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일주일 째 애니메이션을 보지 않았다
2014.02.24 21:55
일주일 째 애니메이션을 보지 않았다. 이 일주일 동안 나는 열 개의 방영 중인 애니메이션을 놓쳤다. 내 하루의 대부분을 차지하던 것이 갑자기 사라지니 그 빈 공간에 무한한 공허감이 다리를 꼬고 틀어 앉아 나 여깄다며 헛기침을 한다. 나는 지금 저 녀석을 무시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중이다. 안간힘의 일환으로, 대체 내가 어쩌다 이날을 맞이하게 되었는가 밝히려 한다.
나는 어떤 여자와 한집에 산다.
그냥 간단하게 연인과 동거하는 중이라고 하면 될 것을 이따위로 복잡하게 비비 꼬아 말하는 이유는 그녀와 나의 관계를 단순히 연인 사이라고 불러도 되는가 하는 자괴 때문이다. 연인의 정의가 무엇인가를 고민하다 보면 과연 우리를 연인이라 불러도 괜찮은 걸까, 그런 무책임한 묘사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연인에게 피해를 주는 게 아닐까 그런 비참한 생각이 든다. 물론 이런 생각을 공유하고 동의하기에 우리는 연인이라고 불릴 자격이 있다는 생각도 들지만, 우선은 이렇게만 말해두자. 그녀 역시 이런 표현을 심하게 기분 나빠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녀와 내가 사는 집은 젊은 남녀 둘이 살기에는 좀 과분한 감이 있는 꽤 그럴듯한 가정집이다. 안방으로 쓰라고 만든 게 분명한 화장실이 딸린 방, 그 맞은 편에 방이 또 하나, 그리고 문 앞에 있는 사랑방까지. 이 작은 식구에게는 과분한 집이다. 이 집은 나에게 어릴 적 온 가족이 모여 살던 집을 떠올리게 한다. 여섯 가족이 살기에는 좀 좁았지만 이렇게 단 두 사람이 살기에는 충분히 큰 집이다. 이렇게 큰 집은 우리 두 사람에게는 너무나 과분하다.
내가 계속해서 과분하다는 말을 강조하는 이유는 그녀와 내가 지독한 골방지기이기 때문이다. 이 단어가 무슨 뜻인지 사전을 검색하기 귀찮은 사람을 위해 설명해주자면, 히키코모리랑 같은 거라 생각하면 되겠다. 그녀는 화장실이 딸린 방에 틀어박혔고, 나는 거실 화장실이 가까운 사랑방을 골랐다. 처음 이 집에 들어온 날부터 우리는 이 방에서 거의 나오지 않고 서로의 사생활을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존중해왔다.
물론 우리 둘은 이 집에 사는 유일한 사람이었기에 복잡한 가정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주기적으로 방을 나와야 했다. 때문에 우리는 누가 방을 나와 귀찮고 짜증 나는 세상사에 얼굴을 맞대야 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를 자주 나눴는데, 이런 대화 역시 방을 나와 얼굴을 마주하고 하는 게 아니라 인터넷 메신저를 통해 대화하는 것으로 해결했다. 이 정도의 짧은 설명이면 그녀와 내가 우리의 관계를 연인 사이라고 부르는데 주저하는 이유 역시 알았으리라 믿는다.
물론 우리는 서로를 사랑한다. 우리는 서로를 이 세상 그 누구보다 이해하고 사랑하지만, 그저 둘 다 방에 틀어박혀 지내는 생활에 익숙해져 이런 생활을 그만둘 마음이 전혀 없을 뿐이다. 우리가 어떤 과정을 거쳐 이런 생활을 하게 되었는가 혹은 우리가 어떤 과정을 거쳐 만나게 되었는가 같은 건 이 이야기에서 중요한 문제가 아니니, 나는 이 간단한 배경 설명을 끝내고 바로 일주일 전으로 이야기의 시점을 옮기겠다.
처음 그녀가 말을 꺼낸 건 점심때 즈음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잠에서 깬 나는 컴퓨터를 켜 그녀에게 잘 잤느냐는 상투적인 인사를 했고, 그녀는 언제나처럼 나는 진작에 깨어있었는데 너는 이제야 일어났느냐는 심보가 비비 꼬인 말투로 대답했다. 나는 피식 웃은 다음 대충 늦게 일어나서 미안하다 말하고 점심에 대해 이야기를 하려고 했다. 그런데 내가 말을 꺼내기 전 그녀의 메시지가 먼저 도착했다.
"우리, 왜 ○스를 안 하지?"
만약 다른 누군가가 나에게 저런 말을 했다면 나는 적당한 대답을 위해 수십 분을 고심했을 것이다. 그러나 저 질문을 한 것이 그녀였기에, 나는 생각 없이 대화에 뛰어들었다.
"너랑 나랑 얼굴을 안 보니까? 서로 마주쳐야 뭘 하려고 해도 하지."
"아니야 자기. 우리가 섹○를 안 하는 이유는 얼굴을 안 봐서라든가 그런 게 아니야. 밥 차릴 땐 가끔 마주치잖아. 진짜 ○스하려고 했으면 서로 눈 마주치자마자 바로 섹○했을걸."
이런 직접적인 어휘 사용은 분명 그녀의 큰 매력이지만, 내 메신저에 계속해서 '○스'라는 단어가 차오르는 것은 아무래도 민망했다. 때문에 나는 그 단어를 다른 비슷한 말로 대체해 달라고 부탁했고 그녀는 알았다 대답한 뒤 말을 이었다.
"내가 아침에 자위를 좀 했는데 말이야…."
"그렇게 시작하는 말은 대체 어떻게 끝나는 거야?"
내가 바로 말을 끊자 그녀는 찌푸린 얼굴을 표현하는 이모티콘을 보냈다. 나는 알았다고 대답하고 키보드에서 손을 뗐다.
"어쨌든, 자위를 좀 했거든. 자위 끝나고 뒷정리할 때까지는 아무렇지 않았어. 근데 뒷정리 다 하고 컴퓨터 켜는 동안 생각해봤는데, 바로 옆 방에 네가 있잖아? 바로 옆은 아니지만 어쨌든 집에 남자가 있는데 왜 내가 힘들여서 손으로 자위한 건가 싶더라고. 그래서 너 일어나기 전까지 고민을 해봤거든."
계속 혼자 말하게 내버려두면 이야기에 끝이 없을 거 같고, 이런 내용의 대화를 하면서 딴짓을 하고 싶지는 않았기에, 나는 그녀에게 바로 요점으로 넘어가 줄 것을 부탁했다. 그러자 그녀는 사진 한 장을 보내왔다. 방금 휴대전화 사진기로 찍은 듯한 그녀의 얼굴 사진이었다.
"어떻게 생각해?"
"뭐, 예쁜데. 다른 사람들은 너무 수수하게 생겼다고 하거나 화장 좀 하라고 말하겠지만, 내 눈에는 예뻐. 그거면 됐지."
진심이 담긴 대답에도 그녀는 뭔가 만족하지 못했다는 듯 불만이 담긴 말을 보내왔다. 나는 진심으로 하는 말에 무슨 수식어를 더 붙여야 할지 몰랐기에 그녀의 다음 메시지를 기다리기로 했다. 그리고 그녀는 거울을 통해 찍은듯한 벌거벗은 여자의 상반신 사진을 보내줬다. 그러니까, 자기 알몸을 찍어서 보내준 거다.
"이건 어떻게 생각해?"
"음, 가슴이 생각보다 큰데."
나의 재빠른 대답에 그제서야 자신이 한 행동이 부끄럽다는 걸 알아챘는지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고 얼굴을 씻는 동안에는 잠시 그녀가 무미건조한 대답에 삐친 게 아닐까 싶었지만 나는 그녀는 그런 여자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화장실에서 돌아왔을 때 메신저에는 이런 문자가 쌓여있었다.
"그러니까, 원래 다른 연인들은 여자가 이런 사진 보내면 만지고 싶다고 하거나 어쨌든 야한 말을 막 하거든. 물론 우리가 다른 평범한 사람들하고는 좀 다르지만, 그래도 연인이잖아? 서로 사랑하고 그런 사이잖아? 물론 우리가 다른 평범하게 사는 사람을 싫어한다는 거에서 마음이 맞아서 사귀게 된 거지만 어쨌든 우리는 사귀는 사이잖아? 사람을 싫어해도 멀쩡하게 밥도 먹고 자위도 하고 그러는데 왜 섹…그거만 안 하느냐는 거지. 자기 한 번도 여자랑 해본 적 없잖아? 나도 남자랑 해본 적 없거든. 그러면 자위가 하고 싶어지면 차라리 너를 불러서 같이 신나게 하면 될 텐데 왜 안 그러냐고. 내가 자기 일어나기 직전에 전에 그 이유랑 해결책을 알아냈거든. 자기, 지금 내가 하는 말 보고 있어? 화장실 갔어?"
나는 화장실에 갔었다고 짧게 대답 하려다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이런 말을 덧붙였다.
"너 혹시 내가 야동이라던가 지우길 바라는 거면 나 절대 안 지울 거다."
"아니, 포르노는 마음껏 봐. 그거 때문에 안 하는 거라고는 생각 안 하니까."
다행이다 싶어 가슴을 쓸어내릴 새도 없이 그녀는 바로 다음 메시지를 보냈다.
"대신에, 애니메이션을 끊어."
그녀의 이론은 이러했다. 나도 그녀도 현실과 망상 정도는 제대로 구분할 줄 아는 인간이니까, 그런 동영상 몇 편 본다고 현실적인 성 감각을 잃어버린다거나 하지는 않는다. 문제는 애니메이션인데, 이차원에 그려진 사람들을 매일같이 보다 보니 현실의 인간이 얼마나 엉성하게 만들어졌는가를 까먹었다는 것이다. 그녀와 나의 육체적 관계가 소홀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위기의식이 없는 건 이런 흠이 없는 인간이 자주 등장하는 애니메이션을 너무 자주 접하기 때문이라는 거였다. 물론, 나는 그녀의 말에 동의할 수 없었다.
"차라리 야동을 보지 말라고 해. 그냥 그, 그거를 안 하는 게 맞는 거 아니야?"
"자위는 상관없어. 처음에는 나도 그게 문제인가 싶었는데, 애초에 내가 이걸 생각하게 된 이유가 자위를 해서 그런 거거든. 자기랑 내 문제는 자위를 할 바에야 서로를 부르는 게 낫다는 간단한 결론에 도달하지 못하는 거야."
"그러면 대체 언제까지 끊어야 하는 건데! 우리가 서로 마주치고 그런 생각 들게 될 때까지 보면 안 되는 거야?"
나는 메시지 끝에 허탈한 웃음을 짓고 있다는 양 키읔을 몇 자 적었지만,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는 내 표정은 잔뜩 굳어있었다. 이제 겨우 일월 초순이다. 막 시작하는 애니메이션들이 자기가 어떤 작품인지 관심을 가져달라며 몸부림을 치는 이런 시기에 갑자기 방영작을 보지 말라는 건 나 같은 부류에게는 너무나 잔인한 명령이었다.
"자기, 나도 이게 힘들 건 알아. 나나 자기나 맨날 만화 보면서 시간 보내는 게 낙이잖아. 하지만 이런 결단이 우리가 좀 더 가까운 사이가 되는 데 도움이 되는 선택 아닐까 싶어.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사이라는 걸 증명해야 하는 사람들이 있잖아. 그 사람들이 우리가 이렇게 만나고 일 년 넘게 그거 한 번 안 했다는 걸 알아봐. 진짜로 연인 사이인 건가 의심하는 걸 넘어서 지난번처럼 우리를 갈라놓으려 들지 않을까?"
마침내 그녀가 비장의 무기를 꺼내 들었다. 방해꾼들에 대한 걱정은 내가 어떤 말로도 뚫을 수 없는 벽이었다. 물론 나도 내가 필요한 순간이 오면 방해꾼을 들먹이곤 했지만, 그게 이런 식으로 돌아올 거란 생각은 못 했다. 어쩌면 이 모든 게 단순히 방에서 나오기 싫다고 함부로 방해꾼에 관해 이야기하던 나를 엿먹이기 위해 그녀가 설계한 복수가 아닐까 싶기도 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나는 그녀를 설득하는 데 실패했다. 그리고 그녀에게 거짓말을 할 자신도 없었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났다. 조금 전 저녁을 준비하면서 잠시 속옷 차림의 그녀와 마주쳐도 나는 여전히 그녀와 그런 짓을 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건 방금 자위를 끝마치고 방에서 나왔다던가 하는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무작정 그녀를 향해 덤벼들까 싶기도 했지만, 그녀와 마주친 눈빛이 그런 억지가 통하지 않을 거라 말하고 있었다. 내가 그녀의 말대로 현실적인 성 감각을 잃어버린 건지 모르겠으나 그게 애니메이션 때문이라면 진작에 고쳐졌어야 하는 게 아닐까.
나는 이제부터 그녀를 설득할 참이다. 만약 당신이 나를 동정한다면, 내 승리를 빌어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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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팸 때문인가요 대체 왜 글에 sex라는 단어를 쓰지 못하는 겁니까. 그것은 참으로 동물적인 일반적인 인간의 그런 거시기 뭐시기 인데. 덕분에 의도에 없던 검열까지 해야 했잖아요. 이런.
어쨌든,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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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롭게 생각하며 읽다가 낯이 뜨거워져서 댓글을 안 쓸까 하다가 글쟁이의 댓글 고픔은 잘 알고 있기에.
설정이 흥미로웠습니다. 방 하나 건너 동거하는 연인이 얼굴 맞대고 대화하는게 아니라 메신저로 대화하는 부분 같은 거요.
이런 이유의 강제 휴덕을 당하면 꽤나 슬플 것 같네요. 불쌍한 주인공은 과연 애니를 다시 볼 수 있을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