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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갈 데가 없다

만듦

잡다한거의 전설

2013.08.23 06:41

뀨뀨함폭 조회 수:818

대학 입시에서 실패했으며, 재수조차 실패하고, 심지어 삼수까지 실패하여 "에라, 모르겠다. 요도협착 수술 했으니 공익 주겠지. 공익부터 끝마치고 보자" 하며 도전했던 병무청 신체검사에선 3급 현역을 받았고, 기껏 2년 구르고 전역하니 수험 준비하던 삼년동안 배운 게 죄다 포맷돼서 더이상 대학 갈 엄두가 안 났고, 지푸라기라도 짚는 심정으로 뛰어든 취업 전선에서마저 실패한 이 시대의 낙오자 A는 더이상 갈 데가 없었다. 

"이대로라면 정말, 그냥 마포대교라도 가서 뛰어내리는 게 나을 지도 몰라."

그는 평소 하던 대로 PC방 구석에 쳐박혀 딸깍딸깍 웹 서핑질이나 하고 있었다. 더이상 부모님 뵙기도 곤란하다. 아니, 뵐 낯이 없다. 이런 인생이, 이런 추레한 모습이 쪽팔려서, 부모 형제는 물론이고 도원결의를 맹세했던 절친했던 친구들조차 이젠 만날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한마디로 사회적 실패와 낙오의 총집합체라 할 수 있는 A를 반겨주는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시간당 삼백원, 이곳 단골 피시방 외엔 갈 데가 없다.

"어디든지 좋으니 다른 갈 데가 있으면 좋겠어... 피시방 생활도 이젠 답답하다고...."

사람들은 웹 서핑을 하다가 심심해지면 '할게없다' 라든가, '심심하다' 라든가, 혹은 무언가를 하려다가 까먹었을때 '뭐하려고했지' 등등, 이런 의미없는 문장들을 네이버에 검색하고는 한다. 답변을 기대하는 무의식적인 행동. 그리고 자신과 같은 시도를 한 다른 멍청이들을 보며, 혼자가 아니라는 위안을 얻는 것이다. A도 모니터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무심결에 그런 행동을 했다.

'갈데가없다' 라고 검색했다.
딸깍─

그저 '갈 데가 없다'라는 문장이 포함되어 있을 뿐인 쓰잘데기 없는 블로그 포스트들만 쏟아지겠지, 라고 A는 생각했다. 그러나 ─ "응? 이 사이트는...?"

나는 갈 데가 없다

"뭐야, 이건. 자살 사이트인가? 따, 딱히 궁금하지는 않지만, 사이트 이름에서 묘한 마력이 느껴지니 한번 들어가볼까?" A는 그곳에 들어갔다.

사이트에 접속하니 일단 눈에 띄는 건, 피시방의 구식 1024*768 해상도 모니터의 절반을 차지하는 무지막지한 사이즈(1024*300 ㅎㄷㄷ)의 상단 타이틀이었다. 타이틀에 그려져 있는 건 남국 아마존의 요염한 기운을 풍기는 정체불명의 청발 소녀. 그리고 그 옆엔 '내가 갈 데가 없는 건 아무리 생각해봐도 너희가 나빠' 라는 의미불명 문구. 뭐라고 해야할까. 일단 A는 그 불가사의함에 압도됐다. 거대한 타이틀의 형상과 그곳에 새겨진 모든 상징과 기호가 전부 불가사의했다. 남태평양의 이스터 섬에 상륙하여 모아이 석상을 처음 목격한 유럽인 선원들의 심정이 아마 이랬을 터이다. '대체 이 거대하고, 의미를 알 수 없는 조형물을, 누가, 왜, 무슨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만든 것인가?' A는 모종의 우주적 공포마저 느꼈다.

A는 침착하고 사이트를 둘러봤다. 그곳은 애니메이션 동호회였다. 보통의 일반인이었다면 이곳이 2차원 오타쿠들을 위한 공간이라는 사실을 알아채자 마자, 마치 더러운 것에 신경쓰다가 아까운 시간을 빼앗겼다는 마냥 브라우저를 종료했겠지만, 사실 A는 고등학교 시절 일본 애니메이션에 심취했었기 때문에 이런 것에 별다른 거부감이 없었다.

"우와, 이 애니메이션 오랜만인데? 어? 「현시연」 후속작이 나왔다구? 입시 한창 준비할때 보던 건데!"

마치 고향에 온 기분. 이것이 말로만 듣던 덕후의 회귀본능이란 말인가. A는 고대로부터 전해지는 '휴덕은 있으나 탈덕은 없다'라는 오타쿠들의 옛 격언을 떠올리며 미소지었다. 또한 내심 놀라기도 했다. 사이트에 올라오는 글이 전체적으로 꽤나 양질이라 세줄 이하 잡담, 인강 강사 홍보, 휴지쪼가리나 진배없는 각종 뻘글들은 거의 없고, 대부분이 장문의 감상문과 분석글 혹은 유용한 정보들이었던 것이다. 대한민국 오타쿠 팬덤에 이런 커뮤니티가 아직도 있었다니... 게다가 반말을 사용하는 자유분방한 분위기, 회원들의 빵 터지는 드립력은 그를 순식간에 매료시켰다.

A는 오랜만에 불타 올랐다. "좋아, 갈 곳이 생겼어! 현실에서 갈 데가 없다면, 온라인에서 씹덕질이나 간만에 거하게 해보자구!" 그는 먼저 '잡다한거'라는 게시판에 가입인사를 힘차게 남겼다. 상당히 인기있는 사이트인 듯, A뿐만 아니라 많은 뉴비들이 거기에 가입인사 글을 쓰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뉴비입니다. 네이버 검색하다가 들어왔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글을 쓰자마자 즉각 수 개의 댓글이 달렸다. 기존 회원들의 반가운 환영 인사였다.

"이 가족같은 분위기! 이 곳에서라면, 분명, 뭔가 할 수 있을 거란 기분이 들어!"

그리고 오랜만에 자신감을 되찾은 그는 며칠동안 애니를 보고 댓글을 달고 톡톡에 잡담을 쓰다가, 기적적으로 대기업 공채에 합격했다는 통보를 받고 곧바로 리얼충이 되어 나갈없이라는 커뮤니티를 영원히 잊어버렸다. 끝



** 이 이야기는 잡다한거에 가입인사를 남긴 뉴비는 1주일 안에 실종된다는 오랜 전설과 나갈없의 높은 취업률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픽션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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