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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갈 데가 없다

만듦

자작 단편 소설 - 선율

2012.03.24 20:49

모순나선 조회 수:242

눈이 부시다.. 아침일까..
창문으로 스며든 햇빛에 잠을 깬 나는 왼손을 들고 자세히 보기 시작했다.
굳은 살이 너무 박혀 이젠 감각도 느껴지지 않는 왼손 손가락들.
피아노를 너무 많이 쳐서 울퉁불퉁해진 손가락들.
어젯 밤도 기타와 함께 잠들었었다.
요즘 곡을 만들고 있는데 역시 작곡은 어려운 것이였다.
있는 힘껏 해가고 있는데 아직 반절도 완성하지 못했다.
과연 창작이라는 것은 뼈를 깎는 고통이 동반되는 것이였다.
뭐 당연한 것이겠지.
어렸을 때부터 수도 없이 겪어온 고통이지만 매번이 새로운 고통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이 고통에 지지 않는다. 그것은 확실한 사실이였다.
그렇기에 오늘도 음악을 통해 살아갈 수 있다.
다시 한번 마음을 굳게 먹으면서 침대에서 빠져나왔다.

그 때 나이는 16살, 한창 공부에 매진해야 할 시기이지만 나는 공부에는 관심이 전혀 없다.
나의 유일한 관심사는 음악. 음악뿐 이였다.
그렇기 때문에 내 주위에는 나와 같이 음악에 미친 아이들만 있었다.
각자의 악기를 통해 음악을 하고 싶은 아이들.
어떤 아이는 목소리로, 어떤 아이는 베이스 기타로, 어떤 아이는 일렉트릭 기타로, 어떤 아이는 드럼으로, 어떤 아이는 건반으로.
매일 학교가 끝나면 그 아이들과 함께 모여 음악을 하는 것이 하루중 내가 유일하게
행복을 느끼는 시간이였다.
그 시간이 영원하기를 바랄 즈음에는 항상 늦은 밤이 되어 집에 들어가야만 했었다.
왜 그렇게도 연습실의 불을 끄고 나가기가 싫었던 걸까
그 어린나이에도 나는 음악이라는 유일한 끈을 더 힘주어 잡기 시작했던 것일 것이다.
나와 그 친구들은 각자 자신만의 음악 세상을 창조해나가며 인생을 즐기는 훌륭한 사람들이였다.
물론 어른들이 보기에는 미래가 걱정되는 어린 외곬수들 이였겠지만.

내가 언제부터 음악을 사랑하게 되었는지는 자세히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예상할 수 있는 것은 어렸을 때에 처음 가지고 놀게 된 장난감이 피아노였다.
그래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점점 자라면서 음악을 좋아하게 되었고
다른 아이들이 공부를 위해 학원과 과외를 할 시간에 나는 음악 연습실에 틀어박혀
하루종일 음악을 만들고 음악을 연주하고 음악을 느끼고 음악이라는 공기로 호흡했다.
그저 연습실에 있는 시간들이 너무나 행복했었다.
다른 어떤 무엇인가를 할 때보다 피아노 건반위를 헤엄칠 때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쁨이 생겨났다.
어린나이에 밥 먹는 것도 잊고 피아노를 연주하는 아이라면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필요없을 것이다.

이 세상에서 살아있음을 느끼게 해주는 유일한 존재는 음악뿐 이였다.
음악을 통해 나는 나의 존재의미를 알게 되었다.
평생 음악을 하면서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다른 무엇인가를 하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나에게 음악은 공기 같은 존재였다.
적어도 그 시절까진 그랬다.

그렇게 음악과 함께 살아가던 나의 삶에 큰 파도가 밀려왔다.
그 파도는 돈이라는 현실적인 문제였다.
우리집은 그 일이 있기 전까지는 평범한 중산층 가정이였다.
공무원인 아버지에 선생님인 어머니.
그리고 나보다 3살어린 여동생.
우리는 부족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풍족하지도 않은 그야말로 정확한 중산층의 삶을 살고 있었다.
그러던 중 아버지가 도박에 빠지게 되어 우리 가족은 가뭄에 갈라진 땅처럼 박살이 나버렸다.
집을 담보로 사채를 빌려쓴 아버지는 커져 가는 빚을 갚지 못해 전국을 돌아다니며 도망다니는 신세가 되었고 어머니는 아버지가 그렇게 되버린 후 바로 집을 나갔다.
그로부터 10년. 나는 그 이후로 아버지나 어머니라는 존재를 내 기억속에서 지워버렸다.
그들은 나에게 어떤 존재였을까 단지 좋고 나쁨으로 나눈다면 나쁜 부모들이였겠지.
이상하게도 요즘 나에게는 그런 별로 중요하지 않은 생각들이 자주 든다.
왜일까?

그렇게 가족이 뿔뿔이 흩어진 이후로 나는 3살어린 여동생을 딸처럼 정성을 다해 키워냈다.
돈이 없어서 단칸방에 살 때에도 항상 배웅을 나갔었고
먹을 것이 없어 라면을 하나 먹을 때에도 항상 나보다 동생에게 더 많이 주었다.
그런 여동생이 다음 주 결혼을 한다고 한다.
나는 요즘 결혼식의 축가로 불러줄 노래를 만들고 있는 중이였다.

26살의 나는 한 언더그라운드 밴드의 리더를 맡고 있었다.
얼마 전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다시 음악으로 돌아온 것이다.
다시 돌아온 나에게 음악은 치유의 손길을 건넸다.
그리고 나는 그 손을 잡고 다시 일어섰다.
현실이라는 넘을 수 없는 벽에 막혀 음악을 그만뒀었던 나.
지금까지 음악을 잊고 지내온 날들이 나에게 어떤 의미를 부여할지는 알 수 없지만
다시 10년의 그 시절 처럼, 음악을 위해서 오늘을 살아간다.
그것만으로 모든 힘든 현실을 이겨낼 수 있었다.

날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그리고 내 손에는 완성된 곡의 악보가 들려있었다.
곡의 제목은 ‘To my music’.
이제 결혼식에서 불러줄 일만 남았다.
어떻게 이렇게 빠르게 곡을 완성할 수 있었을까
곡을 구상하던 중 희미하게 떠오른 그녀의 기억 때문이였을까
‘음악을 하는 너는 너무나도 아름답게 빛나고 있어. 나를 위해서가 아닌 너 자신을 위해서 항상 그렇게 음악으로 숨쉬는 사람이 되어줄래?’
마지막 만남에 그런 소리를 하고 그녀는 돌아섰다.
왜 그랬을까? 그런 소리를 해버리고 떠나가면 나는 어떻게 대답해야하는지 몰랐다.
그래서 계속 그 자리에 서서 흐르는 눈물을 닦았었다.
첫사랑 이였기 때문일까. 10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그녀의 사소한 모든 것들을 기억할 수 있다.
음악을 하면서 그녀가 했던 마지막말을 셀 수 없이 속으로 되새겼다.
진정 음악만이 나의 길이라는 것을 그녀의 말로 다시한번 확신했었던 것, 그것이 나에겐 정말 큰 행운이였을지도 모른다.

여동생의 결혼식날이 되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준비를 했다.
유난히도 오늘은 그녀에게 고백할 때 불러줬던 노래가 머릿속에 맴돈다.
만약 다시 그녀를 만난다면 꼭 그 때의 대답을 해주고 싶다.
‘정말 고마워. 나에게 너는 끝없이 듣고 싶은 아름다운 곡 이였어’ 라고.

결혼식 시작 1시간 전이다. 오늘 하루는 바쁜 하루가 되겠지.
거울 속의 나를 한 번 바라본 뒤 집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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