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들판의 소나무 - 세 번째 그루
2012.02.29 02:14
#7. 인연
그녀와의 만남은 정말 인상 깊은 일이었지만,
반복되는 일상 속에 그 깊은 인상은 점차 희미해져갔다.
“그러므로 우리나라의 경제 형태는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는 케이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지긋지긋한 수업.
상아탑이라 불리는 대학의 수업 역시 지금까지 수 없이 들었던 주입식 교육과 큰 차이는 없었다.
이제 대학생이 되었다는 흥분도 가라앉고, 같이 입학한 동기들도 조금씩 새내기 티를 벗어가고 있었다.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입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아. 드디어 수업이 끝났다. 안그래도 졸렸다구.
요새들어 자꾸 수업을 빠지고 그냥 집에서 드러누워 잘까 고민하는 시간이 늘어나 참 고민이다.
가방을 들고 복도로 나서 오랜만에 학생회관을 들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때.
저 멀리서 지난 밤, 나와 이야기를 나누었던 그녀의 뒷 모습이 보였다.
아.. 쫓아가 말을 걸어볼까 하는 순간 하나의 생각이 나를 가로막았다.
‘그녀는 날 기억이나 할까.’
그렇게 내가 머뭇거리는 사이 그녀의 뒷모습은 더 이상 내 앞에 보이지 않았다.
뭐. 스쳐가는 인연이었으니까.
그렇게 나는 한참동안 서서 사라져버린 그녀의 그림자를 바라보았다.
#8. 그녀. 그녀. 그녀.
나른한 금요일 오후, 항상 주말만 되면 온갖 술자리들이 이어져 난 금요일이 되는 것을 정말 싫어했다.
하지만, 이번 주는 다르다.
고등학교 친구들과 만나는 날.
1년 동안 내가 독서실에 틀어박혀 책과 싸우고 있을 때, 친구들은 얼마나 변했을까?
“오! 현석이 왔네. 얼른 들어와!”
조심스럽게 술집 문을 열고 들어가자 우리 반의 분위기 메이커였던 진호가 나를 반갑게 맞이한다.
“재수하느라 고생했지? 오늘은 한번 죽어보자!”
“왜이래, 징그럽게.”
역시 진호는 해가 변해도 변함이 없다.
그렇게 녀석의 손에 이끌려 자리로 가던 중, 다시는 보고싶지 않던 눈이 있었다.
서진희. 그녀.
날 매정하게 버렸던.
“안녕.. 오랜만이네?”
“응. 안녕.”
시간이 흐른 사이 그녀는 더 예뻐져있었다.
길을 지나가는 사람들이 호감을 가질만한 그런 여자.
그 짧은 시간 사이에, 내 눈에는 그녀의 약지에 있는 작은 반지가 보였다.
하긴. 너 같은 애가 혼자 다니면 그게 더 이상하지.
다시 현석이에게 끌려 남자애들이 모인 테이블에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몇 시간동안 술잔을 돌렸지만, 내 머리 속엔 반지만 계속 떠올랐다.
어떤 사람일까.
언제부터 만났을까.
꽤 오랜 시간이 흘렀을까.
몇몇 녀석들은 이미 테이블, 바닥 여기저기 쓰러져있고 생존한 사람들은 구석에 있는 테이블에 모여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래서 진희 걔, 입학하자마자 남자친구 만들었잖아.”
“하긴. 좀 예쁘긴하지. 난 걔가 왜 진호랑 사귀나했다니까?”
진희 얘기로구나. 내 얘기도 들리네.
뭐 이녀석아? 내가 그렇게 못났더냐!
하지만 생각과는 달리 내 몸은 버텨주지 못했다.
#9. 밤길을 비춰주는 두 눈동자
토요일.
전 날의 무리한 술자리에 하루 종일 침대에서 뒹굴다 밤늦게 집을 나섰다.
그래도 밥은 먹고 살아야 할 것 아닌가.
한밭도시락에서 내가 좋아하는 치킨마요를 사들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복도에서 스쳐지나간 후, 다시는 못 볼 줄 알았던 그녀의 뒷모습이 보인다.
어서 달려가 말을 걸어보고 싶었지만,
왠지 위축된 내 마음은 생각을 가로막는다.
진희의 뒷모습이 어렴풋이 겹쳐져 보이는 듯 하다.
#10. 방전
그녀에게 다가가 말을 걸어볼 걸.
나는 그 일을 두고두고 후회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녀에 대한 내 마음이 그저 호기심인지, 아니면 연정인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아직. 내 마음 속엔 진희에 대한 것도 남아있기 때문에.
며칠 밤낮을 정신없이 잔다.
꿈속에는 많은 것들이 보인다.
알아볼 수 없는 기이한 모양을 한 것부터,
진희와 보냈던 행복한 기억들.
친구들과 보냈던 시간들.
그녀와 내가 데이트를 하는 모습.
진희에게 이별을 통보받는 모습.
그녀가 나에게 고백하는 모습.
교수님이 출석을 부르는 모습.
........
눈을 떴다.
지금 사는 집에는 햇볕이 잘 들어오지 않아 시간을 알 수 없다.
얼마나 잠들어있던거지?
구석에 던져놓았던 핸드폰을 켜본다.
수요일.
수업도 많이 빼먹었구나.
아픈 머리를 가볍게 흔들며 화장실에 들어가 머리를 감았다.
으으.... 머리가 깨지는듯 하다.
잠시 비틀거리며 머리를 말리고 집을 나선다.
수업이 끝나는 시간인지 벌써 먹자골목 앞에는 많은 사람들이 지나다니고 있다.
사람들과 부딪히지 않기 위해 나는 조심스럽게 한밭도시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어...”
딴 생각을 하다 미처 보지못한 방향에서 한 남자가 다가와 부딪힐 뻔 했다.
가까스로 몸을 피해 옆으로 몸을 틀었을 때, 거기에는 또 다른 사람이 있었고 재수없게 부딪혀 서로 넘어졌다. 아프다.
“악!”
“죄송합니다!”
황급히 자리를 털고 일어나 고개 숙여 죄송하다고 말하며 그 사람에게 다가간다.
거기에는 투덜거리며 친구에게 부축 받아 일어나는 한 여자가 있었다.
“아 뭐에요!.......어?”
그토록 내가 궁금해했던 그녀였다.
다시 보게 된 그녀의 얼굴은 내 기억과는 약간 다른 모습이었다.
내 기억 속의 그녀는 우울한 얼굴을 한 평범한 사람이었지만,
지금의 그녀는.. 그런 우울함은 하나도 보이지 않는, 뭔가 상큼한 느낌의 모습이었다.
멍하게 바라보는 나를 보며 그녀가 다시 말한다.
“우리, 어디서 본 적 있죠?”
Contin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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