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소원 트레이드 1
2011.05.09 05:08
『Wish Trade』
1 : 전야제
술냄새에 머리가 어지러워진 나는 선배들에게 "바람 좀 쐬러 갈게요."라 공손하게 말씀드렸다. 분위기 깬다고 욕 좀 먹었지만, 내가 문을 닫기가 무섭게 웃음소리가 새어나오는 걸 보면 내일 아침이 걱정되지는 않았다. 지금 걱정되는 건 이제부터 어떻게 아침까지 시간을 죽이느냐 하는 것 정도였다. 집안 유전자가 알코올과는 통곡의 벽을 쌓았기에 동기들과 어울려 술을 마실 수는 없었다.
게다가 선배들... 특히 국방부 강제 캠프에 다녀왔던 복학생 선배들이 동기 여학생들을 바라보는 사냥꾼 눈빛은, 같은 남자인 내가 봐도 심히 부담스러웠다. 과 안에서도 가뭄에 콩 나듯 보이는 예쁜 여자애들이 수학적인 확률로 옹기종기 모여있는 우리 조는, 남들이 보면 축복같았지만 나에게는 재앙이나 마찬가지다. 너 시발 내가 작업거는 후배 상회입찰 하지 마라는 무언의 압력이 초단위로 밀려오는데야 감당할 재간이 없다. 나는 여자애들에겐 별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다들 신나게 이십대의 뜨거운 청춘 괄호열고 작업 괄호닫고를 즐기는 MT 숙소는 조금도 즐겁지 않았다. 물론 내가 고자라서 그런 건 아니다.
"대체 3차원 여자의 어디가 좋다고 난리굿인지."
바닷바람을 마주 보며 나는 시크하게 중얼거렸다.
고등학교 때는 여기 대학교를 들어가려고 그렇게 난리굿을 벌였건만, 막상 들어오고 나니 고딩때보다 영 재미있는 것도 아니었다. 꿈과 환상의 낙원이 펼쳐지는 남녀공학과 담벼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었던 시궁창 남고였다고는 하지만, 남자들만 개떼같이 모여 있었기에 즐길 수 있던 낭만이 있었다. 말뚝박기를 반 대결 스케일로 벌이고 야자시간엔 PMP 돌려가면서 흐뭇한 영상매체를 감상하기도 했다. 전세계 35개국 여자들에게 작업을 걸기 위해 영어 스페인어 프랑스어 3개 국어를 통달한 멋진 친구도 있었다. 만우절에는 10분 거리에 떨어져 있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시궁창 라이프를 즐기던 여고 아이들과 단체로 클래스를 바꿨다가 학주에게 비내리는 복날에 먼지나게 개패듯 두들겨맞은 적도 있었다. 나는 맨 뒷줄에 서 있었기 때문에 살살 두들겨 맞을 줄 알았지만, 하필이면 내 앞턴에서 학주가 체육선생님이랑 교대하여서 MAX 파워로 엉덩이를 강타, 꿈에나 나올법한 아름다운 푸른 멍이 볼기짝을 수놓았었다. 맞을 당시는 엿같은 기분이었지만 지나고 나면 재밌는 추억이었다.
근데 대학은 이게 뭐냐. 고향에서 만리이역 떨어진 학교에 간지나게 입학했건만, 생각보다 캠퍼스 생활은 재미가 없었다. 몰려오는 수업 과제만 해결해도 주말은 쉽게 쉽게 흘러갔다. 일주일에 두 번 있었던 체육시간은 당연히 없으니 스스로 운동하지 않으면 몸이 무거워진다. 반찬은 거지같이 주는 주제에 출퇴근은 메르세데스 벤츠 끌고 다니던 급식소 사장을 씹어대면서도 반강제로 먹어야 했던 단체급식은 이제는 과거일 뿐이었다. 이젠 원하는 고품격 음식을 먹을 수 있게 되었지만, 그만한 값을 지불해야 하기 때문에 자취생은 별 수 없이 Always 라면 타임이다. 저녁놀 늘어지는 운동장에서 자전거타고 묘기 축구를 벌였던 것도 두 번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지.
대학친구들이 모여서 하는 거라고는 피씨방에 처박혀서 카오스를 하거나 당구장에서 큐대 쥐고 사구 때리는 것밖에 없었고, 그 외에는 상상하기도 싫은 끔찍한 예비 레포트 결과 레포트를 조별로 작성하느라 밤새도록 도서관에 모여있는 정도였다. 뭐어 남들 다 가는 미팅 한 번 따라 가봤지만 별로 이쁜 여자애는 없었다.
상대도 마찬가지 표정이었지만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다.
아무튼 어릴 적 꼬꼬마 시절에 보았던 '○자셋 여자셋'과 '○스톱'의 환상이 깨어지는 데에는 1달도 채 걸리지 않았다. 차라리 맘 편하게 교복 차림으로 친구들이랑 복도에서 뒹굴던 때가 더 좋았다. 고3 때는 그렇게 고딩 생활이 지랄같더니, 막상 대학에 와서 그 때를 떠올려보면 그리 나쁜 기억은 아닌 것 같았다. 그냥저냥 평범한 대학에 가서 적당하게 놀면서 지내면 지금 생활에 만족할 지도 모르겠지만, 어쩌다가 무리해서 들어온 대학 커리큘럼 따라가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다보면 으 씨발 난 카와이한 나노쨔응 만들려고 여기 왔는데 낚였네요 어헣어헣 하는 후회감에 밤잠을 설친다.
학자금과 함께 대학교 시절을 보내야 한다는 생각에 한 번 아득해지고, 아직 졸업할 때 까지는 군대 포함에서 넉넉하게 6년은 남았다는 생각에 두 번 아득해지고, 몇 천 만원 학자금 빚을 지고 대학을 떠나야 한다는 생각에 세 번 아득해지고나면 쵸비츠보다는 돈데크만을 먼저 발명 우선순위로 올려놓을 수 밖에 없다. 내 마음을 아르마니 정장마냥 폼나게 코팅하고 있던 '꿈'은 현실의 가차없는 칼날바람에, 아광속에 달하는 속도로 마모되어 없어져버렸다. 여기저기 할퀴고 피가 흐르는 마음도 시간이 흐르면 딱지가 내려앉겠지만, 결코 이전의 윤기좔좔 간지쌩얼의 마음으로 돌아갈 수는 없을 것이다.
이것도 중2병인 건가.
대학 뉴비인 내가 벌써부터 이런 한심한 자학개그나 하고 있다는게 한탄스럽다.
발 끝으로 모래사장에 발자국을 꾹꾹 눌러새겼다. 봄의 바닷바람은 아직 겨울 몹지 않게 춥다. 밤과 새벽이 애매모호한 시간대에 바닷가를 방황하는 사람은 나 혼자 뿐이다. 누가 보더라도, 술 한 잔도 마시지 않고 맨정신으로 이러리라고는 생각하지 않겠지. 지금 나부터가 후회하고 있는데.
"존나 춥네...."
팔짱을 낀 나는 몸을 덥히기 위해 모래사장을 달리기 시작했다.
이렇게 달리면 공기분자의 마찰로 내 몸이 따뜻해질거야.
응. 누가 뭐래도 난 이과니까.
저 하늘의 별똥별도 지구 진입하면 새빨갛게 달아오르잖아?
"......"
한참을 모래사장 달리다가 멈추었다.
이런 정신나간 짓을 해도, 누구 하나 관심을 주지 않는다. 역시 나는 저주받은 몸이다. 알코올 분해 효소가 선천적으로 결락된 이 몸은 건전한 사회생활의 첫 발을 늪지대에 내딛고 있어.
"......."
굳이 술 문제가 아니다.
남들과 함께 누릴 수 있고 누려야만 할 무언가를 하지 못한다는 것이 나를 초조하게 한다. 원래라면 지금 이 시간대라면 화장실가서 변기에 옥수수죽 거하게 한 번 뱉어낸 다음 "한 살 젊어서 쌩쌩합니다!!"라고 외치며 선배들이 건내주는 술을 물처럼 들이넘겨야 할 텀이다. 대한민국에서 '폭넓은 대인관계'에 술을 빼놓는다는 것은, 키보드 없이 디씨질을 한다는 것과 동의어다. 이제 막 사회인이 되려는 대학생 초창기부터 술자리에 섞이지 못해 징징거린다면 어쩌자는 건가.
물론 술 못마신다고 해서 출세 못한다는 소리는 아니다. 다만 원래부터 말주변이 좋지 못하고 내성적인 성격에 그런 체질까지 겹치게 된다면 끝내주게 암담하다는 것이다. '아──── 하느님이 나의 완벽함을 질투해서 효소 하나를 가져갔군. 크큭──흐콰한당─'이라고 넉살좋게 넘어가지 못하는 성격인 나는 양 발목에 콘크리트 발찌 하나를 끼고 허들 달리기를 하는 기분이다…….
"으엑."
……라 생각하는 동시에, 넘어졌다.
어떤 생키가 청정수역 동해 모래사장에 이물질을 심어놓았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 녀석에게 생과 사를 뛰어넘은 삼도천 펀치를 먹여주고 싶었다. 발톱이 살짝 뒤집어질 정도로 무언가에 호되이 발을 찧은 것이다. 그자리에서 털썩 주저앉은 나는 캔버스 운동화를 벗었다. 이윽고 남들에게는 단 한 번도 보여주지 않았던 발가락양말을 섬세하게 벗겨내던 그 때, 나님의 발톱님에게 고통을 선사한 그 이물질에 눈길이 갔다.
멀리서 비치는 옅은 가로등 불빛으로도 그것은 고양이 눈깔마냥 번쩍인다. 손으로 모래를 파내서 꺼내보니, 마치 중국의 다기(茶器)처럼 주둥이가 살짝 긴 묵직한 그릇이었다. 한 손에 아담하게 들어오는 그릇 주제에 무게는 12 볼링공만했다. 이딴 거에 발을 쳐박았으니 발톱이 나가리 안나는게 비정상이지. 투덜거리면서 양 손으로 그릇의 먼지를 닦아냈다.
"오. 생각보다 깨끗하네?"
바닷가에 있다면 으레 녹이 슬었기 마련인데도 이 그릇은 닦으면 닦을수록 광택이 났다.
거 참 신기하네 하고 멍하게 감탄하던 그 순간, 평소엔 균형잡기 이외엔 쓸모가 없던 머리가 인류보편의지에서 보낸 전파를 벼락처럼 수신받았다.
<반짝거리면서 묵직하고 녹이 슬지 않는다 = 금 Au 79>
지저스 크라이스트. 나는 급히 그것을 품에 안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똥개 하나가 모래 위를 질주하는 것 이외엔 아무도 없었다. 그래도 혹시 몰라서 거리를 등지고 바다를 향해 돌아섰다. 셔츠로 반들반들하게 그릇을 다시 닦고 눈높이에 수평이 되게 올려들었다. 손톱을 세워 꾹 눌러보았다. 슥 들어간다.
어머나, 어머나 시발.
이거.... 금 맞지?
"이야아아아앗호오오오오놀룰↑루↓우↑우우!!!───(º∀º)──!!!"
태초의 인류가 맘모스를 때려잡았을 때의 그 환호성을 재현해내며 나는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그 어떤 최신 댄스를 배우더라도 민속춤이 되어버리는 지독한 몸치였지만, 남이사 진샹댄스라 부르든지 어쩌든지 알 게 뭐임ㅋ. 나는 웃통을 벗어젖히고 바다로 뛰어들어 이 기쁨을 해양생물들에게 널리 알리고 싶었지만, 밤바다가 존나게 춥다는 건 초딩때 멋모르고 엄마 몰래 한밤중에 해수욕장 뛰어들었다가 트라우마가 생길 정도로 깨달았기에 겨우 참았다.
(이거 팔면 돈 꽤 되겠지?)
요새 미쿡과 한국의 리만브라더스가 경제를 범세계적으로 말아잡수시고 있기 때문에 금값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수직상승하고 있었다. 이젠 MT는 완전히 관심권에서 멀어졌다. 머릿속은 이 장물을 처분할 타이밍을 언제 잡는게 좋을까를 본격적으로 고민하기 시작했다. "대충 무게는 내가 평소에 들던 아령이랑 비슷하니까..."
공중으로 던졌다 받았다를 반복하면서 금그릇의 무게를 가늠해보았다. 적어도 5kg 급은 되겠다. 금괴로 도미노를 하면 힛갤 정도는 문제없을 거 같다. 가만. 근데 너무 무거운거 아니야, 이거? 아무리 금이라고는 해도 주먹보다 조금 더 큰 다기 모양의 그릇 치고는 무게가 장난이 아니었다. 납이야 뭐 금이랑 별 차이가 없으니까 논외로 두고.
금보다 터무니없이 더 무거운 물체인가....
"우라늄이나 플루토늄인 건가."
혼잣말로 중얼거리고 3초 기절했다.
그럴리가 없다.
그. 럴. 리. 가. 없. 다. 구. 시. 발. ㅋ.
나는 금그릇의 뚜껑을 열어보려고 했다. 만약, 이 안에 금빛이 숨넘어가도록 넘실거린다면 이 자리에서 마음놓고 떡실신할 수 있다. 하지만 텁텁한 잿빛의 무언가가 기묘한 형광빛을 발하고, 양 손에서 빨간 물집을 일어난다면....
"에...에이 서서서서서서, 서설마."
애써 대범하게 리액션을 취하려고 해도, 정작 노래방에서는 나오지도 않던 바이브레이션이 이제서야 오토매틱으로 구현된다. 오랫동안 닫혀있어서 그런지 더럽게 뻑뻑한 금그릇의 뚜껑은 한참을 힘 주어도 열리지 않았다. 손 끝이 새빨갛게 부풀어오른다. 그냥 힘을 많이 줘서 그런거겠지. 암.
동해바다 MT간 대학생, 우연히 방사능 물질 집어들고 사망. 3대는 우려먹을 개그스레다. 난 인터넷에서 불로장생하고 싶지 않다고. 1분 전의 환희는 어디로 증발해버린 채, 나는 그렇게 금그릇과 한참동안 씨름을 했다. 아예 열리는 기색이 보이지 않자, 특유의 이과 정신으로 금그릇을 꼼꼼히 뜯어보기 시작했다. 원래라면 처음 발견했을 때 보여야 했을 반응이었지만 내 정신머리는 거기까지 태클을 걸 여유가 없었다.
좀 밝게 보려고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지만 불이 들어오지 않았다.
밧데리가 다 되었거나, 뭔가 강력한 방사능으로 인해 고장났거나.
(씨.. 씨발...)
소설이라면 몇 번은 죽어야 할 복선이 이중 삼중으로 깔리니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이걸 쥐고 가로등이 있는 거리까지 뛰어가고 싶었지만, 혹시나 떨어뜨렸다가 E=mc²의 찬란한 증명과정을 전신으로 느낄 수도 있어서 포기했다. 눈을 찡그리면서 손 끝의 촉각을 이용해 더듬어본 결과, 금그릇은 처음부터 뚜껑이 몸체와 붙어 있었다. 이래서는 박살을 내지 않으면 내부를 확인할 수 없다. 당장 터미널로 달려가서 서울행 버스에 몸을 실고 종로 귀금속상가로 쳐들어가 내부검증을 받고싶은 충동이 내면에서 날뛰었다.
그냥 이걸 곱게 갈아서 커플이란 동물이 군락을 이룬 명동 시내에 흩뿌려볼까 생각하던 그 때, 인류보편의지가 두 번째 전파를 시간차로 보내주었다. 정수리에서 시작해 배꼽을 훑고 후장을 관통하는 벼락같은 S라인 충격이 느껴졌다. 아까부터 금그릇 금그릇 노래를 부르던 이것은, 내가 예전부터 알고 있던 그것과 몹시 흡사하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역시 영특한 나의 두뇌. 좃초딩 때 일요일 아침마다 보았던 디즈니 만화동산의 기억을 트루컬러로 눈 앞에서 되살려냈다. 분명히 알라딘에서 나왔던 그 뭐시기랑 이 금그릇은 판박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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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대 신입생 때 썼던 소설.
리만 브라더스 나오는 걸 보면 알 수 있다시피 쓴지 3년 넘은 글인데
오랜만에 읽어보니 재밌어서 조금 수정하고 올려봄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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