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연말에는 브로콜리 너마저를
2014.12.31 03:19
밴드 브로콜리 너마저의 음악에 대해 잠깐 이야기 해보자.
브로콜리 너마저 음악의 가장 큰 특징이라면 역시 아무리 음악적 평가와 취향이 갈리더라도 정규 앨범은 한결같이 대단하다는 것이다. 중독적인 맬로디와 마음을 넘어 인생이라는 고차원적인 추상에 까지 다가가는 가사, 투박하면서도 완벽하게 들어맞는 악기 연주는 예술은 머리로 하는 게 아니라 가슴으로 와닿는 거라는 말을 그대로 증명한다.
하, 뭐라는 거니. 헛소리 해서 미안하다. 브로콜리 너마저의 음악하면 당연히 계피가 보컬인 게 나은가 아니면 계피가 나간 뒤가 나은가로 싸우는 게 일이지.
다음해를 하루 남긴 시점에서 나는 그녀와 브로콜리 너마저의 음악을 듣고 있었다. 음악은 여러 앨범에서 내가 직접 골라 이어 붙였는데, 희귀한 브로콜리 너마저의 앨범이 많은 덕에 그녀는 이 곡은 처음 들어본다고 말하거나 소리가 내가 알던 것과 뭔가 다르다는 말을 많이 해줬다.
오천원에 산 이 앨범이 지금 경매를 붙이면 오만원에 팔릴 거라고 내가 말하면 너는 어떻게 반응을 할까? 말 하면 안 된다. 돈 이야기는 마음을 차갑게 만드니까, 내가 뽑은 브로콜리 너마저의 음악에 어울리지 않지 싶었다. 하지만 그녀가 직접 이 아름다운 분위기를 깨트릴 거라는 생각은 못 했다. 계피 당신은 왜 밴드를 탈퇴해서 이 분위기를 망치는 건가요.
"나 가을방학 좋아해. 곡을 잘 만들었잖아. 계피 목소리도 좋고."
"가을방학이 싫다는 게 아니라, 브로콜리 너마저의 그 느낌이 안 난다는 거야. 너 이번에 새로 나온 앨범 들어봤어? 잘 보면 계피가 참여한 곡을 죄다 계피 없는 브로콜리 너마저 곡으로 리메이크 한 거 더라고. 굳이 왜 그러는지 모르겠어."
"브로콜리 너마저의 느낌이라는 게 뭔데? 옛날부터 곡이랑 가사는 덕원이 다 썼다잖아. 맴버도 생각보다 자주 바뀌었는 걸. 장기하와 얼굴들에서 드럼치던 사람이 브로콜리 너마저 드러머였다던가 그런 거. 밴드는 원래 모였다가 해체했다가 그러는 거야. 바뀌었어도 좋으면 좋은 거지."
"내 포인트를 자꾸 피하는데, 나는 계피가 있었을 때의 느낌이 좋았다는 거야. 계피가 목소리를 내고 덕원이랑 같이 노래를 부르던 때 말이야. 그 시절 음악이랑 비교해봐."
"좋아, 그러면 설명을 해봐. 뭐가 어떻게 정확히 다르다는 건데? 계피가 없다는 걸 제외하고 좀 더, 어, 내 전공에 어울리게 말해줘봐."
'내 전공'이라는 표현이 웃기다며 그녀가 키득거렸다. 내가 너무 진지하게 토론을 하려고 했나. 나는 그녀를 독촉하는 대신에 그녀가 웃음을 멈추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다행히 아이폰에 비친 내 얼굴은 해맑게 웃고 있었다.
"간단히 정리해줄게. 내가 처음 쓴 표현은 아닌데, 계피가 있을 때 곡들은 해맑게 우울했단 말이야. 근데 계피가 나간 다음에는 앨범 전체가 우울하고 고민이 가득하잖아."
"첫 앨범은 뭐 안 그랬어? 춤이라던가 이천구년의 우리들이라던가, 심지어 앵콜요청금지도 울적한 노래잖아?"
"그런 노래하고 커뮤니케이션의 이해, 사랑한다는 말로도 위로가 되지않는 같은 곡을 비교해봐. 마음의 문제니 졸업이니 말하는 거 듣다 보면 이웃에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봄이오면 두근두근거리던 속좁은 여학생이 잔인한 사월을 지나서 갑자기 어른이 되어버린 것 같다고."
그녀가 나 방금 되게 멋진 말 하지 않았느냐고 우쭐댔다. 화면에 띄워놓은 앨범 트랙명을 보고 지어낸 것 치고는 분명 멋진 말이었다. 꼭 억지로 이야기를 만들어서라도 어딘가에 적어두고 싶은 문장이었다. 그런 속마음이 비치지 않게 나는 괜히 잔인한 사월도 알고 있었는지를 물었다.
"브로콜리 너마저 음악 관심 있으면 다 알잖아? 갑자기 활동 중지했다가 복귀하면서 계피가 빠져버려서 아쉬웠다고."
"그게 그렇게 된 거였나? 난 앨범만 사서 들었어서."
맞다, 너 라이브 공연 안 좋아했지. 이런 말을 끝으로 그녀와 나의 대화는 끝나버렸다. 어색한 침묵은 브로콜리 너마저의 음악으로 채워졌다. 갑자기 한 쪽 귀에만 이어폰을 꽂는 게 귀 건강에 그리 좋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에 오른쪽 귀로만 곡 들을 때도 많으니까, 이렇게 왼쪽귀로만 들어주는 시간이 있어도 괜찮지 않을까. 고등학교 다니면서는 친구랑 한쪽 이어폰만 서로 공유하며 노래 들은 기억도 많잖아. 브로콜리 너마저의 곡은 양쪽이 비슷하게 들리게 믹싱된 것이 많았다. 노모 사운드라고 하던가. 이렇게 만들어줘서 고마워요.
"이렇게 둘 사이에 침묵이 생기면, 사실 누가 기억을 지우고 지나간 거야."
그녀의 뜬금없는 말에 웃음이 터져버렸다. 그녀는 열심히 자신의 주장이 정당하다는 걸 증명하려 했다. 마침 곡이 바뀌던 순간에 대화가 끊어졌잖아, 잘 생각해보면 열심히 대화하는 중에는 이상하게 노래가 안 들리지 않았어? 터진 웃음을 참느라 나는 귀에서 이어폰이 빠져나온 줄도 모르고 침대 위를 뒹굴었다. 벽지에 머리를 비비며 배를 쥐어짜고 있자니 내 웃음에 혹시 그녀가 뾰로통해진 건 아닐까 걱정이 되기도 했다.
"아, 내가 좋아하는 노래야. 들어."
귓구멍으로 이어폰과 차가운 손가락이 들어왔다. 나오는 노래는 브로콜리 너마저의 곡 중 가장 유명한 유자차였다. 거의 전주 없이 시작하는 곡이지만, 나는 금새 덕원의 목소리를 따라부를 수 있었다. 누워서 듣는 기타 간주는 정말 환상적이야.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려니 그녀가 계피의 파트를 부르기 시작했다. 엉성한 노래 실력은 이불이나 이어폰 속 목소리 같은 것들이 적당히 가려줬다. 나는 후렴구의 어느 부분에서 덕원과 계피가 동시에 노래를 부르는지 알고 있었다. 이어폰은 빼버려도 그녀의 목소리만 듣고 따라부를 자신이 있었다. 이어폰을 빼버리고 나는 몸을 일으켜 그녀를 바라봤다. 그제서야 그녀 역시 이어폰 없이 노래를 부르고 있다는 걸 알았다. 이 차를 다 마시고 봄날으로 가자. 호흡은 생각보다 훨씬 괜찮았다.
내가 선곡집에서 마지막으로 껴넣은 건 청춘열차라는 곡이었다. 연말에 브로콜리 너마저를 들으며 시간을 보내기로 한 건 정말 좋은 선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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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생각나서 초고도 없이 단숨에 썼습니다. 여기다 쓴 글이 죄다 그렇게 쓴 글이긴 한데, 대충 써서 미안해요. 재밌으면 좋겠는데.
커뮤니티에 어울리는 애니메이션 리뷰는 내년부터 하던가 하죠. 올해는 연초에 잔뜩 보다가 갑자기 툭 끊어버렸죠. 어쩌다 그렇게 된 건지. 내년에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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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상 노래의 힘은 계피가 없어도 남아있더라고 아쉽긴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