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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갈 데가 없다

만듦


"엄마, 엄마. 김밥은? 소세지는? 계란말이는?"
"얘는 참! 다 만들어 줄테니까 공주님은 잠깐만 TV 보면서 기다리고 있어요! 아빠랑 같이!"
"네에~"
여섯살 먹은 딸아이가 나에게 달려온다. 벌써 여섯살. 처음 나올때만 해도 이 조그만 녀석이 어른이 되는건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는데, 이제 슬슬 실감이 간다.
"아빠, 아빠! 뽀로로 봐요 뽀로로!"
"뽀로로 정말 좋아하는구나! 근데 어제도 하루종일 뽀로로만 보지 않았니?"
"그래도 뽀~로~로! 뽀로로가 좋단말이에요!"
원래 이 시간쯤이면 서울 대공원을 향해 4호선 지하철을 타고 있을 시간이지만 나도, 아내도 모두 늦잠을 자버렸다. 나중에 갈까 생각도 했지만 딸아이와의 약속도 있으니 그냥 가기로 결정. 아내가 도시락을 만드는데 1분에 한번씩 주방을 왔다 갔다 한다. 아무래도 오늘만큼은 그렇게 좋아하는 뽀로로보다 도시락 반찬이 더 궁금한가보다.
"여보! 아직 멀었어?"
"조금만요~ 이제 담기만 하면... 으앗!"
짝 소리와 함께 들려오는 아내의 비명소리에 깜짝 놀라 주방으로 가려고 일어나는데 딸 아이의 목소리가 들린다.
"찰지구나!"
잠시동안 아내의 딸아이를 향한 잔소리가 이어진다. 어디서 그런말을 배웠니. 혹시 아빠한테 배웠니. 그것도 아니면 혹시 유치원 선생님이니. 도대체 저렇게 어린 아이가 어디서 저런 말을 배워오는건지.


여러가지 문제가 있었지만 다 해결하고 출발. 지하철을 타고 20분여를 달려 대공원에 도착했다.
"아빠, 아빠! 코끼리 열차!"
"음... 리프트를 타는게 더 좋지 않을까?"
"여보, 얘 높은거 무서워하잖아요. 코끼리 열차 타요."
사실 내가 리프트 타고 싶었는데. 역시 애가 생기니 아내의 우선순위는 내가 아니라 아이가 되었다. 둘 사이에서 낳은 자식이니 아이가 우선이라는걸 머리로는 분명히 이해하는데 아무래도 가슴은 아직까지 받아들이지 못 하는것 같다.

두시간쯤 지났을까. 슬슬 점심때도 되었고 지치기도 해서 점심 도시락을 먹기로 했다. 마침 호숫가 옆에 있는 잔디밭에 아무도 없길래 돗자리를 깔았다. 나 먹으랴, 애 먹이랴, 아내 먹이랴 정신없는 한때가 지나고. 따뜻한 햇살과 향긋한 봄바람을 벗삼아 누워있던 나는 잠이 들었다.

한숨 자고 일어나니 아내가 날 마구 흔들고 있다.
"여보... 왜이래?"
"애...애가... 우리 공주님이..."
"아니 그러니까 애가 왜?"
"호..호수에..."
호숫가로 뛰어가보니 애가 물에서 허우적 대고 있다. 아무래도 호수에 떨어트린 스케치북을 주우려다 물에 빠졌나보다. 내 아이가 물에 빠진걸 확인 한 순간 판단력이 흐려진 나는 신발 벗는것도 잊은채 물에 뛰어들었다.

위기도 있었지만, 어떻게든 아이를 뭍으로 올려 보낼 수 있었다. 평소에 운동좀 해 둘걸.

아이를 올려 보내고 나도 뭍으로 나가려는데 갑자기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아이참, 장난하지 말고 빨리 나와요 여보."
"아니 장난치려는게 아니라 좀 힘드네..."
아내가 혼자서는 힘들다고 판단했는지 휴대전화를 꺼내 119에 전화를 걸었다. 아내가 뒤돌아서서 상황을 설명하는 사이, 그나마 남아있던 힘조차 빠져나가며 몸이 무거워졌다. 딸 아이는 그늘에 누워있고, 아내는 화를 내며 전화를 하고 있고. 지금 나를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살려달라는 말이 목까지 올라왔지만 도저히 소리가 나지 않는다. 차갑게 느껴지던 물에게서 이젠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이젠 아내의 목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하늘에 뜬 일곱빛깔 무지개는 점점 파란색으로 변해간다.

 아무것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느껴지지도 않은 그 순간. 나는 생각하기를 그만두었다.

그리고 난 죽었다.


시작 : 03시 2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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