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나도 예전에 1챕터 글 냈던거
2012.11.11 01:34
당신은 어떤 소원이 있습니까?
“미움 받고 싶지 않았을 뿐입니다. 죄송합니다.”
* * * * *
다른 사람과는 다르고 싶다. 평범해지고 싶지 않다는 마음은, 고등학생이라면 누구라도 품고 있을 것이다.
미야는 분명 평범하지 않은 소녀였다. 이국적인 외모와 비상식적인 가정 배경을 설명하고 싶은 건 아니다. 외국인과 흡사한 외모는 외국에선 흔한 모습이고, '알고 보니 아버지가'라든가, '알고 보니 어머니 쪽 집안이'라는 내용은, 물론 픽션이긴 하나, 드라마나 영화에선 쉽게 볼 수 있는 것이다. 그것들이 물론 미야의 일면을 덧칠하는 역할을 맡고 있지만, 분명 미야 그 전부라고는 말할 수 없다.
하물며 고등학생이 된 지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았던 그 때에 미야의 일부라도 알고 있었다는 건 무리였겠지.
그래도. 아니, 그랬으니까, 내가 그 날 보았던 미야의 모습은, 어쩌면 살아 생전에 다시는 보기 어려운 장면이었구나 하는 자각을 뒤늦게나마 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고등학교의 첫 같은 반 아이들은, 마치 예전부터 알고 지냈던 사이처럼 쉽게 친구가 되었다. 푸근한 봄의 교정 곳곳에서 피어나는 꽃잎들이 남녀 공학에 다니는 우리들의 마음은 일렁일렁 흔든 것은 말할 것도 없다. 하얗게 익은 이팝나무의 그늘길 아래에서 '설마' 하는 의심은 설렘이 되고, 설렘은 자라나서 짝사랑이 되기 마련이다.
그 짝사랑의 대상으로 가장 많이 손꼽힌 반 친구는 당연 미야다.
맑은 먹빛이 감도는 머리칼에 약간 새치름하게 솟은 눈매, 말수는 적어도 언제나 즐거운 표정으로 주위 친구들의 말을 들어준다. 그리고 처음 만나는 사람과 늘 보는 사람을 가리지 않고 항상 높임말을 한다. 어른들이 아니라 클래스메이트에게도 늘 부드러운 높임말을 쓰는 것은, 유년기를 해외에 보내와서 동한국 기준으로는 우리보다 한 살 어린 탓도 있을 것이다.
뭇 남자애들이 설레는 것도 당연하였다.
나 역시 몸도 마음도 건강한 소년이다. 전혀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
그렇지만 딱히 여자 친구로 삼고 싶다거나, 다른 아이들보다 조금 더 특별한 존재가 되고 싶다는 감정을 느낀 적은 없었다. 처음엔 조금 가슴이 설레이긴 했었지만 친해지면 친해지는 것만으로도 충분했고, 이미 반장의 역할을 맡고 있는 미야와는 유난히 가까이 얽혀봤자 피곤한 일만 생길 뿐이다. 우리 반에서, 그리고 더 나아가서 전교에서도 미야는 저 머나먼 밤하늘의 별처럼 존재감을 반짝이고 있었다. 그것으로도 충분히 좋은 이야기이다.
그 이상은 필요치 않는 이야기였지만.
개학을 한지 며칠 지나지 않은, 3월 말의 어느 날이었다. 점심 식사를 끝마친 후의 여가 시간은 참을 수 없을 만큼 노곤하고 나른하여서, 창가 맨 뒤쪽 책상에 가만히 엎드린 나는 고개를 창밖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 때는 아직 병원에 드나들지 않을 때였기에 그럭저럭 친구라고 부를 만한 녀석들도 있었지만, 점심 식사 전 수업에서도 체육 시간을 보낸 뒤에 밖에서 기운차게 스포츠를 즐길 만큼의 체력은 전무했다.
몸은 피곤하고 배는 적당하게 부르고 뜨뜻미지근한 바람이 쉼 없이 불어오니 졸지 않고서는 버틸 재간이 없다. 그래서 처음에는 누군가가 교실에 들어온 지 알아차리지 못했었다.
“……아아, 진짜 말이지.”
여자애 치고는 다소 어른스러운 미야의 목소리로, 누군가가 말했다.
“걔네들은 정말이지 쉴 새 없이 쫑알쫑알,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지친다니까…….”
그 말은 나도 동감이었다. 유난히 텐션이 높은 몇몇 여자애들은 보는 것으로 완전히 질려버리기에, 마음이 불편한 아이들은 어지간하면 그 무리에서 일찌감치 멀리 떨어져 있는 편이다. 나도 내심 껄끄러운 편이었지만, 괜히 행동으로 불편함을 드러내면 좋지 않은 인식을 줄 수도 있다.
그렇지만, 엎드린 자세 그대로 잠기가 서서히 빠져나가는 동안, 나는 의아한 부분을 떠올려본다.
미야의 목소리로 꽤나 시니컬한 말투를 쓰는 사람이, 애초에 우리 반에 있었던가?
정말도 이런 내 의문에 대답을 하려는 의도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뒤이어 들려오는 목소리를 거부할 만큼의 용기는 나에게 없었다.
물론 미야가 어느 말을 하고 어떤 식으로 표현을 하든지에 대해서 내가 간섭을 할 권리는 없다. 잘못이 있다면, 미야의 말을 들은 내가 나 자신조차 생각지 못했을 정도의 어떤 감정을 품게 된 쪽이야말로 잘못된 것이다. 이런 가정이 의미가 없다는 건 알고 있지만.
미야의 그 말은 듣는 것보다 듣지 않는 편이 나았을지도 모른다.
다른 아이들보다 조금 더 일찍 교실에 들어온 미야는, 교실 한 구석에 잠자코 엎드려 있던 나를 미처 알아차리지 못하고, 책상 위에 널브러진 체육복을 개면서 혼잣말을 중얼거린다.
"착한 척 하기도 힘드네."
그렇게 말을 한 미야는 이윽고 고개를 든 나와 눈이 마주쳤다.
Chapter 1.
아직 여름의 여운이 남아 있는 9월의 공원은, 짧아지는 낮엔 어쩔 수 없다는 듯 길게 그림자를 떨어뜨리고 있었다.
오가는 사람들 사이로는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떠들썩하게 수다를 떠는 교복 덩어리들의 눈에 띄었다.
종족별 특성인지는 몰라도 여자애들은 양떼처럼 모여서 꺄아 꺄아 비명을 지르고, 커플들은 긴 소매의 옷차림도 더운지 소매를 접어 올리고는 찰싹 붙어서 떨어질 줄은 모른다. 아무래도 남자인 나는 이해하기 어려운, 그리고 싱글인 나로서는 더더욱 이해하기 힘든 그들만의 풍습이었다.
그렇게 더우면 따뜻한 인간을 가까이 하지 말고 기체 분자처럼 팍팍 떨어져서 걷던가….
이렇게 생각한 나 역시 교복 블레이저를 팔꿈치 언저리까지 걷어붙인 차림이었다. 한 쪽 어깨엔 무거운 책가방, 반대쪽 손으로는 옷가지가 든 짐바구니를 들고 말없이 그들 사이를 가로질러 갔다.
벤치에 앉은 사이좋은 연인들이 내 쪽으로 시선을 던지는 것처럼 느껴진다.
기분 탓, 은 아니겠지.
내가 생각하더라도 지금 내 모습이 상당히 우스꽝스러운 건 알고 있다. 하지만 어쩔 수가 없는 게, 학교에서 수업이 끝나자마자 바로 병원에 가지 않으면 진료 시간에 맞추기가 어려웠다. 거기에 여러 가지로 짐을 챙기다보면 지금과 같이 온 몸 한가득히 짐 투성이다.
그래도 이런 상태에서 기분이 좋은 게 있다면, 오늘부터 며칠 동안은 학교에 가지 않아도 된다.
매 년 가을의 길목에는 은혜로운 조상님이 남겨주신 소중한 명절, 추석이 다가온다. 여러모로 크고 작은 일이 겹쳐서 올 추석엔 편안하게 쉴 수는 없더라도, 그래도 나름 걱정거리로 머리가 아픈 이 시점에 딱 알맞은 휴일이다.
생각을 정돈하고 기운을 재충전하는 기회로 삼을까, 아니면 당일치기 아르바이트로 생활비를 벌까.
고등학생인 내가 단기 아르바이트를 해야만 생활비를 충당할 수 있다는 상황에서 이미 어느 선택지를 골라야 할지는 정해진 것 같기도 하다.
후우…. 내 청춘, 아프니까 청춘인 건가.
이런 아픈 청춘은 필요 없는데….
여러 걱정거리를 끌어안은 생각의 벡터가 마이너스를 향하니, 한도 끝도 없이 우울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찾아왔다. 어깨에 걸친 책가방을 고쳐 매며 한숨을 쉬던 찰나, 문득 놀이터 옆 자판기를 보았다.
“으음?”
무언가 평범치 않은 실루엣이 시야에 들어온다.
그새 어두워진 하늘 아래, 자판기는 어딘가 얼룩덜룩한 조명을 환하게 켜고 있었다. 하나는 어느 유명한 탄산음료의 메이커가 그려진 새빨간 색, 다른 하나는 누가 보더라도 이온음료가 연상되는 파란 배경의 하얀 라인. 두 자판기는, 오래 전부터 공원 한 구석에서 익숙한 풍경으로 자리 잡아 있었다. 그리고 그 좁은 틈 사이에 비집고 들어가 있는 듯 한 그림자가 보였다.
몸을 숨기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동전이라도 주워 보려고 억지로 온몸을 밀어 넣다가 끼어버린 건지, 초등학교 고학년 정도로 보이는 어린 아이가 자판기 틈 사이에 어정쩡하게 서 있었다. 자판기 사이의 공간은 어린 아이의 덩치라고 하더라도 쉬이 들어가기 어려울 만큼 비좁았다.
용케도 그 안으로 들어간 것은 장하다고 칭찬할 만 했다. 그렇지만 안타깝게도 나갈 때는 마음대로 나오지 못하고 있는 것이 문제였다.
“…….”
지금은 모르는 척을 해 주는 게 도와주는 건가.
어느 편이 저 아이에게 좋을지 고민하며 바라보니, 저 쪽에서도 시선을 깨달았는지 나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눈과 눈이 마주쳤다.
“오아―” 라고 기묘한 탄성을 낸 쪽은, 자판기 틈 사이의 소녀였다.
“아저씨. 나 좀 도와줄래? 몸이 꽉 들어차서 꼼짝도 안 하는데.”
“부탁을 하는 것 치고는 예의 없는 말투잖아. 아저씨가 아니라고. 고등학생.”
“고등학생이니까 아저씨 아니야? 어? 아닌가? 삼촌이라고 해야 하나? 아하하, 삼촌 좋네!”
심각하거나 곤란하다는 느낌은 조금도 보이지 않는 밝은 목소리였다. 어린 아이에게 그런 밝은 목소리로 아저씨라 불리니, 여름 저물녁 해바라기만큼이나 기다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한층 우울함이 갑절로 우울해져서, 이대로 밤에 물들어서 안개처럼 퍼져 밤하늘로 퍼져나갈 것 같았다.
확 무시하고 가 버릴까.
“흐음……. 도와주면 안 될까, 오빠?”
나는 책가방과 짐바구니를 자판기 옆에 내려놓고, 틈 사이에서 겨우 왼팔 하나를 내밀고 있는 소녀를 잡아당겼다.
아저씨란 호칭에 화가 났다가, 다시 ‘오빠’라고 불러주는 작은 여자아이를 좁은 틈에서 꺼내기 위해 살짝 비열한 미소를 머금고 온몸 던지는 남고생이라. 머릿속에서 떠올려 보아도 그리 호감을 가지긴 어려운 캐릭터다.
분명히 이 이야기 초반까지는 나도 꽤 멋들어지게 운을 떼며 분위기 잡았는데.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나는 어디에 긁히지 않도록 여자애를 천천히 자판기 틈 사이에서 꺼내었다. 그러고 나서야 나는 이 열 살 남짓한 소녀의 옷차림에 관심을 가졌다. 오해가 거듭되긴 싫으니 확실히 말하건대, 어디까지나 소녀가 걸치고 있는 옷에 관심을 가졌다.
소녀가 입고 있는 옷은, 자신보다도 최소한 서너 품은 더 커 보이는 교복이었다.
자판기의 하얗고 알록달록한 불빛 아래에 비쳐 보이는 그것은, 나와 같은 학교의 교복이다.
학년마다 색상이 다른 넥타이도 내 넥타이과 똑같은 색이었다. 그렇다면 아마도 저 교복은 나와 같은 학년이 입는 교복이란 것이겠지. 하지만 저렇게나 자그마한 키에 ‘아가씨’를 꼭 빼닮은 학생이 있다는 소식은 들어본 적이 없다.
‘아가씨에게 여동생이 있었나?’
윤기가 흐르다 못해 창백할 정도로 하얀 은색의 머리칼과 보랏빛 눈동자, 이국적으로 크고 뚜렷한 이목구비는 흔한 특징은 아니었다. 흔하기는커녕, 국제결혼을 하지 않고서는 내 선대의 조상님과 후대의 자손님에게선 절대로 나타날 수 없는 포인트다.
적어도 이 근방에서 아가씨 외에 이런 특징을 가진 사람은 없다.
‘아가씨’는, 미야에게 붙은 여러 별명 중 하나이다.
미야는 자신이 부잣집의 규수라는 점을 굳이 숨기지 않았다. 학급 행사 중 돈이 필요한 일엔 기꺼이 사비(우리들의 기준에서는 거액이지만 그녀에겐 부담이 되지 않는 정도였다)를 사용하였고, 금액적인 면에 있어서는 본인도 자기가 특별하다는 정도는 자각하고 있는 듯 했다.
돈에 얽매임이 없이 달관하고 있는 듯 하는 미야의 표정은 도리어 너무나도 깔끔해서 미운 감정이 생기지 않았다. 언제나의 공손한 높임말로 생긋 웃을 때엔, 정말 ‘우리와는 다른 세상인 녀석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지만, 누구에게라도 기분을 해하는 면은 없었다.
자판기 틈에서 구조한 이 녀석도 아가씨와 생김새가 쏙 빼닮았다. 아가씨는 나보다도 키가 아주 살짝 작은 편이다. 양 손을 하늘 높이 번쩍 들어야 아가씨와 비슷할 정도니까, 반대로 말하자면, 키 빼고는 아가씨와 판박이다.
무사히 자판기 틈 사이에서 탈출한 꼬마 숙녀는 옷에 묻은 먼지를 작은 손으로 털어냈다.
몸에 맞지 않는 거대한 교복에 파묻히다시피 하면서도, 부지런히 몸 정돈을 마친 소녀는 헛기침을 하였다. 그리고 손을 앞으로 모으고 고개를 숙였다.
“도와주셔서 고맙슴다.”
“뭐, 뭐어 이 정도야….”
조금 전까지는 그렇게 천진난만하더니, 감사를 표할 때에는 예의를 제대로 갖춘다. 공손할 때와 아닐 때를 구분할 줄 안다는 건, 아무래도 가풍이 엄한 곳에서 자라고 있기 때문이겠지. 아가씨도 학교에서는 예절 바른 학생으로 소문이 자자하니, 그 동생이라고 하더라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아가씨와 같은 반이긴 하지만, 한 반이 된 지 반 년이 넘도록 교실 안에서 대화다운 대화를 한 적은 한 번도 없다. 이 녀석과는 다르게, 숨 쉬고 눈 깜박이는 것부터가 아가씨는 기품이 넘치니까, 나 같은 어정쩡한 포지션의 남자애들은 그저 멀리서 바라볼 뿐이다.
다시 한 번 나에 대한 왜곡된 오해를 막기 위해 덧붙이건대, 멀리서 아가씨의 호흡과 눈꺼풀을 일거수일투족 예의주시하는 신사적인 일상을 보낸 건 아니다.
그래도, 얘도 장차 나이를 먹고 자라서 미야와 같은 나이가 되면 평생토록 점잖음을 온 몸에 칭칭 감을 거라고 생각하니, 조금은 불쌍한 감정도 들었다. 지금 이 정도로 작고 귀여우면서도, 가끔은 눈에 보이는 애교를 부리는 것도 꽤나 귀여운데.
으음….
뭔가 중요한 걸 잊어버린 기분이……
.
“하나 묻고 싶은 게, 오빠가 입은 옷이랑 지금 내가 입고 있는 옷 디자인이 비슷하네?”
“으응. 그야 네가 걸치고 있는 교복이 내가 다니고 있는 학교의 여자애 교복이니까. 그런데 그 옷, 너한테는 너무 커 보이는데, 누구 옷이야?”
“나와 같은 학교를 다니는 네 언니 옷이니?”라는 디테일한 질문은, 자칫 ‘우연히 길에서 만난 사람이 가족 구성을 알고 있었다.’라는 오해를 살 까봐 입에 올리지 못했다.처음 보는 사람이 부모님의 안부를 묻는 식으로 운을 뗀다면, 나라도 기겁할 것이다.
내 말에, 잠시 동안 자신이 입고 있는 옷을 이리저리 살펴보던 소녀는,
“나도…… 모르겠어.”
자신도 궁금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신을 차려 보니 자판기 앞에서 쓰러져 있었어. 이 옷을 입은 채로. 어리벙벙하게 정신을 차리고 있는데 스커트 주머니 안에 휴대폰이 울려서 꺼내려다가 실수로 떨어트리고, 주우려다가 엉겁결에 발로 걷어차 자판기 틈 사이로 들어간 거야. 그걸 꺼내려고 하다가 몸이 끼어서 비명을 마구 지를까 싶던 차에 아저씨가 도와줬고.”
“빨리 도와줘서 다행이었네….”
어쩐지 맥락이 없어 보이는 말이었지만, 거짓말을 하는 걸로는 여겨지지 않았고 엉망진창으로 소녀가 곤경에 처하였다는 건 알았다. 게다가 조금만 내 구조가 늦었다가는 공원의 허름한 자판기에서 새로운 도시 전설이 탄생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길고 풍성한 머리를 양 갈래로 묶어 내린 소녀는, 하얀 미간에 주름이 그어질 정도로 곰곰히 생각에 잠겼다.
“……어째서 내가 여기에 있는 건지 기억이 나지 않아. 분명히… 난, 내 방에서 책을 있었는데. 한창 엎드려서 졸다가 정신을 차려 보니, 처음 보는 길바닥에서 누워 있던 거야. 어떻게 된 일인 걸까? 혹시 뭐 짐작이 가는 것 없어?”
“그걸 나한테 물어 봤자―”
아.
소녀의 질문에 쩔쩔 매던 나는, 조금 전부터 생각이 날 듯 나지 않을 듯 하였던 것이 떠올랐다.
"저기, 내 이름은 지음이야. 한지음."
내가 이름을 말하자, ‘이 인간이 대체 뭔 소리를 하는 거야’는 얼굴이던 소녀도 “아하!”하는 탄식과 함께 고개를 끄덕거렸다.
비록 만난 지는 얼마 지나지 않았지만, 역시 나이답지 않게 눈치가 빠른 녀석이다.
“응. 지음 아저씨라고 부르면 되지?”
“아니야, 내 말은 통성명을 하자는 거였어! 그리고 왜 거기서 다시 '아저씨'로 돌아가는 거야?”
나보다 열 살은 어려보이는 여자애한테 아저씨라고 불렸다고 진심으로 화를 내고 있는 나 자신도 상당히 서글펐다.
후…. 인정하긴 싫지만, '오빠'라고 불리는 쪽이 더 기분 좋다.
열일곱 살 인생의 신선한 깨달음이다.
이런 깨달음, 몰라도 되는데….
“이상해… 왜 화를 내는 거야? 내가 보기에는 그냥 다 아저씨로 보인다구. 그래도 지음 아저씨가 오빠라고 불리는 쪽이 좋다면 오빠라고 불러는 줄게.”
“겉으로만 꾸미는 건 필요 없어. 마음속에서 우러나는 호칭이 아니면.”
“의외로 까다롭네, 아저씨. 나처럼 어린 아이에게 아저씨라 불린다고 해서 기분 상할 건 없어. 생각해봐, 의외로 주위에 멋있는 아저씨들도 많잖아. 아저씨라고 해서 다들 지음 오빠처럼 축 처진 이미지는 아니니까.”
“너, 방금 나에 대해서 굉장히 자연스럽게 뭔가 중요한 단어를 말했거든!”
“어린 아이?”
“일부러 그러는 거구나, 그런 천연덕스러운 표정을 지어도 안속아!”
“그렇게 화를 내는 아저씨도 싫진 않으니까…. 아저씨, 그래도 말이지, 중요한 만큼 소중하게 대해야 하는 거야.”
대화를 하면 할수록 헤어 나올 수 없는 함정 속으로 들어가는 것 같았다.
무슨 말을 꺼내더라도 제 삼자가 듣기에는 오해를 부를 수밖에 없는 그런 미묘한 수준의 어휘가, 고의인지 아닌지는 몰라도, 주위에서 보는 눈이 있는 열린 곳에서는 상당히 위험스럽다.
순진무구한 아이와 대화를 하는 건 의외로 힘들구나. 그렇게 생각은 하더라도, 이 아이는 속으로는 얼마나 능청을 떨고 있는지 가늠할 수가 없다. 애초에 만난 지 십 분도 채 지나지 않았다. 의미가 담긴 대화 같은 대화를 나눈 건 정말로 손에 꼽을 정도고.
어리다고 해서 솔직하게 있는 그대로를 표현하리라 생각하는 건, 어리지 않는 사람들의 생각이다.
십대 절반이 꺾인 나도 점점 아이에서 어른으로 거듭나고 있으니, 아이들의 속내를 순수하게만 바라볼 수는 없겠지. 이 녀석의 주장대로라면 이미 난 외모 연령이 완연한 어른이니까.
“뭐, 아무튼 모르는 사람에겐 함부로 이름을 말하면 안 된다고 어머니께 배웠어. 잘못하면 못 쓸 사람이랑 얽힐 수도 있다고.”
“몹쓸 사람이겠지….”
“세상에, 그렇게까지 자학을 할 필요는 없는데!”
“너어! 놀랄 타이밍과 대상이 무서울 정도로 다 빗나갔거든?!”
“그거야 아무튼.” 흠흠, 하고 헛기침을 두어 번 한 소녀는 손등까지 내려온 교복을 올리며 말했다.
“아저씨는 좋아 보이는 사람이니까. 내 이름은 미야. 아름다울 미(美)에 빛나는 밤 야(焲). 그냥 밤이 아니라 불화 변이 붙은 밤이야.”
“미야….”
리틀 아가씨라고 부르고 싶을 만큼 아가씨와 쏙 빼닮은 소녀는, 거짓말을 하는 기색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눈빛으로 아가씨의 이름을 입에 올렸다. 정확히는 자신의 이름을 말한 거겠지.
무슨 이유인지 설명할 수는 없지만.
미야는, 어렸을 때의 몸으로 돌아가 있었다.
* * * * *
고교 생활이 시작되던 첫날의 첫 수업.
어째서인지 담임선생님이란 인간은 뭔가 미룰 수 없는 서류 작업을 한다느니 뭐니 말하고는 "알아서들 자기소개하고 있어라"고 선언한 뒤 교실을 떠났다.
처음 보는 얼굴로 다들 어색한 분위기였을 때, 나는 창가의 맨 뒷자리에서 일찌감치 자리를 잡았다.
구석에 앉으면 필연적으로 왼쪽과 뒤쪽에는 아무도 앉을 수 없고(애초에 책걸상이 없으니), 부담스럽기 짝이 없는 처음 커뮤니케이션의 공포에서 조금은 멀어질 수 있었다. 분위기를 주도하는 아이들은 한 반에 한두 명은 있을 거고, 얌전히 앉아 있는 쪽을 선호하는 나는, 적어도 그 쪽 방면에 재능은 없었다. 그렇게 잠자코 있는 와중에.
나와는 정 반대의 자리―복도 쪽 분단의 앞에서 한 여자애가 일어섰다.
정직하게 말하자면, 첫눈에 반했다.
나뿐만이 아니라, 그 때에 교실 뒤에서 시시덕거리던 남자애들 일동도, 그 순간만큼은 숨을 멎고 눈을 뚱하니 껌벅였다. 요컨대 문자 그대로 숨 막히게 아름다운 소녀였다. 염색이 아닌 천연 은발은 허리 아래로 부드럽게 흘러내리고, 컬러 콘택트렌즈를 꼈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는 자수정 빛의 눈동자는 독보적으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이 몸은 탈민족 클래스다’라고 자기주장을 하는 눈매와 이목구비의 소녀는, 쑥스러운지 약간 상기된 얼굴로 입을 열었는데,
“일단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자기소개를 하는 게 어떨까요?”
실로 유창한 우리말 솜씨와 이국적인 외모 사이의 갭은 충격적이었다.
타고난 리더 체질인지 교실 분위기를 주도한 소녀―미야는 순조로이 반장이 되었고, 첫 학기가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아가씨’라는 별명을 가지게 되었다.
단지 아름다운 외모 덕분에 그런 고품격 별명을 얻은 건 아니다. 1학기 내내 성적 우수에 대인관계 원활, 선생님과 학생들 사이에서 두루두루 유명 인사이면서도 한 치의 틈도 찾아볼 수 없는 예의바른 태도. 그리고 미야의 부모님과 일가 쪽에 비상식적으로 거대한 재력이 있다는 소문까지 솔솔 돌았다고 한다.
요컨대, 문자 그대로 양갓집 규수와 동격인 소녀다.
나에게는 아무래도 좋은 일들이었다.
3월 말의 그 일이 문제가 된 건 아니었다.
지난 학기의 절반 가까이를 병원에서 지낸 나는, 학급에서 돌아가는 사정에 관심을 쏟을 여유가 없었다.
출석 일수는 편법에 가까운 방법을 써서 어찌어찌 채우고 있었지만, 서류상으로 출석을 하더라도 듣지 못한 수업 내용까지, 다른 사람에게 부탁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징검다리로 학교에 가더라도 간신히 아이들과 얼굴을 익히는 정도지, 수업을 따라가기는 어렵다.
그나마 다행이었다면, 주말마다 반장이―즉, 미야가 자신의 노트 필기 복사본을 가지고 집으로 오곤 했었다는 정도. 미야는 반장의 의무감으로 가져오는 듯 '나 귀찮아 죽겠다'라고 쓰여 있는 얼굴로 토요일 저녁마다 벨을 눌렀고, 나 또한 '시키지도 않았는데 부담스럽게 왜 이러냐'란 얼굴로 현관문을 열고 복사본을 받았다.
색다른 무언가를 기대했다면 미안하지만, 나와 미야 사이에는 별다른 대화가 오고 간 적이 없었다.
“다음 주에 소풍인데 올 수 있겠어?”라든가, “화요일에 체육 실기 평가가 있어.”라는 사무적인 전달은 받았어도, ‘그다지’ 라든가 ‘알았어’라는 정도로 짤막하게 대답을 한 게 전부다.
그렇게 정신없이 지내다보니 한 학기가 훌쩍 지나갔다.
앗, 하는 사이에 나는 혼자서 여름방학을 맞이하였고, 낮 동안에 학교에 가지 않아도 되니 여유가 생겼다. 학기 동안에 모자랐던 부분을 학원에서 보충하면서, 나는 그동안 지난 1학기의 일을 되새겨보곤 했고, 의외로 좋은 찬스를 날려먹은 거 아닌가, 하는 후회가 슬슬 들기 시작했다.
아가씨와 이성과 이성 사이로 가까워졌으면―하는 생각은 없다. 나뿐만이 아니라 미야도 흑역사로 간직한 채 잊어버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3월 말의 그 일 때문이지는 몰라도.
같은 클래스의 친구 관계로 보았을 때에, 지금보다는 더 사이가 좋았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미야를 향해 품은 마음은, 애정이나 호감과는 다른 감정이라고 생각한다.
단지, 그 때 미야의 한숨 섞인 자조는 다른 누구를 향한 것이 아니라, 말의 칼날을 스스로에게 겨누고 있었던 게 아니었을까―란 생각이 들었고, 어쩌면 내가 도와주어야 할 지도 몰랐다는 상념이 들었다. 무엇을 돕고 어째서 돕는지에 대한 해답은 찾지 못했지만.
그런 후회를 하면서도, 여러 가지 일에 치이고 차이는 와중에 여름방학이 끝이 났다.
여름방학 동안 미리 일을 끝마친 나는 가능한 한 출석을 하려고 했고, 성실히 학교를 다니면서 다시금 교실 안에서 적당히 친한 친구도 생겼지만, 2학기가 되면서 미야와 대화를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용기 내어 인사를 하더라도 제대로 된 회화로 이어지지 않았다.
자업자득이다.
친해질 수 있는 기회가 숱하게 있었음에도 제대로 말 한 번 못했던 나였으니.
생각해보면, 나와 아가씨 사이에서 접점을 찾는 것보다는 찾을 수 없는 이유를 찾는 편이 훨씬 수월하다. 드라마 세트장으로 본다면 내가 사는 세계는 시멘트 마당에서 세숫대야로 샤워를 하는 서민의 삶, 아가씨가 사는 세계는 양변기도 황금으로 만들어진 로열 클래스의 삶이다. 드라마에서는 서민과 귀족들이 서로 미운 정이 들고 치고 박고 싸우면서도 사랑이 싹이 트고 입술 박치기도 하지만, 애초에 있을 수 없는 상황을 다루니까 드라마이다.
미야는 사회로 나아가서는 애완견처럼 경호원을 데리고 다닐 아가씨다. 이렇게 같은 반에서 같은 공기를 주거니 받거니 하고 있는 것도 영광으로 알아야겠지.
마치 먼 조상님이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지배했다는 사람들처럼 나는 내면의 자기 합리화를 견고히 하는 데에 열중하였다. 그리고 뇌내 세계관이 제법 구축을 갖추기 시작한 9월 중순의 어느 날 저녁, 나는 미니멀한 아가씨와 함께 있었다.
“내가 원래 열여섯 살이었다, 이 말이야?”
“어. 학교에 있었을 때에는 네가 나랑 같은 나이였어. 이유는 몰라도 지금은 네가 되어 있는 거다.”
“무슨 말인지 미야는 모르겠어….”
아홉 살의 아가씨―아니, 아가씨였던 소녀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이온 음료를 홀짝였다.
해가 저물고 컴컴해진 공원에서 미야 혼자 둘 수는 없었고, 미야도 겉으로 드러내진 않지만 여러 가지로 혼란스러워 보였다. 그렇다고 해서 어려진 미야를 데리고 파출소를 찾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일단 너무 큰 교복을 벗기고, 블라우스의 긴 소매는 대강 걷어붙이는 걸로 해결했다.
다른 학교에 비해서는 약간 루즈한 축에 속했던 교복 스커트는, 지금의 미야에겐 무릎 아래로까지 내려오는 원피스가 되었다.
오해를 막기 위해서 자기 방어적으로 덧붙이는데, 벗긴 교복은 어디까지나 가디건뿐이다.
대강 짐을 정리한 나는, 어디로 연락을 해야 하는지 고민이 들었다. 처음엔 당연히 아가씨의 집에 먼저 연락을 할 생각이었지만, 미야는 썩 내키지 않는 기색으로 딱 잘라 말했다.
“가족들에게 걱정을 끼치기 싫어.”
“그래도 딸이 집에 돌아오지 않으면 부모님이 걱정 많이 하실 텐데. 일단, 친구 집에 있다는 정도로 둘러대고, 통화 정도는 하는 게 어떨까?”
아가씨의 휴대폰은 귀여운 별 모양 스트랩이 달려 있는 폴더 폰이었다. 배터리도 충분했고, 요새 여고생답지 않게 비밀번호도 걸려 있지 않았다. 누가 보더라도 부끄러울 게 없는 건지, 아니면 누가 이 폰을 보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는지, 여하튼 지금 상황에서는 다행스러웠지만 미야의 태도는 완고했다.
“연락할 필요 없어. 여기서 연락을 한다고 치더라도, 지금 시간대의 미야는 열여섯 살의 미야라면서? 아홉 살인 미야가 연락을 해 봤자 혼란스러울 뿐이야. 인류의 미래가 바뀔 지도 모른다구.”
“우주 스케일까지…. 초등학생의 발상, 상상 이상으로 자유분방하군.”
“왠지 상상 이상이라고 하면 정상이 아닌 것 같은 뉘앙스이지 않아?”
“그렇게 생각하니 그런 쪽으로도 볼 수 있을 것 같네.”
상상을 뛰어넘는 건, 대개 평범하다는 레이블에선 벗어난 상태를 말한다. 평범하지 않은 건, 보통, 정상은 아니라고 보겠지. 좋은 뜻이든, 나쁜 뜻이든.
미야가 갑자기 어려진 지금은, 확실히, 정상적인 상황은 아니다.
“아무튼 날도 슬슬 어두워지니, 공원 대신에 다른 곳으로 가는 게 어떨까?”
“집은 안 돼.”
“딱 잘라서 말하는구나….”
“아, 실수. 우리 집이 아니면 돼.”
“…….”
비슷한 의미이면서도 어쩐지 불신이 묻어나는 말이다.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아가씨는, 어렸을 적의 미야는, 집에 머무르는 것에 호감을 가지는 건 아닌 것 같았다. 어렸을 때엔 작은 트집으로도 집을 나와서 어디론가 나가고 싶은 마음이 없는 건 아니지만.
지금 미야의 반응은, 너무나 노골적으로 집으로 돌아가길 거부하고 있다.
집에 가는 것을 싫어하는 걸까. 아니면, 집 안에 있는 가족들과 무슨 트러블이 생긴 걸까. 그 반대로, 가족과의 사이가 너무 돈독한 나머지, 약간의 걱정이라고 끼치고 싶지 않은 배려일 수도 있었다.
남의 가족사는 모를 뿐더러, 알아도 관여할 권리도 없고, 나와는 삶의 레벨이 다른 아가씨의 집안 사정은 내가 생각할 바 아니었다. 조금 과격하게 말하자면, 어린 미야가 집에 돌아가길 싫어하는 건, 그 나이 또래에선 흔히 볼 수 있는 감정이다.
그렇지만 열여섯 살의 소녀가 아홉 살의 몸으로 돌아가는 건 보통 일이 아니겠지.
어딘가의 명탐정은 몸은 아이, 두뇌는 어른이라고 했다. 몸도 두뇌도 어릴 적으로 돌아간 미야에게 가장 화급한 문제는, 당연히 원래의 몸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문제는 미야는 아가씨 적의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
비일상적인 사건을 일상에 물든 사람에게 맡기는 건, 가혹하고, 잔혹하다.
“우리 집으로 가는 게 어때? 나는 괜찮은데.”
“아저씨 집에?”
말끝을 살짝 올린 미야는 “우―웅~~~….”하고 고민에 빠졌다.
“어린 여자 아이를 집으로 초대하면서 ‘나는 괜찮은데’라고 피력해봤자 불신감만 한층 더 커진다는 것도 모르는 아저씨를 따라가도 되는 걸까?”
“순수하게 우리 집에 잠깐 머물러도 된다는 뜻이거든.”
“우, 우리 집…이라고……?”
“정정한다, 내 집입니다! 할아버지, 누나, 나, 이렇게 3인 가족이 살고 있는 단란한 2층 독립주택이라고! 우리말의 애매한 1인칭을 지적하는 그 이방인 같은 신선한 시선도 나쁘진 않지만, 하필 이런 주제에 나와 우리의 모호함에 의구심을 가질 필요는 없잖아!”
그리고 조금 전엔 자기도 우리집이라고 말했지 않았던가.
천연덕스럽게 농담을 하는 와중에도 미야는 어린이들에게서만 볼 수 있는 특유의 활력을 잃지 않았다. 입가에 건강한 미소가 감도는 얼굴이, 교실에서 보던 아가씨의 무난하고도 일관된 미소와는 완전히 달라 보였다. 지난 학기에 우리 집이나 병원으로 찾아왔던 미야의 미소는 어땠었는지는 별달리 떠오르는 기억이 없었다.
늘상 찡그리고 있었던 것 같다. 아마도 팔 할은 내 책임이겠지.
하지만 어린 쪽의 미야가 짓는 미소는 정말로 기분이 즐거워지는 미소였다. 아마 아버지가 딸을 보는 흐뭇한 기분이 이런 기분이라 생각한다. 당사자와 주변 인물들은 그렇게 생각하는 걸로 보이진 않지만.
점점 주위에서 따가운 시선이 피부를 쿡쿡 쑤시는 것 같았다. 이젠 누가 신고를 하더라도 변명을 하기 어렵다. 어린 아가씨가, 미야가 어디까지나 장난 수준에서 나를 놀리고 있긴 해도, 일단 현 상황에선 내가 얘 보다는 몇 살이나 많은 성인인데 말이지.
“날 구출해준 건 고맙지만 낯선 사람을 따라가면 안 된다고 엄마가 그랬어.”
“정말 예고도 없이 평범한 반응으로 돌아왔구나. 일단 나는 원래의 너랑 같은 반 친구였어. 아예 낯선 사이는 아니니까, 믿어도 좋다고 생각해.”
“증거.”
“응?”
“열여섯 살의 미야가, 아저씨랑 친했다는 증거.”
같은 반 친구와 친했다는 증거를 보여 달라고 윽박지르는 소녀나, 당연하다면 당연할 이야기에 당황하는 나란 인간이나, 어느 쪽이든 난처한 처지였다.
친했다는 증거를 보여 달라고 해도 말이지….
평소에 같이 사이좋게 셀카를 찍는 사이가 아닌 이상, 어린 꼬마애도 납득할 만한 증거가 있을 리가 없다. 그리고 엄밀하게 나 자신을 생각해보니, 나와 아가씨는 그리 친했던 사이는 아닌 것 같았다.
얼굴이랑 목소리 정도는 알고 있지만 그것으로는 친하다고 하긴 어렵다.
삭막한 현대 사회다.
사고의 방향을 바꿔 볼 때엔, 지금 상황은 '과연 이 꼬맹이가 생각하는 ‘친했다는 증거’는 어떤 걸까를 맞추는 퀴즈쇼와 같다. 그리 생각을 하더라도 애초에 난 친구를 많이 만드는 성격이 아니니까, 친한 애들이 있다고 해도 그 증거물을 일일이 남길 만큼의 깊은 관계는 없었다.
나, 기껏 도와주고도 의심을 사고 있는 건가.
여러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끝에, 나는 멋진 해답에 도달했다.
“으음, 너랑 나는, 휴대폰 번호는 서로 알고 있는 사이야!”
“그거론 부족해.”
“마, 말도 안 돼. 너 정말 아홉 살 맞아? 내가 아홉 살이었을 때에는 말이야, 휴대폰 같은 건 어른들의 세계였어! 휴대폰이 아니라 휴대폰과 비슷한 장난감을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신뢰와 선망의 대상이었다고!”
“그 문제가 아니야, 바보 아저씨. 휴대폰 번호야. 그 정도는, 평범한 스토커라도 알고 있을 정보라고.”
“네 안의 평범함은 대체 어느 정도로 개성 있는 수준인거지….”
“덧붙이자면 지금 반응해야 했을 단어는 '평범한'이 아니라 '스토커'.”
“알겠다, 만약에 '스토커'에 태클을 걸었으면 '제 발 저리는 것 같아'라고 지적했겠지! 처음부터 함정이었어! 무슨 리액션을 취하더라도 스토커가 되는 함정이라니, 이건 너무하잖아!”
“스토커는 죄가 없어. 단지… 조금 일그러졌을 뿐이니까.”
“내가 스토커라는 걸 기정사실로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서 진심어린 대화가 필요한 것 같은데.”
“하지만 어쩔 수 없는 걸.”
미야는 도저히 내가 그 나이였을 때엔 지을 수 없던 눈빛으로, 나를 직시하였다.
“나는 기억이 단절되어 있어. 아저씨의 기준으로 보면 열여섯 살의 미야와 지금의 나는 이어져 보이더라도, 아홉 살의 나는, 단숨에 미래로 타임 워프를 한 기분이라구. 이런 상황에서 누굴 믿느니 믿지 않느니, 쉽게 판단할 수는 없어. 그건 미야를 구해준 아저씨라고 해도 마찬가지야.”
“…….”
지극히 바른 정론이다.
모르는 사람을 함부로 따라가면 안 되는 법이다.
더군다나, 생판 몰랐던 사람이 갑자기 친한 척을 하면 더욱 의심을 산다.
차라리 아예 모르는 사이라면, 각자 거리를 두고 사이를 좁혀나갈 여유가 있다. 오래전에 졸업한 초등학교 동창을 거리에서 만나면 인사할까 무시할까 어색한 것처럼, 어중간하게 알고 있는 사이도 그리 썩 친해지긴 어렵지만, 조금만 기회가 되면 언제든지 친해질 수 있다.
하지만, 한 쪽이 일방적으로 낯이 익은 때에는, 사정을 아는 사람이 친하게 다가가더라도 모르는 사람이 보기엔 호러스러운 경우가 된다. 지금 나와 미야의 경우가 그렇다.
내가 미야와 같은 상황에 처했다면, 얼굴도 모르는 사람의 말을 믿을 수 있을까.
“그래도, 왠지 미야는 아저씨를 믿어도 될 것 같아.”
미야는, 그래도, 열여섯 살의 나와 다른 생각이었다.
“아저씨는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지만, 보통은, 처음 보는 아이에게 이렇게까지 친절하게 대하는 사람은 거의 없어. 더군다나 지금처럼 수상쩍은 몰골이면. 다른 사람에게까지 믿음을 설명할 수는 없겠지만, 지금의 미야는 도와준 것만으로도 감사해서 어쩔 줄을 모를 정도야. 그 바탕에 '이 아저씨는 미야를 알고 있었다'라는 고리가 들어가면, 그나마 낫지. 뭔가 대가를 바라고 도와준 게니라, 도와주는 걸 당연하게 여기는 사이였다는 거니까.”
아쉽게도 나는 미래의 내 기억이 없지만.
소녀는 멋쩍게 웃었다.
“이러니 저러니 이유는 만들어서라도 붙일 수 있어. 그렇기는 해도 진심을 말하자면, 아저씨는 믿어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를 않아. 답에 맞춰서 이유를 만드는 건 나한테는 번거롭기만 하지 별로 도움이 되지 않으니까 그만 둘래. 그러니까 아저씨, 지음 아저씨. 내 말을 믿어 줄래?”
나를 믿겠다는 게 아니라, 내가 자신을 믿어주길 바라는 미야.
나이답지 않게 영악하고 영리해 보여도, 아홉 살은 아홉 살이다. 낯선 곳에 덩그러니 홀로 있는, 곤경에 빠진 자신을 도와준 낯선 사람에게조차 호의를 보낼 수밖에 없는, 막다른 궁지에 몰린 작은 소녀에겐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조차 미야는, 나로서는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의 깊은 마음씨를 가지고 있었다.
하루아침에 아가씨가 만들어 진 게 아니라는 사실이 새삼스레 대단하게 느껴진다.
아가씨는 어렸을 때에도 자신보다 타인의 마음을 먼저 생각하는, 속알맹이에 들어 있는 운영 체제가 성숙했던 것이다. 비록 말투는 조금 건방지긴 해도, 어지간해서는 따라가기 힘든 도량이다. 아마 지금의 나라고 하더라도, 미야처럼 침착할 자신감은 없다.
어려진 미야를 잠시나마 살짝 내려다보는 기분을 가졌던 건, 나중에 제대로 반성해야겠지.
나이로 사람을 재단할 순 없다, 이런 말은 어른들에게나 적용될 줄 알았는데 벌써 나 자신에게 되물어봐야 하다니…. 이건 다른 누군가에게 물어볼 것도 없이 반성감이다.
“당연한 거지, 그런 건. 나와 미야는 원래 친구였어. 친구는 서로 믿는 게 당연한 거야. 서로 도와주는 것도 마찬가지고. 그리고 어쩌면―― 네가 다시 열여섯 살로 돌아갈 수 있도록, 힘을 보태줄 수 있을 지도 몰라…아마도.”
“그런 말은 수상한 목적을 가지고 미야를 꼬드기는 걸로 밖에 생각되지 않아. 여태 지음 아저씨가 보여 왔던 무능한 행동거지를 미루어 보면 더더욱.”
“내가 너한테 그런 말을 들을 정도로 무능하진 않거든!”
“그러면, 자판기 틈에 낀 사람을 구하는 정도의 유능함이라고 고쳐 말하면, 아저씨도 인정할런가.”
“길 가던 사람 아무나 붙잡아도 발휘할 수 있는 소박한 유능함이라….”
“나는, 처음에는 모두에게 무시 당하고 따돌림을 당해 식판을 머리 위에 뒤집어쓰는 정도의 괴롭힘 정도는 친숙할 정도로 무능한 소년이, 어느 순간부터 자신조차 몰랐던 재능이 빛을 발하게 되는 컨셉이 좋아.”
“그거 컨셉이라고 말한 순간 이미 컨셉이 아닌 게 되잖아!”
그리고 그런 만화 같은 경우는 현실에 있을 리가 없다―고까지 말을 할 수는 없겠지.
급식을 뒤집어씌우는 괴롭힘은 내가 보지 못하고 있는 어느 곳에서는 일상처럼 일어날 수 있다. 내가 살고 있는 일상이 그렇지 않다는 점에서 조금이나마 안도감을 느끼고 있지만, 왠지 이 리틀 미야, 입에서 나오는 말로 나를 괴롭히는 거에 재미라도 붙인 것 같은데.
속으로는 무슨 생각을 품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여튼 동급생에게도 꼬박 꼬박 존댓말을 하는 미야에게도 이렇게 활기찬 어린 시절도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니, 플러스 마이너스 제로라고 쳐도 되겠지.
거기에 아가씨와 이렇게까지 긴 대화를 한 적은 없었다. 말을 나누면 나눌수록 내면의 신기록을 경신하고 있는 것 같았고, 어쩌면 이렇게 말을 많이 하는 건 아가씨에게도 그리 흔한 경험은 아닐 지도 모른다.
아가씨도 학교에서는 은근히 말수가 적은 편이었다.
학급 친구보다 의사 선생님들과 더 친한 내 경우는 말할 것도 없고….
“아저씨는 약간 못 미더운 면이 의외로 매력 포인트니까, 내가 보기엔 괜찮아.”
“이 타이밍에 왜 네가 취향을 어필하는지 모르겠어.”
“어머. 그거 진담이야? 나로서는 최대한의 서비스를 해 준거야. 어린 미야가 나중에 커서 아저씨랑 친구 맺는다면서. 그럼 내 비밀을 많이 알아두는 편이 좋지 않아?”
나, 아저씨가 그리 나빠 보이지 않거든.
그렇게 말한 미야는 싱긋 웃었다. 그 미소 속의 진심이 무엇인지 고민하는 내가 바보스러울 정도로 맑은 웃음이었다. 이런 아이가 무럭무럭 자라서는 그렇게 비뚤어진다고 생각하니, 인류의 미래를 건다고 하더라도 바른 방향으로 갱생시켜주고 싶은 마음이 든다.
뭐, 아가씨도 아가씨 나름대로 만족스런 학창 생활을 보내고 있는 것 같으니 괜한 참견이다.
거기에 아가씨의 취향이나, 호감을 가지는 아이템 정도는, 알아 두더라도 손해 볼 건 없을 것 같기도 하지만….
“그런 건 원래의 아가씨에게 직접 물어보지 않으면 실례겠지. 비밀은 비밀로 묻어두고 있어.”
“……아저씨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야.”
“일단 우리 집―아니, 내 집으로 자리를 옮긴 다음에, 편하게 대화를 하자고. 집은 여기서 별로 멀지 않으니까, 천천히 걸어도 10분 정도면 도착할 수 있을 거야. 아무래도 여기서 더 대화를 하면 위험할 것 같거든.”
“어, 그래? 나는 아저씨랑 있으면 안전해서 안심인데?”
속눈썹 짙은 눈을 깜박이며 미야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안타깝게도 이렇게 귀여운 모습을 보여줄 때마다, 내 신변은 한층 위협받고 있었다.
안 그래도 이 21세기, 세기말의 종말론조차 비껴나간 세상이다.
그 흉흉함을 나에게 무자비하게 대입한 끝에, 나와 미야의 사이를 나이차 많이 나는 남매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시민이 다이얼 112를 누르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지금 우리에겐 다른 사람들에게 조리 있게 지금 아가씨의 상황을 설득시킬 여유는 전무하다. 다행히도 미야는 내 집으로 향한다는 선택지에 만족스러워 보였다.
문제는 이 엄청난 짐들을, 원래 내가 챙기고 있던 짐과 지금의 미야가 들기엔 버거운 아가씨의 가방과 옷가지 등등을 어떻게 챙겨서 가느냐. 그보다도 우선시해야 할 문제는, 미야의 몸이 열여섯의 몸으로 돌아갈 수 있는 방도를 찾는 것이다. 평범하지 않은 문제다. 이런 류의 트러블에는 나도 익숙하진 않더라도 당황하진 않을 정도의 내성은 지니고 있지만, 그 점을 해결할 수 있느냐 없느냐는 차원이 다른 영역이다.
문자 그대로, 차원이 다른 영역.
그리고 이런 영역을 벗 삼아서 노니는 자를, 나는 잘 알고 있다.
미야의 호기심 어린 시선과 어쩐지 점점 따가워지는 행인들의 눈초리를 무시하고,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낸 나는 단축 다이얼을 눌렀다. 신호가 한 번 울렸는지도 긴가민가할 찰나의 순간에, 저 쪽에서 전화를 받았다.
“[욥. 웬일이야, 동생?]”
누나는 언제나처럼 경쾌한 목소리였다.
“[누가 또 소원을 빌고 싶대?]”
1차 심사도 못 통과하고 광탈한 글ㅇㅇ
아카리 나름대론 잘 썼다고 생각했는데 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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