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야! 내가 또 광탈했다! <네버랜드의 여름>
2012.11.17 18:54
늦은 밤의 도로는 어둡다. 해가 저물어버린 지는 이미 오래 전의 일이라 도로에 깔린 어둠의 명도는 짙었다. 시골길에 가로등을 보기란 쉽지 않은 일이어서 물빛 커튼같이 비추는 달빛을 이정표 삼아 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가끔 가로등이 보이면 나만 반가웠던 것이 아닌지 벌레들이 앞 다투어 자리를 차지하려는 것이 보인다. 한적한 포장도로를 주행하고 있노라면, 자동차의 구동이 전부인 것처럼 느껴지지만, 유리창 밖으로 귀를 기울이면 들려오는 곤충들의 울음소리가 여기가 귀성 길이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해주었다. 또 에어컨의 먼지 뒤섞인 냉기가 아니라 열린 창으로 불어오는 녹음의 숨소리가─어렴풋이 기억나는─조금 오래된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것 같았다. 오래되었다, 고 해봤자 십년을 조금 넘은 정도지만 무감각한 도시에서 어릴 적의 향수를 떠올리는 건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던 것인지 의도적으로 기억을 지워버린 탓에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조금 기억나는 것도 동네 애들과 피웠던 괘나 악질적인 장난 정도로 내가 부모님을 따라 이곳을 떠난 뒤 얼마 되지 않아 고향을 떠났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지금에 와서야 추억을 맞춰볼 친구 하나 남아있지 않다는 사실에 조금 씁쓸함이 입에 남는다. 변변찮은 추억 하나 떠올리지 못한 채 무심하게 액셀을 밟고 있는 동안 꽤나 오래만인 것 같은─익숙한─인공 불빛이 보였다. 언제나 그랬듯 벌레들이 앞 다투어 불빛에 몸을 내던지는 것이 보였고 빛이 닿은 범위 안쪽으로는 풀잎 본연의 상쾌함이 내비췄다. 본래의 비색을 밤기운으로부터 지켜내는 인공의 불빛이라는 언밸런스함에 시선을 빼앗기면서도 도로 한 가운데의 바리게이트를 알아채고 오른발을 지그시 밟은 것은 인공 따위에 지지 않겠다는 달님의 의지이거나 아님 묵묵히 제 할 일을 다 하는 헤드라이트의 성실함 덕택일 것이다. 미리 준비를 하고 있었음에도 잠시 공중에 붕 뜬 기분이 드는 것은 운동 상태를 유지하려는 관성의 탓이겠지만 늦은 밤 꽤나 오랜만인 것 같은─거기다 고향의─사람을 만난 것에 대한 반가움 때문이지 싶다. 하지만 도로의 한가운데 막고 서 있는 행동은 역시나 위험하기 때문에 나이 드신 어르신이든 건장한 체격의 형님이든 어떻게 해서든 주의를 주려고 했지만 멈춰 선 차량을 향해 저돌적으로 돌진해오는 것을 보고나서야 뭔가 상황이 급박하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가로등의 불빛에 조금씩 가까워짐에 따라 뭐가 튀어나올지 모르는 블랙박스가 거름종이로 만든 육면체가 되어갔다.
탁, 하고 나방이 가로등의 불빛에 몸을 던진 것 같은 소리가 났다. 아니, 어쩌면 박차를 가한 발걸음이 내는 소리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배경 속으로 사라져갈 탁음을 신경 쓸 겨를은 없었다.
잠시, 아주 잠시 동안 비가 내린 것 같다. 물방울은 뺨을 어루만지듯 스쳐 지나갔고 내 눈은 귀부인의 치맛자락처럼 퍼지는 머리칼의 끝을 좇고 있었다. 마치 그 순간만 따로 떼어내 시계태엽을 느리게 감은 것 같았다.
눈이 마주쳤을 때, 달빛이 비추다 막혀버린 듯 했다. 막혀버린 달빛이 그대로 뺨을 타고 흘러내릴 것 같이 그 눈가에는 아직 채 마르지 않은 눈물자국이 남아 있었다. 심하게 흔들리는 그 눈동자는 무언가를 강하게 요구하고 있는 듯 했으나 너무 거세 멈춰버릴 것 같은 헐떡임밖에 들리지 않았다. 소녀는 땀에 젖어 얼굴에 덕지덕지 붙은 머리카락을 정리할 겨를도 없이 그저 숨을 토해내는 게 고작이었다. 말라 버린 목구멍이 괴로운 것인지, 달려온 탓에 폐에 공기가 부족했던 것인지 소녀의 손은 가슴께에 머물러 있었다.
“…아파, 아파요……. 도와…주세…요.”
도움을 가장한 고통의 호소는 연신 내쉬는 숨소리에 지워지고 있었다. 지워진 음성이 미약하게나마 계속되었기에 그것이 나의 손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알아채기에는 얼마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거름종이처럼 투명해서─메마른 성대를 뚫고─기립박수를 치기 전의 클래식의 종막처럼 끊어져버릴 소녀의 모습이 한 순간 보였다. 물가에 내놓은 아이를 발견한 것처럼 손쉽게 손을
내주어야 할 상황이건만, 나는 손을 내밀지도, 괜찮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물을 그 흔한 안부조차 묻지 않았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누구에게 미루지도, 못 본 체 할 수도 없이 나는 그저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조치를 취하지도 소녀를 일으키지도 못한 채 그렇다고 방관하지도 못한 상태로 나는 내 발목을 잡은 긴장과 달님의 시선을 의식하고 있는 양심에 붙잡혀 있을 수박에 없었다.
그 상황에서는 당연 소녀를 차에 태우고 왔던 길을 최대 속력으로 되돌아가야 하건만, 왜인지 그 상황에 무슨 자격이라도 필요하단 것처럼 나는 멍하니 허가가 내려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내 문제도 해결하지 못해 도망쳐온 나 자신이 어떻게, 라는 생각이 나의 사고를 막고 있었다. 옛날 흑백영화의 스크린처럼 내 낡고 전혀 새롭지 않은 인생의 파노라마가 흐르고 있었다. 어릴 때 피웠던 꽤나 악질적인 장난, 도시 상경의 순간, 처음의 그 설렘은 간 데 없는 무미건조한 일상, 힘겨웠던 입시, 그리고……, 마주한 벽.
끝내 망막에 새겨진 것은 파노라마의 끝자락. 소음을 내던 영사기가 작동을 멈춘 듯 마지막의 검은 필름이 벽처럼 느껴졌다. 내 인생은 이걸로 끝.
몇 번을 돌려보아도 인상 깊은 장면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B급 영화에 불과했다.
이 소녀를 구하는 것은 분명 가시덤불을 헤치고 용을 물리친 멋진 영웅이나 할 수 있는 그런 대단한 일이라고, 무력한 나는 할 수 없는 일이라고 나는 내 자신에게 말하고 있었다.
.
……야옹, 하고 고양이의 울음소리가 났다.
자괴감과 죄책감이 들린 속눈썹을 힘겹게 들어 올리자 그곳엔─귀가 접힌─토끼 인형이 있었다. 봉제 자국이 선명하게 보이며 여기 저기 수선한 자국이 엿보이는 꽤 오래 된 그리고 지저분한 인형이었다.
“뭐…하는 거야?” 미안함과 터져 나올 것 같은 눈물을 애써 참으려 최대한 웃어보였다. 그런 것치고는 꽤 잘 참아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와아, 이제 조금 볼 만 하네요.”
씩, 하고 웃어 보인 소녀는 운 좋게 소낙비를 맞은 것처럼 온몸이 땀으로 젖어 있었다. 물기를 머금어 뭉친 머리카락 사이로 소녀의 환한 이마가 드러나 있었다. 흐르던 땀은 바람이 닦아 주었는지 흘렀다는 자국만 남은 강물처럼 이제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얼굴에 묻은 머리카락은 그대로여서 꽤나 어른스럽게 비꼬았다고 자부하고 있다는 저 자신만만한 표정에서는 본래의 의도대로여야 할 진지함보다는 아직 미숙한 어린이의 귀여움이 엿보였다.
“너도 그 얼굴에 붙은 머리카락만 정리한다면 좀 더 볼만해지겠는데.” 감정을 숨기려 급히 꺼낸 말이어서 조금 어른답지 못하는 대응이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소녀는 그 역시 그저 씩하고 웃어보였다. 거기에 좀 전에 보았던 미숙한 어린이는 없었다. 대신 포용력 있고 관대함을 갖춘 여성이 있었다. 처음 보았을 때 느꼈던 연약함은 간데없고 소녀의 예쁜 얼굴은 노 프라블럼no problem이라는 듯 연신 눈을 깜빡였다,
분명 소녀는 나를 안심시키려 하고 있는 듯했다. 갖은 이유를 대며 도움의 손길을 내밀지 않았던 나와는 다르게 소녀는 주저 없이 나에게 도움의 손을 내밀어준 것이다.
너무 고마워서, 나는 잠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뜻밖의 배려에, 밀려오는 미안함에─나에게 그럴 자격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용기를 내어 소녀를 에스코트 하리라 마음먹었다.
“어디까지 가시나요, 아가씨?”
소녀는 눈을 땡그랗게 뜨더니 이제야 정신을 차렸군, 이라는 듯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으며, 도전을 받아들였다.
“어머, 저희 할머니께서 낯선 사람 차에는 타지 말라고 하셨어요.”
무대 위의 여배우처럼 멋지게 소녀는 두 팔로─정말로 무섭다는─과장되게 몸을 끌어안으며 뒷걸음질을 쳤다(실제로 말이다). 그 모습은 흡사 가정교육을 잘 받은 어딘가의 아가씨의 소양이었으나 귀를 접는다고 토끼가 고양이가 되지 않듯 재미있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이 소녀가 한 순간에 요조숙녀가 될 수는 없는 법이었다. 짙게 어둠이 깔린 무대에 풀벌레들의 소리를 배경음으로 깐 것치고는 꽤나 재미있는 상황이어서 나도 모르게 텐션이 올랐는지도 모른다. “그래? 그렇게 조심성 있으신 분께서 아까는 왜 연신 도와 달라……”
아차, 하고 뒤늦게 말을 삼켰으나 괴로움을 호소하며 도움을 청하던 소녀의 모습이 기억에서 잊히지 않듯 경솔하게 내뱉은 말 역시 사라지지 않는다.
역시나 그것은 소녀의 레드 라인을 넘어서는 것인지 소녀의 얼굴에서 재미있다는 미소가 서서히 사라져갔다. 종국엔 둘 다 아무 말 없이 차에 올라타게 되는 형태로 동행하게 되었다. 시동을 걸고 백미러를 확인했다. 자동차의 구동 음이 유독 크게 들리는 것 같았다. 어색한 침묵을 깨려 일부러 “출발한다.”같은 소리를 했지만 역시 대답은 없었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솟았을까……액셀 위에 두었던 오른 발에 힘이 들어갔다. 곧바로 정지 상태를 유지하던 관성 때문에 몸이 급하게 뒤로 쏠렸다. 옆쪽에서 꺅!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운전을 해야 했기에 옆을 돌아보지는 않았지만 소리만으로 추정하건대 꽤나 좋은 반응이었을 것이다. 포장도로가 거의 끝나가기 때문일까, 이곳이 시골이라 그런 것일까 타이어에 자갈이 밟히는 소리가 난다. 꽤나 자주 있는 일이라 뭔가 아마추어의 연주소리 같은 인상이 강했다.
“……지금 어디로 가는 거예요?” 아직 화가 풀리지 않았는지 옆에서 퉁명스러운 볼멘소리가 들려왔다. 슬쩍, 눈동자를 굴려보니 소녀는 이쪽을 보지도 않은 채 묵묵히 창밖을 향해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하지만 먼저 말을 걸어주었다는 점에서 아까도 보았던 소녀의 관대함이 엿보였다. 어쩌면 좀 전의 깜짝쇼의 효과가 발휘한 것인지도 모르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기분 좋은 일이었다.
“네버랜드로 간단다.” 재치 있는 답변이었기에 조금 자신이 있었다. 소녀는 흘낏 이쪽을 보고는 나와 눈이 마주쳤다는 걸 알아차린 뒤 황급히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럼 아저씨는 피터 팬이겠네요.” 흠, 하고 소녀는 내 쪽으로 몸을 돌렸다. 아무래도 화가 풀린 모양이었다. 소녀의 훤히 드러난 어깨를 잡고 있는 어깨끈이 중력 탓에 조금 흘러내렸다. 다분히 의도적으로 아마 아까의 나의 실언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는 듯 했다. 그래봤자 중학생 정도로 되어 보이는 어린 여자애의 몸 따위 관심이 없…지만은 않지만 그래도 신경이 쓰인다는 건 부인할 수 없었다. 나이에 맞지 않게 능글맞은 눈빛으로 나의 반응을 찬찬히 살펴보면서 소녀는 재미있다는 듯 깔깔 웃어 댔다. “순수함을 조금 되찾는 건 어때요? 피터 팬?” 화악, 하고 얼굴이 달아올랐다. 생각보다 더 고단수였다.
“그래, 내 이름은 피터 배닝이란다.” 몸을 앞으로 숙이며 운전에 집중하려는 것은 사실 붉어진 내 얼굴을 감추려는 시도에 불과했다. 슬쩍 옆쪽을 쳐다보니 소녀는 목덜미 부근에서 끊어진 머리카락을 배배 꼬며 신선한 반응이라는 듯이 쳐다보았다. “그거 <후크>라는 영화 주인공이었죠? 그럼 전 줄리아 로버츠겠네요.” 꽤나 의외의 대답이었다. 어린 여자애가 알기에 조금 오래된 영화였기 때문에 나는 눈동자를 동그랗게 뜨고 소녀를 바라보았다. 운전에 집중하라는 뜻인지 소녀는 무심한 표정으로 손가락으로 앞을 가리켰다. 아차, 싶어 다시 시선을 돌렸지만 사고가 날 리 없는 일자 도로에 역시나 차량은 한 대도 보이지 않았다. “왜 팅커벨이야? 웬디가 아니라.” “그 영화에서 웬디는 이미 할머니잖아요. 저는 이렇게 귀여운 여자애인걸요.” 관대함이 아니라 뻔뻔함까지 갖춘 걸로 보아 이 요조숙녀께서는 생각보다 어른이었던 모양이다(물론 귀엽지 않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몸으로 유혹하는 팅커벨은 들어 본 적이 없는데?”실수를 하지 않게 조심하면서 조금 짓궂게 말하기로 했다. 소녀는 항의하듯 얼굴을 붉히고서 뭔가를 말하려다 영화에 나오는 악당─후크선장보다 더 악질─처럼 비열하게 웃더니 마지막 직격타를 날렸다.
“팅커벨을 보고 얼굴을 붉히는 피터 팬 따위 저도 들어본 적 없어요.”
……완벽한 나의 완패였다.
어느새 풀벌레가 울고 있었다. 완벽하게 어둠에 물들었기 때문인지 달빛은 아까보다 조금 더 밝았다. 자동차의 헤드라이트가 필요 없을 정도로 몇 겹으로 달빛이 터번처럼 흘러내렸다. 어깨에 뭔가 무게감이 실려 왔기에 돌아보니 소녀는 어느새 잠이 들어 있었다. 물어보고 싶은 것은 잔뜩 있었지만 묻지 않기로 다짐하며, 조심스럽게 얼굴에 뭍은 머리카락을 손끝으로 정리해주고서 나서야 다시 운전대를 잡았다. 목적지까지 이제 조금이었다.
히히히히히ㅣㅎ
난 라노베에 소질이 없나봐 ㅋㅋ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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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주인공시점이 학생이 아니라 요즘 라노베는 무린가... 그럼 고전 라노베.
근데 여자애 차로 달려올때랑 탈때 사이에 먼일 있던 거임? 아님 원래 알던 사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