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식가면-2
2012.02.03 15:27
"정 가울아씨 댁 맞으십니까? "
"네 맞습니다."
수령인 자신을 두고 하는 말이 낯설었던 지라 가울아는 본인이라고 말은 못하고 제 3자의 집을 소개하듯이 대답해버렸다.
" 서명 부탁합니다."
그래도 택배기사는 개의치 않고 바로 서명을 받아 현관을 나서며 인사했다. 아마 본인이 아니냐는 둥의 토를 달지 않은 것은 고객의 말실수를 이해한다는 의미이라.
아무튼 문짝에서 택배 온 상자를 살펴본다.
마치 하나의 큰 상자로 보이는 붙어있는 두 개의 상자. 사실 이 것을 처음 보낼 때는 그래도 한눈에 상자 두 개가 보였었는데 이토록 칭칭 감겨 있는 것을 보니 우체국 관계자가 안전의 문제로 덧대어 한 서른 바퀴는 더 감아 버렸나 보다. 두 박스의 사이는 물론이거니와 전체의 모서리를 아울러 빈 공간이라곤 찾아 볼 수 가 없다.
아마 노란 박스 테이프로 감았더라면 엄청난 스폰X 밥이 됐겠지···. 하고 상상하며 이리저리 박스테잎의 끝 부분을 찾아봤으나 역부족었기에 테이프를 끊어내야 할 것 같다 싶어 안방창고에서 맥가이버 칼을 공수해왔다.
세상에 포장을 뜯는 것 보다 즐거운 일이 있을까? 사실 제대로 포장된 선물 같은 것은 받아본 기억이 거의 없지만 적어도 네모난 상자 안에 있는 것 만으로도 안에 들어있는 내용물이 궁금해 분을 못 참고 이리저리 뜯고 만다. 그런 포장이 뜯기 힘들면 힘들수록 더욱더 집념이 생기고 마는데 이 순간의 행동력은 극에 달한다. 끝으로 모든 포장을 풀어 헤치고 바닥에 나뒹구는 박스의 파편을 볼 때는 후회막심해지지만 포장을 뜯는 순간만큼 재미있는 시간이 없다. 아기가 눈에 보이는 것은 전부 입에 가져다 물어보는 것 같은 본능이 항상 일방적으로 흘러가는 나의 하루에 한번 이라도 일깨워지면 내면으로부터 차오르는 느낌에 감복할 수있을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각설하고 포장뜯기는 참으로 신선한 느낌을 준다.
꿈에서도 경험하지 못할 그런 그런 느낌. 그렇다. 꿈같은 감각이다.
가울아는 천천히 주변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생활용품, 책, 필기도구, 미용 용품 등등.. 모두 내 고교생활을 위해 자취를 시작할때 부터 써왔던 것들이 가득하다. 그중엔 산지 얼마 안됀 품목들도 많지만 이것을 집에서 보게되니 신선한 느낌이든다. 만약 자신이 집근처의 고등학교에 진학하게 됬을 때는 사지도, 보지도 않았을 것들이지만 스스로의 꿈을 위해 집을 떠나 만나게된 것들이라 온갖 정이 다 붙어있다.
그중에는 향수를 불러오게 할만한 것들도 많은데 바로 자취방에 처음 가게될때 집에서 가져간 것들이다. 소모품은 얼마안지나 버렸지만 애착이 가는 물품이라던가 추억이 있는 것들은 쉽게 버리지 못하고 상자속에 챙겨 놨었다. 심심함을 달래기 위한 책들이라던가 일기, 그리고 중학교 앨범등등 갖가지 추억이 쌓여있는 것들이다.
가울아는 자신도 모르쇠 슬쩍 쓴웃음을 지었다.
과거라는것이 항상 기분좋은 것은 아니다. 기쁜 추억이 있는 만큼 나쁜 추억도 있다. 특히 기억에 오래남는 나쁜 일을 경험하게 될때 그날 기분을 그날 해소하지못하고 미루게되면 결국 기억의 언저리에 눌러앉게 되는 것이다. 이런 추억들은 특히 인간관계에 관련된 일들이 많다. 그리고 앨범을 그런 기억들을 불러 일으키는 훌륭한 매개체가된다.
가울아는 정리하다말고 기분도 낼겸 앨범을 가져다 슥슥 닦아내고 소파에 가져와 펼쳤다.
베란다의 큰창에서 비춰지는 햇빛을 전등삼아 천천히 넘겨봤다. 그시절 인간관계의 폭이 좁았지만 그래도 페이지마다 한두명정도는 낯이익은 애가 눈에 띄인다. 물론 남자 한정이고 여자애들도 몇명 알겠는가 하면 전혀 본적도 없던 애들도 보인다. 물론 그녀들도 이쪽을 못봤을 태지만.
가울아는 멍하니 들어보다가 가끔 어느정도 추억이 있는 애들의 사진을 볼때면 잠시 머물렀다가 다시 페이지를 넘겼다. 슥슥 페이지가 넘겨가는 것을 느끼며 자신의 인간관계의 폭이 이리 좁았나 속으로 한탄이 절로나올정도로 한심했다. 짜증이 들기시작할 무렵 한창 속보를 전하는 뉴스소리가 거슬려 리모컨을 찾아 음소거를 누르고 다시 앨범을 집어들었다.
그런데 갑자기 음소거를 해놓은 벽걸이 tv가 꺼졌다. 가울아는 리모컨을 잘못 건들인 걸까 하고 다시 앨범을 내려놓고 리모컨을 찾아 두리번댔다. 아마 기대어 보던 소파 베게에 깔려 있던 것이겠지 하며 뒤돌아 베게를 들어든 순간
옆 베란다 창가에서 검은 그림자가 스쳐지나갔다. 아주 커다란 그림자가.
돌아본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뭔가 잘못본 것일까 하고 창가쪽으로 다가갔다. 너무나 옆눈초리로 인지할 너무나 생생한 광경이였기에 어안이 벙벙하다.
차디찬 마룻바닥을 걸어 4보. 유리창에 손바닥을 대어 고개를 집어 넣으려는 그 순간.
가울아는 똑똑히 보았다. 창가에 다가간 순간 낙하하고있던 그녀의 표정을.
아무것도 생각하지않는 무표정. 그리고 그 얼굴을 감싸던 검고 긴머리칼.. 너무 순식간이라서 놀라거나할 시간이 없었다. 오히려 이상한 기분이 들어 소름이 끼쳤다.
놀라기는 커녕 머릿속에서 갑자기 기분나쁜 예감이 들기 시작했다.
그녀를 앨범에서 본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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