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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갈 데가 없다

만듦

얀데레는 모에요소다

2014.03.05 19:58

Winial 조회 수:917

얀데레는 모에요소다.

이야기를 시작하는 첫 문장을 비교적 일반적인 생활을 하며 일반적인 취향을 지닌 사람들이 절대 못 알아들을 단어로 점철한다는 건 그리 쉬운 선택은 아니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나는 이 이야기를 시작하는데 이보다 더 적절한 문장을 만들어낼 수 없었다. 이 사실은 나를 절망하게 했지만, 그건 아무래도 좋은 거니까 넘어가자.

어쨌든, 얀데레라는 건 오타쿠 여러분의 노력 덕분에 굉장히 괜찮은 모에요소가 되었다. 미저리를 보고 이 개념을 처음 배운 사람이라던가 실제로 집착이 심한 사랑에 시달려 본 사람이라면 어이가 없겠으나, 어차피 모에라는 건 현실을 잊기 위해 존재하는 거다. 더럽고 허점투성이인 현실을 인간 특유의 상상력으로 조금 아름답게 만드는 게 뭐가 나쁘단 말인가.
나 역시 한때는 나만을 사랑하는 누군가를 바랐던 적이 있고, 가사이 유노는 아직도 내가 좋아하는 캐릭터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미친년이니, 내가 얀데레를 실제로 바라는 인간의 마음을 무시한다거나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털어놓는 일은 일어날 수 없다. 물론 현실의 인간이 그림 속의 그것만큼 무진장 예쁘거나 영혼 없이 사랑만 가득 찬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일은 벌어지지 않겠지만, 무슨 상관인가. 나는 얀데레를 사랑한다. 그리고 이런 사랑 앞에 당당하다.

이런 주장을 펼치던 내가 미워질 날이 올 줄은 몰랐지만 말이다.

나에게 '연인에 무한히 가깝지만,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연인을 위하여 우선 연인이라는 단어는 보류한 관계'였던 그녀는 그 날 밤의 경험을 통해 완전한 연인이 되었다. 그녀는 내가 동물적인 행위로 큰 기쁨을 얻을 수 있다는 걸 알려줬다. 마치 처음 그녀를 만나던 날 내가 얻었던 깨달음을 다시 한 번 얻은 것 같아서 나 역시 너무나 행복했다. 문제는, 그녀가 도통 나에게서 떨어지려고 하지 않는 것이었다.

"자기, 배 안 고파?"
"안 고파"
"할 일은 없어?"
"없어. 지난주에 다 끝냈어."
"화장실 가고 싶지 않아?"
"지금은 생각 없는데."
"그럼 나중에 급해지면 갈 거야?"
"응. 자기랑 같이 가서 쌀 거야."
"대체 볼 일을 이런 자세로 어떻게 보겠다는 건데!"

인터넷에서 연인들의 첫 경험 후 제일 좋은 행동이 연인을 끌어안는 거라는 걸 본지라 처음 그녀가 날 끌어안을 땐 당연한 거라 생각했다. 그녀가 뒷정리할 생각이 전혀 안 보일 때에도 연인 사이고 같이 사는 집이니까 나중에 치우겠거니 하고 넘어갔다. 그녀가 '앞으로 절대 안 떨어질 거야.' 같은 말을 할 땐 무슨 말이든 직설적으로 내뱉는 여자니까 진짜로 안 떨어질지도 모르겠다 싶기는 했지만, 그건 내가 생각하고도 헛웃음밖에 안 나오는 농담 같은 거였다. 나는 동물적인 쾌락 때문에 이 여자가 얼마나 상식 밖의 사람인가를 깜빡하고 있었다.
하루 정도는 어떻게든 버텨냈다. 그녀나 나나 체력 소모 때문에 꽤 지쳤었고, 둘 다 잠이 많은 덕분에 반나절 정도는 나무늘보처럼 축 늘어져서 보낼 수 있었다. 내가 뭔가 일이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걸 느낀 건 그녀가 나의 생리적 욕구마저 제대로 허락하지 않는 순간부터였다. 잠에서 깬 나를 붙잡는 그녀의 손바닥에는 힘이 잔뜩 실려있었다.

"나 목말라. 사람은 물을 안 마시면 사흘밖에 못 산데. 알고 있었어?"
"목마르면 부엌 가서 마셔."
"그러니까 대체 이 자세로 어떻게 부엌을 가냐고. 움직일 수가 없잖아."
"자, 내가 다리를 이렇게 올릴게. 그리고 네가 여기를 잡고 들어서…."
"아니야, 됐어. 그냥 자자."
"왜, 목마르다면서?"
"안 말라. 안 마르니까 그냥 자자."
"아까 말했지만 자는 사이에 떨어질 생각이면…."
"아니야. 안 떨어져. 무서워서 못 떨어져. 알겠지? 그러니까 우선 자자. 자는 게 좋겠어."

그녀와 나는 서로 얼굴을 마주 보는 방향으로 살을 맞대고 있었다. 이런 자세로 평소처럼 움직인다는 건 불가능했다. 내 안락한 방으로 돌아가 밀린 만화영화를 보고 싶다는 욕구가 슬금슬금 올라오는 것도 문제였지만, 역시 생리적인 욕구가 더 컸다. 나는 몸을 씻고 싶었고, 무언가를 먹고 싶었고, 물을 마시고 싶었고, 무엇보다 화장실이 가고 싶었다.
그녀가 너무 무거워서 들고 가는 게 불가능하거나 그런 건 아니었지만, 가능하다고 해서 꼭 해야만 하는 건 아니었다. 나는 연인 앞에서 배설물을 질질 흘리는 걸 괜찮다고 생각할 정도로 변태가 아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런 변태가 되지 않을 자신이 있다.

이즈음에서 이야기 읽고 있는 익명의 누군가는 간단한 의문이 생길 것이다. 대체 이 인간은 이 글을 어떻게 쓴 것인가? 아직도 그 여자와 몸을 밀착한 채로 지난번처럼 자신의 탈출을 기도해달라고 하는 건가? 아니면 여자가 잠든 사이에 몰래 빠져나와 불안에 떠는 중인가?
만약 이 둘 중에 하나를 예상했다면, 아쉽게도 둘 다 정답이 아니다. 나는 그녀가 보는 앞에서 그녀의 험담에 가까운 이야기를 적는다거나, 잠든 사이에 빠져나온다 같은 잔꾀를 부릴 만큼 용기 있는 사람이 아니다. 미네르바의 부엉이가 황혼이 저물어야 날개를 편다는 말은 소설에 더 어울리는 표현이라 하지 않던가. 나는 이 모든 사건이 대충 종결된 뒤에 이야기를 쓰는 중이다. 이제 그 과정을 말해주려고 한다.

처음 그녀에게서 떨어진 건 실수였다. 그녀는 눈을 감으면서 '잠든 사이에 떨어지면 살을 실로 꿰매버릴 거야.'라는 전혀 귀엽지 않은 협박을 속삭였고, 이 모든 끔찍한 단어의 조합이 진심이라는 걸 알기에 나는 떨림을 숨기기 위해 아무런 대답 없이 눈을 감고 잠에 들고자 노력했었다.
때문에 정신을 차린 내가 그녀의 품에 안겨있는 게 아닌 내 방 의자에 앉아있다는 걸 알아챘을 때는 정신이 번쩍 들어 그녀의 방으로 뛰어가려고 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방 문앞에 서서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실과 바늘이 들려 있었다.

"너, 내가, 얼마나 찾았는지 알아?"
그녀의 목소리에는 울음기가 잔뜩 섞여 있었지만 공포에 질렸던 나는 그런 건 신경 쓰지 못했다. 그저 겁에 질려 온몸이 굳은 채 그녀의 다음 말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말했지. 떨어지면 꼬매버린다고. 이리 와, 꼬맬거야."
나는 무릎을 꿇고 사과하려고 했다. 무릎을 꿇거나, 일본 애들이 하는 식으로 도게자를 하면서 고의가 아니었다고 말하는 거다. 그러면 적어도 맨살이 꿰매지는 끔찍한 일은 모면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럴 셈으로 굳은 몸을 억지로 움직였건만, 아직 잠이 덜 깬 정신과 겁에 질린 몸은 내가 의도하지 않은 행동을 했다. 그녀가 들고 있던 실을 빼앗아 내 손목과 그녀의 손목에 묶은 것이다.
"자, 이제 떨어져도 같이 묶여 있는 거야."
나는 떨고 있었다. 분명 무진장 떨고 있었다. 방금 화장실을 다녀왔다는 게 다행이라 생각할 정도로 떨고 있었다. 이런 유치하고 말도 안 되는 장난이 먹혀들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그런 사람이니까, 우리는 평범한 연인 사이가 아니니까, 화를 내거나 당장에라도 바늘을 내 살에 꽂아넣을 것 같았다. 나는 제발 내 생각이 틀리기를 바랐다. 그리고 다행히도, 내 예상은 정확하게 빗나갔다. 그녀가 내 이름을 부르며 나에게 안겨온 것이었다. 나는 울고 있는 그녀의 등을 감싸 안으며 바닥에 떨어진 바늘을 슬쩍 구석으로 치웠다.

이야기가 그냥 이렇게 끝났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물론 이번 이야기의 가장 큰 갈등은 저렇게 끝났다. 그녀와 나를 묶은 실이 생각보다 훨씬 긴 덕분에 우리는 집안 어디에 있어도 실로 연결되어 서로의 생활을 안정적으로 보낼 수 있었다. 만약 여기서 이야기가 끝났더라면 이걸 읽는 누군가에게 '얀데레가 어쩌네 하더니 결국 염장이었네요.' 같은 말을 웃으며 들을 수 있었을 것이다.
실로 묶인 생활을 시작한지 이틀째 되던 날, 그녀는 메신저를 통해 어디서 찾았는지 물어보고 싶지 않은 여러 장의 수갑 이미지를 보냈다.
"이 중에 어떤 게 좋아? 이 분홍색 털 달린 게 예쁜데 그냥 이걸로 살까?"
나는 그녀에게 지금 우리를 묶고 있는 이 실도 분홍색이니 괜찮지 않으냐는 시답잖은 농담과 같은 말로 이 모든 고난을 넘어가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그녀는 실이 손목을 묶은 게 불편하다는 말을 하며 계속해서 수갑을 골랐다. 그리고 그 수갑은 하나같이 줄이 짧은 녀석들이었다. 만약 한 명이 화장실로 들어가버리면 다른 한 명은 꼼짝없이 문밖에서 기다려야 하는, 어쩌면 화장실 안에서 같이 있어줘야만 하는, 그런 정도의 길이였다.

나는 이미 당신이 지난번에 나를 위해 믿지도 않는 신을 향해 기도해준 것을 안다. 그리고 그 신께서 당신과 내가 제대로 믿지 않는다는 이유로 부탁을 거절한 것 역시 잘 알고 있다. 그래도, 다시 한 번만 부탁한다. 나는 이제부터 그녀를 설득할 참이다. 이번에는 제발 내가 이기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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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아서 생각보다 금방 썼네요. 속편을 생각하고 있던 건 아닌데 쓰다보니 줄줄 나와서요.
쓰면서 owl of Minerva라던가 모에인지 모애인지 이것저것 헷갈리는 게 많아서 약간 힘들었습니다.
참고로 지난번에 올린 것도 이번 것도 정식적으로는 제목이 없는 셈이네요. 그냥 첫 문장 따서 제목에 올린 거니까요.

댓글에 답글 안 다는 이유는 부끄러워서입니다. 읽어줘서 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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