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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갈 데가 없다

만듦

지랄병

2013.07.17 15:31

Winial 조회 수:933

지랄은 병의 이름이다.

인터넷 국어 사전으로 찾아보면 지랄이라는 건 '마구 법석을 떨며 분별없이 하는 행동을 속되게 이르는 말'이라는데, 같은 말로 제시하는 게 '지랄병'이고, 이건 간질을 속되게 이르는 말이라고 한다. '지'라는 글자가 들어간 걸로 봐서는 땅의 기운이 올라오는 것과 뭔가 관련이 있을까 싶기도 한데, 모르겠다. 이런 걸 고민하게 될 줄 알았으면 한자를 좀 더 열심히 공부할 걸 그랬다. 한자가 한국말이나 다름없다면 속어의 어원으로 한자가 나와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예 한자를 가르치면서 이 한자에서 이런 속어가 나왔다고 가르쳐주는 거다. 그런 식으로 가르친다면 분명 한자는 글자가 아니라 그림으로 보인다고 툴툴대는 나 같은 사람이라도 재밌게 배우고 이해했을 것이다.

하지만 고등학교와 중학교의 선생님은 대학교 교수 보다 엄하고 고지식한 사람들이다. 수업 중 무분별한 속어 사용이라니, 아니, 에초에 속어를 사용한다는 것부터 용납하지 못할 것이다. 대학 교수보다 선생님을 낮게 평가하는 입장에서는 코웃음이 나온다. 나보다 나이가 많은 선생들이야 화가 나겠지만, 어쩔 수 없지 않은가. 난 이제 교문 구석에서 몰래 담배를 피우며 선생님에게 걸려 혼나지 않을까 마음을 졸이는 나이가 아니다. 나와 같이 교복을 입고 고등학교를 다녔을 녀석들이 선생님이 될 거라면서 막걸리에 소주를 말아 마시고 주정을 부린다. 저런 게 선생님이 될 거라는 걸 알면, 그리고 진짜 교직과정 이수를 성공적으로 마쳤다는 말을 들으면, 나는 선생님이라는 위치를 비웃을 수밖에 없다.

이야기가 어딘가 잘못된 곳으로 새었지만 결국 하고싶은 말은 지랄이 병의 이름이라는 것이다. 그게 속어인 것과 관련없이 그 병이 없는 사람이 그런 말을 들어야 할 이유는 전혀 없다. 그렇다면 지랄병이 없는 내가 뜬금없이 지랄이라는 말을 들은 이유는 무엇인가. 나는 책상 앞에 앉아 휴대전화를 붙잡고 일이 이 지경까지 온 이유를 고민하고 있는 것이었다.


모든 문제의 원인을 제쳐놓고 '나는 잘못하지 않았다.' '나는 잘못이 없다.'라고 소리치는 부류는 아니라 스스로를 평가한다. 만약 내가 그런 사람이었다면 나는 진작에 주변 사람들에게 내 수험생활이 망한 이유는 갑작스런 사고로 고모부의 장례식을 일주일간 치뤘기 때문이라고 떠벌렸을 것이다. 혹은 갑자기 심각하게 나빠진 집안 사정 때문에 한달 정도 수험 공부를 핑계로 학교에 나가지 않고 아르바이트 생활을 했기 때문이라 둘러댈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변명하지 않았다. 그런 변명없이 나는 그렇게 잘난척 하고 그렇게 유난을 떨었으면서 겨우 그런 성적을 받았냐는 비웃음을 조용히 받아들였다.

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정도면 타당하다 할만한 변명을 손쉽게 변명으로 내놓는 사람이 아니다. 그것은 내가 그런 구차한 변명을 하는 것에 멋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어떠한 상황에 처하더라도 멋은 중요하다. 힙합 문화를 동경하는 사람들에게 중요한 그 멋, 속된 말로 '간지'라 부르는 그것은, 설령 땅에 떨어진 물건을 줍게 되더라도 그 행동이 쪼잔하고 찌질해 보여서는 안 된다는 간단한 원칙으로 이루어진 삶의 태도이자 행동 방식이다.

물론 선천적인 겉모양새가 이미 나빠서 어떤 식으로 행동해도 꼴이 사납다는 한계는 존재하겠지만, 단호한 마음가짐은 행동으로도 보여진다고 누군가 말하지 않았던가. 아니던가. 이게 내 말이라도 상관 없다. 내 말이라도 저건 분명 다수의 사람에게 멋진 말이라고 인정받을만 하다 생각한다. 다만 오늘 이 날까지 벌어진 사건들 속에 정말로 내가 잘못한 게 있었는가, 오직 나만 잘못한 사람이었는가를 따져보면, 결론은 계속해서 꼭 그렇지만은 않을 것이라는 대답이 나오게 되니, 나는 멋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나와 진실을 밝히려는 나 사이에서 갈등을 느끼며 의미없는 말싸움을 계속하게 된다.

중요한 사실이 있다. 정중한 거절에도 불구하고 그가 계속해서 연락처를 묻거나 호의를 표시하는 건 내 잘못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친구가 밝게 웃으며 소개한 사람에게 차갑게 대하는 건 도저히 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친구에게 '계집애 뭘 그런 걸 신경쓰니?' 같은 살가운 말투를 꺼내기에는 내가 그녀에게 평소에 보여온 행동도 말투도 전혀 살갑지 않았다.

우정이 깊다는 것이 서로 허울이 없다는 것과 동일시 되는 건 어디나 마찬가지라지만, 왠지 그것이 한국에서는 서로에게 지나치게 대해도 문제가 없다는 식으로 받아들여져 나는 언제나 조금 기분이 나빴다. 소중한 사람에게 마구 잡이로 다뤄지는 건 아무래도 기분이 나쁜 일이다. 그렇다고 그렇게 행동하지 않으면 내 소중한 친구는 내가 너를 친한 사이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의미라고 결론짓는 것이다. 이미 실패를 경험한 입장에서는 과거의 가시돋힌 조언을 따라 행동하고, 그 결과가 만족스럽게 나오는 걸 고통스러워 하면서도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결과가 세상에서 사라지는 방식으로 관계를 끝장내는 것이라면, 결국 나는 또 다시 무언가를 잘못해서 관계에 실패했다는 것이 된다. 하지만 이건 나의 방식이 아니다. 누군가 나에게 진심없이 한 조언을 따라한 것 뿐이다. 내가 잘못되길 바라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특별한 비밀을 알려준 것도 아닌 무미 건조한 조언을 따라한 게 전부였다. 그렇다면 그런 무미건조한 질문을 생각없이 따른 내 잘못인 게 아닐까. 멋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나도 진실을 밝히려고 하는 나도 둘 다 같은 결론을 내리고 나를 쳐다본다. 나는 그렇다고 대답하고 고개를 숙여야 한다.


다시, 굳이 다시라고 할 이유가 있는가 싶지만, 다시 지랄병의 이야기로 돌아가면, 이것의 시작은 내 잘못이 맞다. 술 주정처럼 지껄인 '헤어진 뒤에도 친구로 남자.'라는 헛소리라도 그라면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일 거라는 걸, 그는 그런 사람이라는 걸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내가 몰랐던 건 그가 나와 조용히 앉아서 대화하다 몸을 섞고 쾌락을 느끼는 것 보다 일반적인 연인의 추억을 더 쌓고 싶어했다는 거였다. 2년이나 사귀었으면 헤어질만 하지 않느냐는 말은 아무래도 좀 심했다고 생각하긴 하지만, 그런 말이 무색하게 그는 정말로 내 친구로 남아줬다. 브로콜리 너마저의 노랫말처럼 '아니, 그런 일은 없을 거야.'라고 대답하지 않았던 이유가 헤어진 뒤에야 밝혀진 거다. 그러나 나는 그런 행동을 좋다고 괜찮다고 용인했다. 이게 내 잘못이 아니라고 한다면 그건 정말로 멋 없는 행동이다.

문제는 그가 특이한 성격에 비해 일반적인 추억을 쌓고 싶어하는 일반적인 사람이었다는 걸 내가 까먹었다는 것이다. 그는 나와 어색한 친구 사이가 아닌 너무나도 친해서 아무렇지도 않고 편한 사람이 되었다. 사랑의 반대가 무관심이라는 말을 비웃던 나의 뒷통수를 때리는 거 같았다. 연락을 주고 받는 걸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고, 애인이 생겼다는 자랑을 너무나 즐겁게 하고, 욕설이 섞인 대화를 평범하게 생각하고, 바뀐 번호를 당연하다는듯이 알려주고, 내가 한 때 연인이었다는 걸 전혀 신경쓰지 않는 태도에는 차라리 연락을 끊는 게 낫지 않은가 싶은 잔인함이 깊게 배어있었다.

그런데도 나는 그게 좋다고, 그렇게라도 대화하는 게 좋아서 그와 만난 날짜 수 보다 헤어진 날짜 수가 조금 더 많아질 때 까지 계속해서 대화를 시도했다. 문자를 주고 받고 제대로 대답 받지 못하는 상담을 요청했다. 전 애인과 이런 식으로 대화하는 게 괜찮은 걸까 같이 고민해주던 친구가 세상에서 사라져 버린 날, 나는 전 애인에게 관계가 사라졌다 말하고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건 지랄병에 걸려서 하는 말이었을까. 나는 지랄을 한 것일까. 이런 행동은 내가 아닌 남에게 민폐를 끼치는 지랄이었던 걸까. 언제부터 그런 걸 따졌다고, 빌어먹을 녀석들은 갑자기 나의 행동에 심지가 다 타붙은 화약마냥 터져나갔다. 나는 내가 터질까봐 불길이 주변에 어슬렁 거리는 걸 보고 심지를 뽑아 버렸는데. 그건 상상한 것 보다 아픈 일이었는데. 이런 식으로 감상적인 이야기를 하니 아까 전 까지 싸우던 녀석들이 서로 작당해서 나를 비웃는다. 저리 꺼지라고 소리를 치니 무서워하는 기색도 없이 원래 그 자리에 없었다는 듯이 사라진다.

내가 지랄병에 걸렸다면, 그건 누군가가 나를 지랄병에 걸렸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사람은 말을 듣는 것 만으로도 병에 걸릴 수 있다. 그래서 아직까지도 미신적인 저주가 횡횡하는 것이다. 나는 그런 식으로 고민을 끝내고 휴대전화를 창문 밖으로 집어 던졌다. 휴대전화는 방충망도 뚫지 못하고 창틀에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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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소설회랑이라는 이름이 너무 멋있어서 거기에 올릴 글을 한 세 개 정도 궁리하다가, 어제 갑자기 쓴 이 글을 올리려고 보니 너무 무거운 것 같아서 어떤 분의 조언에 따라 1차적인 나갈없 검증을 받는다는 기분으로 여기에 올립니다. 뜬금없이 인생의 무게감을 느끼게 만드려고 수작부리는 내용이라 죄송합니다.

혹시나 해서 말하자면 소설 맞습니다. 이걸 보고 일기 썼냐는 말이 나오면 어느정도 성공한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글 쓰는 법을 가르치는 분들이 일기를 쓰지 말라는 말을 많이 하지만 어떤 글을 일기라고 생각하게 된다는 건 사실 엄청 잘 쓰여진 1인칭 소설이라는 거 아닐까요. 그 분들의 기준대로라면 말이죠.
실제로 그 분들이 내 글을 보고 솔직하게 감탄하지 못한 이유는 1) 가르치려는 것에 어긋나서 2) 문창과 학생이 아니라서 3) 다른 학생들과 동등하게 대해야 하기 때문이라는 자신감이 충만합니다. 자만이겠지만.

이번 이야기에서 글을 끝까지 읽은 여러분들이 배워야할 교훈은, 문창과에 가봤자 경소설을 배울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문창과는 아니지만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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