벼지는 것도 의식하지 않은 채 눈은 그녀를 주시하고 있었다.
손으로 매만져 매끄럽게 다듬어 반듯하게 만들어놓은 것 같은 얼굴형에 자신이 앉을 책상을 주시하고 있는─푸른빛이 감도는 검은 눈동자와 길게 내리 깐 속눈썹. 자연스럽게 선을 그리는 콧날과 옅은 색의 입술까지.
한데 모아놓으면, 조금 색이 튄다고 생각되는 자주색 교복을 입어도 별 눈길이 가지 않을 만큼 얼굴에 눈길이 갈 정도로 시선을 끄는 외모였다.
하지만 그에 반해 성격은 조금 거리감이 있는 느낌이어서, 별로 누군가와 친한 모습은 잘 보이지 않는, 전형적인 예쁜 새침데기의 느낌이 강하다.
나 역시 그녀와 조금 거리감을 느끼고 있어서 어쩌다 말을 섞을 때면 반 전체와 관련된 일뿐, 사적인 대화는 일절 한 적이 없다.
반장으로서 지나치게 성실한 탓일까, 나 같은 놈들에게도 자주 의견을 물어보러 오기에 솔직히 성실보다는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걸러내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 흠이다.
여기까지가 그녀, 반장에 대한 평가.
뜬금없지만 반장에 대해 설명을 하고서, 지금 그녀가 상체를 숙여 책상에서 의자를 빼내고 가방을 내려놓으려 하고 있다는 사실을 덧붙인다.
그리고 그 과정을 말하고 있는 사이에 내 시선이 그녀의 책상 서랍에 쏠려 있다는 것은 앞의 덧붙임과 더불어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독자를 위한 배려인 것이다.
잠시 맥을 끊고, 상황을 다듬으면서 말하길──,
──사건의 시작은 늘 그렇듯 여성 특유의 하이톤 비명에서 시작되었다.
그것의 파급효과는 생각보다 엄청나서, 평온해야할 아침의 분위기가 심각한 것으로 일변하는 것은 당연한 일에다, 냉철히 상황을 바로보아야 할 내 사고마저 분할해 날뛰기 시작한 것이다.
뭐야, 무슨 일이야 라는 고함이 머리 곳곳에서 울려 퍼졌고, 점점 빨라지는 심장박동은 신경질적인 외침과 어지럼증을 유발시켰다.
좁아지는 시야, 말 그대로 눈앞이 캄캄해진 상황.
보이지 않음에도 신체를 지탱하던 두 다리는 균형을 잃어가면서도 재빨리 현장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쿠당탕, 서투른 몸짓에 쓰러지는 의자들을 무시한 채 직선으로 달리는 그 최단거리가, 채 몇 미터도 되지 않는 그 거리가 왠지 멀다고 느끼면서, 사건현장에 개입한다.
붉은 빛이 서린 구형의 물체──정교하게 만들어진, 인간의 안구.
당장에라도 흘러넘칠 빛을 하며 위를 주시하는 그것.
누구라도 비명을 질러버린 것 같은 정교함이 일상의 책상서랍에서 떨어졌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사람은 없다. 그것도 여자애가, 그것을 버틸 수 있을 리 없는 것이다.
스륵, 상황과는 다르게 가벼운 소리를 내며 그녀는 쓰러졌다.
그리고 나를 직격한 것은 다름 아닌 ‘충격’
좀 전의 피가 쏠려 좁아진 시야로 담담히 들어온 안구의 모형과 대담하고 있는 내 자신에게서 참을 수 없을 정도로 화가 치밀어 올랐다.
어울려 줄 만 하다니, 그런 생각을 잠시나마 했었던 내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몸을 고정시키고 있던 실오라기들이 갑자기 몸을 구속하는 사슬이 되어 새삼 자유를 박탈당했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상을 비출 망막도, 유연한 수정체도 없는 빛조차 투과시키지 못하는 모형 따위가 한껏 일그러진 내 표정을 보면서 웃는 것 같았다.
주먹보다 작은 그 플라스틱 덩어리가 나를 비웃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안구로 나를 보고 있을 범인의 비웃음이 들려오는 것 같아 화가 치밀어온다.
더 이상 이것은 장난이 아니다.
아니, 장난이라고 할 수 없을 만한 정도까지 와버린 것이다.
통보도, 경고도 아닌 명백한 위협.
내 명령에 따르라는 어처구니없는 요구에 대해 내 마음속에 그 놈에 대한 적개심이 피어오르는 순간이었다.
콰작, 밟아 산산히 부서뜨리는 소리.
이제 평정을 가장한, 가지러한 퍼즐은 이제 무참하게 흩어져 버렸다.
미처 신경 쓰지 못한, 이제는 기절해 버린 급우와 쓰러진 의자와 밀려난 책상.
어지럽혀져 있는 사건현장과 화로 정지해버린 두뇌.
밝혀내 주겠다, 라는 말만을 곱씹으며 나는 피가 날 정도로 주먹을 꽉 쥐어보였다.
9/ 그 남자의 시선♂
열 내서 나오는 것은 없다.
순식간에 황제의 호화찬란한 궁전에서 낯선 섬으로 유배된 나폴레옹도 숨을 죽이고 재위의 순간을 노리지 않았던가.
그리고 다시 권력을 잡았다.
다시 말해, 상황을 분석하고 범인을 잡기 위해선 머리를 식힐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진정의 효과가 있다는 몇 번째인가의 한 숨을 크게 내쉬고서 상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일단 사건의 필수요소라 불리는 세 가지──동기, 단서, 현장.
차례대로 해나간다면,
일단 동기. 어째서 범인은 어째서 이런 사건을 저지른 것인가, 라는 것인데 사실 현재 아는 바 없다. 알고 있는 것은 그저 놈이 내가 이성과 접촉하는 것을 막고 싶어 한다는 것밖에 아는 것이 없다.
다음은 증거로, 다행히 증거는 이 손 안에 있다. 반듯한 글씨로 쓰인 협박편지가 둘. 여기서 추론해낸 것이라면 범인은 여자라는 것.
솔직히 그마저도 확증은 없다.
마지막으로 현장. 현재 범인의 손길이 닿은 곳을 나열해보자면, 내 캐비닛, 나와 어울리는 여자애들의 캐비닛, 그리고 내 뒤통수를 시원하게 후려갈긴 책상서랍까지.
한 마디로 말하자면, 나는 현재 놈에게 완전히 노출되어 있는 것이다.
나는 놈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지만, 놈은 나를 훤히 꿰고 있다.
거기다 캐비닛을 미끼로 서랍에 더 흉악한 것까지 조작해놓는 치밀함까지…….
정리하자면, 범인은 상당히 머리가 좋고 우리 반 녀석들의 캐비닛과 책상위치를 알 정도로 우리 반을 훤히 꿰고 있으며 글씨를 상당히 잘 쓴다는 것 정도.
상당히 영악하지 않을 수 없다. 글씨를 잘 쓴다니…….
사실 짐작 가는 인물 따위 있을 리 없다.
남녀를 막론하고 상당수가 멍청한 이 반에 그런 영악한 놈이 있을 리 없는 것이다. 아니, 잔머리라면 꽤 굴러가는 녀석들이니 가능성이 없지는 않다.
어렵군, 이라는 생각을 하며 몸을 기대어 흔들의자처럼 끼이, 의자를 흔들었다.
10/ 그 남자의 시선♂
차가운 밤공기가 얼굴을 스쳐 지나간다.
뺨을 쓸어내리는 손길과도 같은 부드러움을 느끼는 한편 주위에 아무도 없다는 데서 약간 쓸쓸함을 느끼고 있다.
추운 밤공기를 맞는 채로 쪼그려 앉아 차가운 콘크리트 벽에 몸을 기대고 있기에 더욱 그럴 것이다.
괴성조차 들리지 않는 침묵.
모든 것이 잠에 빠져드는 시간.
참을 수 없을 만큼의 적막감과 피로가 몸을 덮쳐옴에도 나는 뺨을 짝짝 소리가 나게 치며 눈을 부릅떴다.
전방엔 달빛을 받아 반사해 푸른빛을 옅게 띠는 회백색의 캐비닛 무리가 보이고, 그 뒤로는 캄캄한 정적의 밤이 고대하고 있다.
어쩌다 바람이라도 불면, 눈을 감았던 어둠은 소리를 더듬어 바람을 잡아내 조용한 교내 속으로 던져버리는 것이다. 쉽게 말하자면, 작은 소리에도 큰 소리가 날 만큼 조용하다는 소리.
이렇듯 11시를 막 넘긴 교내는 정적을 두르고 있는 것이다.
뛰놀던 모두가 사라져 버린 복도. 가끔씩 들려오는 거센 바람소리만이 어둠 너머의 건재를 알릴뿐이다.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는 복도는 네모난 창문의 그늘을 장식으로 한 채 푸른 달빛만이 어슴푸레 형체를 비추고 있다.
이런 야심한 시간, 나는 혼자 남아 이 교정校庭을 지키고 있는 이유를 말해보자면, 물론 목적은 오직 하나. 범인을 잡기 위해서 라고 말할 수 있다.
이제는 너무 흔한 말이 되어 더 이상 법칙이 아니게 된 ‘범인은 사건현장으로 되돌아온다.’라는 암묵적인 룰에 따라 잠복을 시행하고 있는 것이다.
아니, 되돌아 올 수밖에 없게 만들었기 때문에 나는 이런 일을 과감히 실행하고 있다는 것이 더 맞을 것이다.
범인은 분명 다음 경고를 위해 다시 협박편지를 넣으러 올 것이다.
낮의 그 사건 이후에 나는 생각해낸 것이다.
굳이 내가 놈을 찾아낼 필요가 없다는 것을.
놈이 나에게 접근하게 만들면 된다는 것을.
방법은 실로 간단해서, 그저 알고 지내는 여자애의 협력을 구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현재 유일하게 알고 있는 놈의 목적──여자애와의 접촉을 시도한다는 것이 바로 내가 생각해낸 방법인 것이다.
나를 위해 희생해줄 세리눈티우스를 찾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어서, 성격 좋고 호기심 많은 학년의 인기인에게 부탁하면 쉽게 해결 될 일이었다.
물론 OK사인이 난 것은 두말 할 필요도 없고, 꽤나 흥미를 느꼈는지 양 갈래로 묶은 금발이 세차게 흔들릴 만큼 고개를 끄덕여 수락해주었다.
역시나 이런 일은 누구에게든, 흔치 않은 단순한 재미거리로 느껴지는 것이었다.
물론 장난이 아니라는 것쯤은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기에 협력을 표한 친구에게 약간 미안함을 느끼면서도─물론 그 피해를 입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음에도 흔쾌히 수락했지만─나는 연극에 충실하기로 했다.
누가 본다면 연인으로 오해할 만큼의 친밀한 모습을 보인다는 컨셉으로, 협박법이 본다면 상당히 분해 할 정도로 연기에 충실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좀 과했나 싶을 정도로 연기에 충실하지 않았나 싶지만 어쨌든 협박범은 내가 또다시 여자와 접촉했다는 사실에 세 번째 편지를 보내올 것이고 넣는 그 순간을 포착해 놈을 잡는다는 것이 나의 계획인 것이다.
그리고 편지를 넣을 시간은 바로 지금.
그런 이른 아침에 나보다 먼저 등교한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이며 아침에 도착했을 때 편지가 있었던 것을 통해 추론해내자면, 인기척 하나 없는 이런 야심한 시간대가 적충인 것이다.
사람이 모두 빠져 나간, 가끔 들려오는 바람소리와 어슴푸레한 달빛만이 살아있는 시간.
틀림없이 놈은 이 시간대에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그렇게 확신하기에 모두가 학교를 빠져나갔음에도 홀로 남아 쓸쓸함을 느끼며 이런 차가운 콘크리트 벽에 몸을 쭈그리고 앉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분명 내가 할 일은, 메로스가 되어 해야 할 일을 완수해야 하는 것.
꼭 잡아내 보이겠다는 각오를 다짐과 동시에,
──저 멀리서, 사람크기의 실루엣이 흔들리는 것처럼 보였다.
범인이 나타난 것인가!
어쩌면 학교를 실험장으로 두고 있는 외계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주의를 하며 유심히 실루엣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빛이 옅어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체구와 라인으로 봐서는 여성……그리고 물결치는 무언가가 보이는 것으로 볼 때 상당히 머리카락이 긴 것처럼 보였다.
일단 여성이라는 예상은 적중.
하지만 이 거리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는 그것뿐이었다.
좀 더 거리를 좁혀 자세히 보려는 찰나,
끼이이이, 야심한 밤 누군가 듣는다면 오해할만한 소리.
어쩐지 순간 히익, 하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하기야 이 학교에 입학하고서부터 써오던 캐비닛의 괴상한 소리에 아직까지 친숙해지지 못한 나였기에, 몇 번을 이용하고서 아직 놀란 소리를 내는 범인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어쩐지 화도 조금 풀린 듯한 느낌이어서, 아마도 이런 차가운 공기를 맞으며 쓸쓸한 공간에 혼자 남겨져 머리가 식혀짐과 동시에 누군가─제 아무리 분노를 표출하던 협박범─를 만나 반가운 마음을 감출 수 없었던 것이다.
거기다 여성이라는 점에서 마냥 화를 내기도 뭣한 것도 한 몫 했고.
하여튼 현재는 범인에 대한 마음이 조금 차분해진 상황이라는 것이다.
충분히 식혀진 머리를 가지고 범인의 동향을 관찰한다.
범인은 상당히 긴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는 여성. 그리고 손에는 꽤 익숙한 편지봉투가 들려있었다.
세 번째인가의 협박편지.
범인이 다시 이 장소에 모습을 드러낸 목적임과 동시에 나에게 ;이 기회를 준 행운의 편지. 지금이라면 얼마든지 속아주어 몇 통의 편지라도 돌릴 자신이 있다.
물론 놈을 잡고서!
……마음이 앞선 탓일까, 아님 너무 오래 쪼그려 앉아 있던 탓일까.
발은 꼬여 몸을 지탱하지 못했고, 그 결과 콰당 하는 큰 소리와 함께 넘어져 버렸다.
물론 그 소리를 협박범이 들은 것은 당연했고, 잘 보이지 않음에도 눈이 마주친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그만큼 인상은 강렬했다는 소리이다.
차갑고 딱딱한 콘크리트 바닥에 부딪혔다는 아픔과 쪽팔림을 넘어서 놈을 잡아야 한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거, 거기, 서어어─────!!”
아픔과 쪽팔림을 잊으려 일부러 큰 소리를 냈었는데 그것이 도리어 화가 된 것인지 범인은 눈에 보일만큼 흠칫 몸을 떨며 도망치기 시작했다.
소리만 질렀지, 발은 저려있는 상태 그대로라서 쫓아가기는커녕 몸을 가누기도 힘들었기에 나는 멀어져 가는 범인의 뒷모습을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실패해 버린 것이다.
저 지는 석양을 보며 눈물을 흘려보아도 해가 멈춰줄 리 없는 것이었다.
젠장, 놓쳤다는 분함과 잊고 있던 아픔이 한꺼번에 몰려와 몸을 휘감았다.
“아──, 아프다.”
늦은 밤까지 기다려 얻은 것은 결국 범인이 여성이라는 예상을 사실로 만든 것과 콘크리트 바닥과의 접촉에서 생긴 시퍼런 멍, 그리고 아직 저려오는 다리의 바이브레이션뿐.
결과만 놓고 보자면 상당히 처참한 결과가 아닐 수 없었다.
11/ 그 여자의 시선♀
들켜버렸습니다.
설마 잠복하고 있을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습니다.
저는 이제 어떡하면 좋을까요?
어두웠긴 했지만 혹시 제 얼굴을 봐 버린 게 아닌가 싶어 너무 불안합니다.
만약 들켰다면……
학교에 가서 추궁당할 테지요.
어쩌면 해코지 당할 지도 모릅니다,
아니 그만한 일을 저질렀기에 그런 벌을 받는 것은 당연하지만.
제가 제일 걱정인 것은 그가 저를 싫어하게 될 것이란 사실입니다.
어떤 벌을 받던 그것은 분명 제 책임이고 제 잘못이지만, 만약 그가 절 싫어한다면…….
그러면, 전 더 이상 살 수가 없습니다.
이런 짓까지 벌어왔는데 그가 절 좋아해 줄 리는 없겠죠.
제발, 제발 제 얼굴이 들키지 않았으면 합니다.
지금 너무 불안해서 가슴이 조마조마 합니다.
내일 그의 얼굴을 어떻게 봐야할지, 뭐라고 해야 할지 너무 걱정됩니다.
제 얼굴을 봤는지 안 봤는지
내일 그를 한 번 떠봐야겠습니다,
댓글 13
-
달룡
2011.12.30 22:19
-
청록야광봉
2011.12.30 22:34
윙 저게 4주년 이벤트라 설정 잡아논 걸로 써야하는데 워낙 그지같이 잡아놔서 할 수 없이 스토리로 가자 해서 이리 만듬 애초에 내가 쓰는 건 라노베가 아니니까 뭐 라노베 삘 나는 거 하나 있는데 5개작 3부 형식이라 도합 90~100권 정도 분량 ㅇㅇ 그리고 그건 금지어 때매 -
하이웨이
2011.12.30 23:15
근데 공모전은 더 긴글 받지 않나요? -
청록야광봉
2011.12.30 23:17
이거 총 분량 반임 나머지는 자면서 쓴거라 지움 ㅇㅇ 원고지 200장이었나 제시했던 게? -
청록야광봉
2011.12.30 23:58
이게 200~300이었던 거 같은데 에이포로 하면 대충 스물 몇 장 정도 나올 듯 -
하이웨이
2011.12.30 23:47
원고지 200이면 에이포로 몇장이져? -
무언가
2011.12.30 23:46
확실히 시드노벨에서 원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어보임.
시드노벨에서 원하는 건 좀 더 씹덕하고 좀 더 캐릭터성 강한 거
캐릭터들을 정해줬어도 그 캐릭터들을 가지고 얼마나 모에한 설정과 모에한 상황, 모에한 전개를 끌어낼 수 있는가.
그런 거였던 듯.
조루니 동정이니 대놓고 툭툭 내뱉는 세계 제일의 여동생님을 보면...
그런 고로 시드노벨에서 원하는 작품은 아니었고, 노블엔진도 잘 모르겠고, 루트노벨이라면 어쩌면 가능할 지도.
어차피 지금 노벨 3사에서 공동투고작품이라는 게 걸리면 탈락시킨다고 하고 있어서 다른 곳에 넣는것도 힘들겠지만.
작품 자체의 감상을 하자면...무섭네요. 여자의 정체를 일부러 드러내지 않는 게 음산한 분위기를 더 자아내는 듯요.
차후전개에서는 여자애들 몇 명을 등장시켜놓고 "맞춰봐라 멍청한 독자들아! 크하하하하하하하!"일 듯한 느낌.
작품 자체는 괜찮은 것 같아요. 다만 시드노벨이 원하던 씹덕한 하드코어모에(??) 작품이 아니었을 뿐. -
청록야광봉
2011.12.31 00:55
슈밤 쪽찝게네;; -
Foodnana
2011.12.31 23:14
난 이런거 좋아해 -
AugustGrad
2012.01.02 18:41
재밌는거같다 더올려줘요 -
청록야광봉
2012.01.02 23:39
싫어 다른 거 쓸 거야 ㅗㅗ -
달룡
2012.01.02 20:36
그걸 다시 쓰세요. -
청록야광봉
2012.01.02 20:33
없쪙 하도 그지같이 써놔서 지웠쪙
번호 | 제목 | 글쓴이 | 날짜 | 조회 수 |
---|---|---|---|---|
공지 | 창작게시판 사용안내 [12] | 하레 | 2011.04.26 | 14472 |
275 | (BGM) 중2병 리즈시절에 쓴 소설 - "허위의 판타즈마" 제1화 (2) [1] | Novelic' | 2012.01.25 | 274 |
274 | (BGM) 중2병 리즈시절에 쓴 소설 - "허위의 판타즈마" 제1화 [8] | Novelic' | 2012.01.24 | 356 |
273 | [아마가미ss Plus] OP Check My Soul 한글화 [1] | 가미카제 | 2012.01.20 | 307 |
272 | [동전]을 주제로 쓴 글 [11] | 무언가 | 2012.01.16 | 285 |
271 | 수련회소설 | 무언가 | 2012.01.15 | 249 |
270 | 미코노쨩 하아하아 보드랍구나 하아하아 [1] | 리카아메 | 2012.01.15 | 212 |
269 | 가식가면-1 | MurMurouser | 2012.01.14 | 180 |
268 | 일만 이천년 전부터 너를 사랑해왔어~ [3] | 리카아메 | 2012.01.11 | 282 |
267 | 간만에 그림투척 [8] | 에일리언 | 2012.01.11 | 346 |
266 | 노블엔진 1챕터의 승부에 응모해보고 싶은거 [3] | 하이웨이 | 2012.01.04 | 315 |
265 | 「이 손은 파괴를 위한 손일 뿐, 무언가를 창조해내지는 못해.」 [2] | 무언가 | 2012.01.03 | 226 |
264 | 가식가면 | MurMurouser | 2012.01.03 | 170 |
263 | 리뷰용으로 만든 아이돌마스터 파워포인트 양식 [1] | 오보에 | 2012.01.02 | 284 |
262 | 새해 기념 소설 [2] | 무언가 | 2012.01.01 | 383 |
261 | 자작단편소설 - 목소리 | 모순나선 | 2011.12.31 | 192 |
» | 예날에 시드노벨 공모전 냈다가 떨어진 거 [13] | 청록야광봉 | 2011.12.30 | 376 |
259 | 낙서들 [7] | 명작킬러 | 2011.12.29 | 209 |
258 | 낙서 [4] | 에일리언 | 2011.12.26 | 249 |
257 | 산다이바나시 [눈, 거짓말, 야구방망이] [1] | 무언가 | 2011.12.26 | 222 |
256 | 산다이바나시 [편의점, 오뎅, 소주] [2] | 무언가 | 2011.12.25 | 184 |
그리고 게 ;이 는 대체 뭐임 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