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시력이 나빠지기 시작한 건 '우리만의 기념일'이 지나고 한 달 후였다.
"왜 '우리만의 기념일'인데? 그냥 처음으로 섹…."
"자기!"
달력을 보며 내 표현에 불만을 제기하는 그녀의 입을 나는 황급히 막았다. 물론 소리 질러서 미안하다는 미안하다는 말 역시 잊지 않았다.
"자기, 그런, 집적적인 표현은 나에게 너무 자극적이야. 특히 그 단어 말이야. 너무 뭔가, 동물적이고, 남사스러워. 그래서 그렇게 적은 거고. 전에도 말 했잖아?"
그녀는 알았다며 툴툴대는 대답을 하고는 달력에 얼굴을 붙였다. 침대에 엎드린 그녀를 바라보는 시선이 자연스럽게 엉덩이로 옮겨졌다. 나는 내가 현실의 인간을 향해 짐승처럼 굴게 되는 것이 괴로웠다. 나에게 여성이란 화면 너머에 있는 것이었고, 그런 생활은 그녀를 만난 뒤라도 영원히 변하지 않을거라 믿었는데, 어쩌면 인생은 알 수 없는 거라던 뻔한 말이 옳았던 걸지도 모르겠다 싶었다. 욕구를 억누르고 엉뚱한 깨달음이 다가오는 걸 막기 위해, 나는 억지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달력을 앞 뒤로 움직이고 있었다.
"왜 그래?"
"잘 안 보여서. 눈 나빠졌나봐."
"눈이 나빠져? 언제부터?"
나는 이 말을 하면서 그녀의 옆으로 뛰어들었다. 뛰어드는 건 의도한 행동이 아니었고 그녀의 등 끌어안는 건 더욱 의도된 행동이 아니었지만, 어쩌다보니 그렇게 됐다.
"요 며칠 전부터 계속 이러네. 가까이 있는 게 잘 안 보이면 근시였나 원시였나? 뭐였는지 기억나?"
"잘 모르겠네. 근데 그게 중요해? 시력이 나빠졌으면 안경집을 가던가 안과를 가던가 해서 안경을 맞춰야지."
한참 달력을 움직이던 그녀가 슬그머니 나를 째려봤다. 겉으로는 왜 쳐다보느냐고 물으면서도 혹시 내가 그녀에게 뭔가 불편한 말을 한건가 조금 당황했다. 다행히 그녀는 그런 심각한 불쾌감을 느낀 것이 아니었다.
"자기 방금 '안경'이라는 단어만 엄청 힘줘서 말한 거 알아?"
얼마전 서로의 컴퓨터를 둘러보다 각자의 비밀을 발견한 뒤로, 나와 그녀 사이에 취향의 차이라는 심각한 문제가 있음을 발견했다. 물론 그 차이는 타인과의 관계에서는 그저 도망치면 되기에 전혀 문제삼을 이유가 없었지만, 그녀와 나는 한 집에 사는 사이다. 그래도 위대한 사랑의 힘과 서로를 대충 존중하는 긴 대화 덕분에 이런 갈등도 어느정도 해결이 됐었는데, 안경을 향한 나의 기호와 이에 크게 반대하는 그녀의 의견 간에는 아직도 많은 대화가 필요한 것이었다.
"그냥 그, 유전적 요인이라던가 어머니에게서 받은 영향 같은 거로 생각해주면 안 될까? 오이디푸스 컴플렉스인가 뭔가 하여튼 그런 거 있잖아."
"정확하게 말하면 당신 아버지의 취향과 당신 어머니가 안경을 썼던 모습 같은 게 겹쳐서 그런 성적 취향이 형성된 거겠지. 그리고 그게 나에게 좋게 보일리가 없잖아?"
도저히 반박할 구석이 없는 명확한 이유였다. 그래도 나는 어떻게든 돌파구를 찾아야 했다.
"아니, 당장 이 그림을 봐. 이 여자들을 보고도 안경 쓴 여자애가 귀엽지 않다는 말이 나와?"
"안경을 안 쓰면 더 귀여울 거라니까. 전에도 말 했지만 안경 써서 귀여운 여자애는 안경을 안 써도 귀여워. 안 쓰면 더 귀여울 거라는 식으로는 말 안 하겠지만. 그리고 이건 그림이잖아. 자기는 그림 속 말고 현실의 인간한테도 안경을 쓰면 더 예쁠 거라고 생각하잖아."
"난 현실의 인간한테 안경이 좋다고 한 적 없어. 당장 내 야동 폴더에 그런 거 있는 거 봤어?"
"하긴 자기 취향은 여자의 겉모습 보다는 집착하는 성행위 자체에 좀 논란이 있었지. 예를 들어 구강……."
"요점은!"
그녀가 또 다시 직접적인 표현을 꺼내려 했기에 나는 이번에도 황급히 입을 막았다.
"…요점은 말이야, 난 현실의 여자에게 안경을 씌우면 좋을 거라고 생각한 적은 없다고. 내가 그런, 호감을 느끼는 건 오직 그림으로 그려진 아름다운 소녀들에만 한정하는 그런 거라는 거야."
"그리고 좀 예쁘장한 남자들도 포함해서 말이지."
"그래 좀 예쁘장한 남자애들. 하지만 예쁘장한 남자애들 이야기를 꺼내면 자기가 불리할텐데?"
그녀가 손톱을 깨물기 시작했다. 그건 일주일 전부터 생긴 새로운 버릇이었다.
"그러면, 나에게 안경을 씌우려고 노력하는 이유를 간단하고 명료하게 설명해줘. 그러면 같이 안과던 안경집이던 가줄게."
중요한 순간이었다. 여기서 내가 대답을 어떤 식으로 하느냐에 따라 모든 것이 바뀔 수 있었다. 이런 순간에 가장 중요한 건 누군가에게 내 미래를 부탁하는 것이 아닌 솔직한 마음을 전하는 거라는 걸 이미 지난 몇 번의 사건을 통해 깨달았다. 때문에 나는 망설임 없이 바로 떠오른 말을 여과없이 뱉어냈다.
"첫번째, 당신 시력이 나빠질까봐 걱정되니까. 두번째, 네가 안경 쓰면 잘 어울릴 거 같거든."
검사 결과로 상대방이 떠드는 말은 하나도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그녀도 나도 여전히 사람을 만나는 건 꺼림칙한 일이었다. 그녀와 나는 주인의 추천을 따라 대충안경을 맞추고는 서둘러 안경집을 나왔다. 골라준 안경은 뿔테였다.
"그래도 안경테 정도는 제대로 골라줘야 될 거 아니야? 자기 말 듣고 없는 돈 짜내서 산 건데."
"거기서 그런 생각이 어떻게 드는데. 환히 웃으면서 이거 어떠세요 저거 어떠세요 하는 사람 보면서 이게 좋다 저게 좋다 고르라고? 게다가 그 사람 남자였잖아."
"남자는 되도록 내가 상대하기로 했지만 그렇다고 어버버 거리기만 하면 어떡해. 나중에 보고 마음에 안 들면 어떡하려고?"
"마음에 들 거야. 사실 진짜 안경은 뭐가 좋은지 나쁜지 취향도 없으니까. 니가 쓰면 뭘 써도 어울리겠지 뭐."
신호등을 기다리면서 우리는 티격태격 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사거리의 신호등은 불이 바뀌기까지 너무나 긴 시간이 걸렸다. 그녀는 코에 닿는 부분이 간지럽다며 미간을 문지르며 안경을 벗었다. 안경을 벗던 그녀와 그런 그녀를 바라보던 나의 눈이 마주쳤다. 그녀가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뭐야, 갑자기 왜 웃어?"
내 질문에 그녀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뒷짐을 졌다. 덕분에 내 팔이 조금 꼬였지만 아프지는 않으니 불평은 안 하기로 했다. 그녀가 내 앞으로 돌아섰다. 물론 수갑의 길이 때문에 그렇게 먼 거리를 움직이지는 못했다.
"안경 쓰니까 좋은 점이 있긴 하네."
"뭐가 좋은데?"
"안경 쓰다가 벗으면, 세상에 온통 당신밖에 안 보여."
신호등 불이 켜졌다. 나는 그녀에게 닭살 돋는 말이나 한다면서 꿀밤을 먹이려다 팔이 꼬이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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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와서 글 하나 툭 쓰고 사라집니다.
사실 다른 글을 쓰려고 했는데, 저장해놓은 글이 있다길래 그게 뭐지 했더니 이런 게 있었네요. 급하게 마무리 짓느라 분량도 짧고, 여전히 초고도 없이 막쓴 글이라 미안합니다.
처음부터 시리즈가 되려고 한 건 아니었는데 쓰다보니 시리즈처럼 됐습니다. 만우절 거짓말 한정으로 실화라고 했으니 이제 실화 인증 할거냐는 쓰는 사람 당황하게 만드는 질문은 살려주세요. 제목은 대충 데이트 어플로 묶죠 뭐. 막 만나던 시절의 이야기와 여러 사건을 겪은 뒤의 이야기로 나누면 적절할 거 같네요. 이거 팔아서 돈 벌수 있으면 좋겠다.
어쨌든, 읽어줬다면 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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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가 너무 혐오스러운지라 꾹꾹 참고 봤습니다만...안경으로 해피엔딩이라니 현실성이 떨어지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