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글엮기 [종말, 운명의 붉은 실]
2012.01.29 01:41
제목: 세계 종말의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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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겨울 정도로 보이던 것이 보이지 않는다는 게 무슨 뜻인 줄 알아요?'
그 때, 이름도 모를 그는 나에게 말했다.
'세계가 종말을 맞이한다는 뜻이에요.'
그리고 지금, 그의 말대로 세계는 종말을 맞이했다.
나와 어딘가의 누구 빼고는.
나는 심술을 부리듯 내 발 앞에 놓인 돌을 찼다. 툭. 그 돌은 바람소리에 섞여 저 멀리 날아가버렸다. 그 앞을 가로막는 건 부서진 콘크리트 조각밖에 없었다.
원래는 커다란 집이었을 그 콘크리트 조각 폐허를 밟고 회색 언덕을 넘어갔다. 그리고 아래쪽에 익숙한 건물이 보였다. 편의점이었다.
용캐도 편의점만 무너지지 않고 있었다. 심지어 보통 이런 상황에는 약탈당하고 없어야 할 음식들마저 그대로 있었다.
나는 깨진 유리창 사이로 들어갔다. 스팸과 옥수수 통조림, 천하장사 소시지가 꽤 많이 있었다.
어차피 식욕도 없는 상태이기 때문에 나는 천하장사 소시지 하나를 들고 다시 그 편의점을 나왔다. 그리고 방금 전에 넘어온 언덕을 다시 올라가 그 위에 털썩 앉았다. 잔존해있는 회색 부스러기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주변이 확실히 보였다. 나는 소시지를 뜯으며 그 때를 회상했다. 그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할 게 없으니까 말이다.
나는 그 남자의 알 수 없는 질문에―――아니, 알 수 없다기보다는 갑작스런 질문에 멍하니 입을 닫고 그를 보고 있었다.
"당신은 운명의 존재를 믿습니까?"
남자는 재차 질문했다. 나는 '도를 믿습니까?'에 이은 신종 종교라고 생각하고 대충 말했다.
"아니오."
"아, 그러시군요."
그 남자는 벤치에 앉아서 말했다. 나는 일부러 그 남자와 거리를 살짝 벌렸다.
"흔히들 운명의 붉은 실이라고 하잖아요? 월하노인이 발목에 묶어주는 붉은 실. 절대 끊어지지 않는 인연. 그게 제 눈에는 보인답니다."
"…네?"
맥락없는 대화 전개에 나는 내가 중간과정을 못 들었나 하는 착각까지 들었다.
"어떤 사람이 누구와 이어질 지 눈에 보인다구요."
오만가지 생각이 들었다. 그 중 가장 커다랗게 울리는 생각 세 개를 나열하면
'속지 마라, 이건 분명히 널 다단계사업 비슷한 종교에 끌고 들어가려는 계략이다.'
'도대체 누구지? 나 아나? 그런데 갑자기 왠 이런 이야기?'
'그래서 어쩌라고.'
이들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런 걸 모두 무시하고 가장 원초적인 질문부터 했다.
"증명해 보세요."
"증명이요?"
"예를 들어서…저기에 저 사람이 누구와 이어질 지도 눈에 보인다는 말씀이신가요?"
나는 손가락으로 분수대 뒤쪽의 여자를 가리켰다. 그러자 그 남자는 하하하하 하고 웃으며 말했다.
"사실은 그게 가장 커다란 문제입니다. 그렇게 보이던 게 갑자기 안 보이게 되었거든요."
…미친 사람인가.
"그렇다면 오히려 잘된 거 아닌가요?"
"어라? 그게 왜요?"
아차. 이 능력이 싫다고는 안 했지. 지레짐작해버렸다. 만화를 너무 많이 봤나보다. 예상되는 반박이 와도 어쩔 수 없이 그대로 이야기를 끌고가야 할 것 같다.
"능력이 없어졌으니까요. 그 능력 귀찮지 않으셨나요?"
"아하…예. 귀찮기는 했지요."
어라? 먹혀들었다.
"하지만 능력이 사라진 건 아니에요. 그냥 그 붉은 실이 사라졌을 뿐이죠."
"당신 능력이 사라진 건지 붉은 실이 사라진 건지 어떻게 아시나요?"
"왜냐하면 아직 붉은 실 한가닥은 보이거든요."
그는 나를 쳐다보며 그렇게 말했다.
"그 사람이 혹시……."
"예. 당신이에요."
"…이거 기뻐해야 하는 건가요?"
아직도 그가 하는 말을 헛소리라고 부정하고 있던 나는 말했다.
"아니오. 슬퍼해야 하는 겁니다."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
"지겨울 정도로 보이던 것이 보이지 않는다는 게 무슨 뜻인 줄 알아요? 이 세상 사람들의 운명의 실이 사라진 거라구요. 운명이 사라졌다는 걸로 해석되지 않아요?"
운명이 없어졌다 라는 말을 듣고 사람이 할 수 있는 생각은 하나밖에 없지 않을까.
"세계…멸망?"
"예. 세계가 종말을 맞이한다는 뜻이에요. 그리고 그 와중에 당신의 실만은 살아있죠. 그 말은…"
"나는 살아있다?"
마치 거대한 서사시의 주인공이 되었다는 듯한 그의 말에 나는 점점 빨려들어가는 느낌이 들어 애써 부정하면서 말했다.
"예. 그러니까 슬퍼해야죠. 혼자서 남아있어야 할 테니까 말이죠. 아무것도 할 것 없이. 그 누구도 없이."
나는 그의 말에서 꼬투리를 잡듯 말했다. 아마 그의 언변에 조종당하기 싫다는 방어기재가 발동한 것 같다.
"혼자서요? 붉은 실이 있다는 건 누군가와 이어져 있다는 거 아닌가요? 그 누군가도 살아있으면 혼자는 아니지 않나요?"
"아, 엄밀히 말하면 그렇습니다만."
그는 시선을 옮겨 하늘을 쳐다보았다. 마치 그의 시선이 하나의 선을 긋는 것 같았다.
"만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그는 벤치에서 일어났다.
"즐거웠습니다. 아마 다음번에는 만나지 못할 것 같아요. 그러면 안녕히계세요."
그는 공손히 인사하고는 내 시야에서 사라져갔다. 나는 그가 시야에서 사라지자마자 그가 했던 말을 기억의 저편으로 날려버렸다.
하지만 그게 부메랑과 같이 기억으로 돌아오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바로 다음날, 일어났을 때, 세계는 멸망해있었다.
예고도 전조도 소리도 없이, 세계는 멸망했다. 사람들은 사라졌고, 건물들은 부서졌다. 조용히 자다가 아침햇살에 일어난 나는 어쩔 수 없이 이 초전개에 정신이 붕괴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1달이 지났다. 이제 모든 것이 적응되었다. 나는 예전부터 적응이 빨랐으니까. 하지만 심심하다. 지루하다. 외롭다.
그 이후로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냥 밥을 먹고, 돌아다니고, 혼자서 공기놀이를 하고, 다시 밥을 먹고, 잘 뿐이었다.
나와 운명으로 이어진 그 사람은 역시 오지 않는 걸까.
그의 소원대로 세계를 멸망시켜줬는데 그는 기분좋아하지 않는다.
분명히 내가 창조한 세계였는데도 나는 그 창조물 중 하나에 사랑에 빠져버린 거다. 나는 어느날 그가 말하는 걸 들었다.
'이런 세상, 멸망해버리면 좋을텐데.'
그 말을 듣고 나는 그를 행복하게 만들어주기 위해 세계를 멸망시켰다. 그런데 그는 오히려 이걸 더 싫어하는 느낌이다.
내가 직접 내려가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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