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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갈 데가 없다

만듦

2011/06/06 산다이바나시

2011.06.06 17:23

롤링주먹밥 조회 수:405

상자 수박 살인

15:14 시작

한적한 시골. 덜컹거리는 열차. 눈앞에 펼쳐지는 끝없는 선로.
소년이 의지할 거라고는 볼품없는 가방과 손에 적힌 메모 하나뿐.

아저씨는, 어떤 사람일까?

그것은 눈앞에 펼쳐지는 가슴 탁 트이는 풍경 조차 잊게 만드는, 소년이 품는 순수한 의문.
앞으로의 생활을 상상하는 소년의 가슴 속이 흔들린다.

덜컹, 덜컹, 덜컹....

열차가 흔들리는 걸까, 내가 흔들리는 걸까. 그런 멋쩍은 생각을 하는 소년의 눈동자에는 기대와 불안이 섞여 있었다.
소년의 손에 들린 메모에는 한줄의 주소가 적혀있었다. 


- 덥다.....

언제까지나 이어질 것만 같았던 기찻길도 끝나고, 목적지에 내린 소년이 내뱉은 첫 한마디는 불평이였다.
역 개찰구를 나오자 마자 보이는건 신록이 우거진 시골길. 포장도로는 커녕 자갈길이라도 있을까 말까한 시골이다.
어째서 이런 곳에 사는 사람이 굳이 자기를 거두어 준건지 소년을 알 수 없었다.
메모에 적힌 주소를 보며, 한적한 오솔길을 따라 걷는다.
신선한 공기와 풀내음이 가득한 길을 걸으며 소년은 생각한다.
태어나서 처음이 아닐까. 이런 소소한 시간을 맛보는건.

소년은 고아였다.
정상적인 이야기는 아니지만 부모는 아이를 고를 수 있다. 하지만 아이는 부모를 고를 수 없다.
고아원에 있는 아이들은 그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면서 자랐다.
자신이 선택한 것따윈 하나 없는데, 사회에선 전부 우리가 나쁘다고 한다.
부모없는 것이랑 친하게 지내면 안된다. 근본없는 것들이 하는짓이 그렇다.
자신이 어떤 선택을 해도, 그 꼬리표는 평생 지워지지 않았다.
소년이 속한 고아원에서는 사회적응의 일환으로 원아들을 근처 초등학교에 입학시키는 제도가 있었다.
물론 사회적 비판을 고려해 지정된 초등학교에서는 고아와 일반학생간의 차별이 없도록 철저히 교육시키고 있었지만,
그건 단순히 교육이였다.
아이들의 순수한 악의는 어른들의 그것을 뛰어 넘었다. 어른들의 눈을 피해 음습한 괴롭힘을 하는게 재밌는 놀이로 치부되고 마는 나날.
원장님이 싸주신 도시락이 온전한 상태로 소년의 입으로 들어간적은 손꼽을 정도다.
친구라고는 한명도 없었다. 그리고 어른들에게 말해봤자 믿어주지 않는다. 그리고 뭐든지 내가 잘못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리고 내가 그린 그림도-

아.

어느새 소년은 걸음을 멈춘다. 
눈앞에는 주소에 적힌 곳의 이름이 달린 농장이 있었다.
소년의 새로운 인생이 시작될 장소는, 한적하고, 끝없이 넓고, 무엇보다....
비료냄새가 났다.

- 어서오렴. 길은 헤메지 않았니?
  내가 직접 마중나가야 했었는데 미안하구나.
  자, 짐은 이리주렴, 네 방으로 안내해줄게.

어른이다. 날 맡아주겠다고 한 아저씨. 아마도... 앞으로 내가 아빠라고 불러야 할 사람.

아니에요. 저...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 그래. 잘 지내보자꾸나. 

나쁜 사람은 아닌거 같았다. 방을 안내 받으면서 소년은 이것저것 물어보기 시작했다.
긴 여행의 피로 때문인걸까, 긴장하며 나눴던 첫 인사를 제외하곤 대화가 머리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단 하나 머리속에 남아있는 기억은...
여기가 수박 농장이라는거.

정신없이 골아떨어진 첫째날이 그렇게 지나고, 차츰 소년은 아저씨와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아저씨는 굳이 소년이 고아였던 사실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았고, 소년 또한 스스로 그 화제를 꺼내는 일은 없었다.
타인보다는 가깝고 가족보다는 먼 관계.
서먹서먹함이 가시지 않은 두 사람은 오랜만에 만난 친척과도 같은 분위기 였다.

시골에서의 생활은 상상이상으로 평화로웠다.
방학인 지금은 농장에서 멀리 떨어진 시골학교에 가야 할 일도 없었고, 하는 일이라곤 수박재배에 관해서 배우는 정도였다.
이렇게만 보면 그냥 풀과 다를바가 없는데, 아직 할일이 많다고 했다.
수박 순치기, 순돌리기, 수박꽃을 수정시키기...
밭일은 커녕 삽한번 잡아본적 없는 소년에게 농장일은 버거웠지만, 아저씨는 하나하나 친절히 가르쳐 줬다.
수박 순이 점점 자라 올라오는것 처럼, 소년의 마음속에 있던 경계심도 점차 사라지는것 같았다.

그렇게 새로운 생활에 익숙해져 갈 무렵, 소년은 몇가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농장일을 가르쳐주고 일상회화는 거리낌없이 하고 있지만, 아저씨는 결코 자신의 과거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사람에겐 누구나 말하고 싶지 않은 비밀이란게 있다지만, 정말로 마음을 터놓기 위해선 아저씨의 이야기도 듣고 싶었다.
언젠가 한번 용기를 내어 아저씨는 옛날에 뭐하시던 분이셨어요? 하고 물어본 적이 있었다.
그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채, 소년을 쏘아 보았다.
그리고 소년은 그의 눈빛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었다. 이 농장에 온 뒤론 한번도 본적이 없었던 차가운 눈초리.
그 뿐만이 아니였다. 농장의 구석에는 오래된 창고가 하나 있었는데, 아저씨는 소년에게 무슨일이 있어도 그곳에 들어가면 안된다고 했다.
어째서 자신이 이런 시골농장에 거두어 진지도 모른채, 양아버지의 과거도 모른채, 거기다 행동의 제약이 걸린채로 소년은 매일매일 살아가고 있었다.
순간 고아원에서 자주 듣던 이야기가 머리속을 스쳐 지나갔다.

- 고아들을 몰래 데려가서는, 아무도 모르게 죽이는 살인범이 있다- 

이야기를 들었을때는 입양되어 나가는 아이들에 대한 비아냥거림으로 생각했지만, 막상 자기가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소년은 어쩔 줄 모르는 기분이 되었다.
조건은 거의 완벽했다. 고아원에서 멀리 떨어진 시골. 무슨 일이 일어나도 알지 못하는 넓은 농장. 
피비린내보다도 역한 비료냄새. 그리고 아무도 들어 갈 수 없는 창고-
학교에서 받았던 음습한 공포와는 또 다른, 정체를 알 수 없는 거짓평화로 인한 공포를, 소년은 맛보고 있었다.

소년의 의심에 쐐기를 박은건, 아저씨의 수상한 행동이였다.
어둑어둑한 저녁, 아저씨가 '무엇인가'가 들어있는 상자를 들고 창고로 들어가는게 보였다.
비록 멀리 있어서 잘 보이진 못했지만, 소년은 그 상자에 붉은색 액체가 묻어있는것 만은 똑똑히 보았다.
더 이상 여기에 있어선 안된다. 이대로 아무것도 알지 못한채 죽을 순 없다.
공포에 떨기만 하다 끝나는 인생이라니, 절대로 인정할수 없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아저씨를 믿어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그렇게 까지 잘 해주던 사람이 정말로 그런 짓을 하는 사람인걸까. 한번만 믿어보고 싶었다.
이젠 뭐가 어떻게 되는건지 알 수가 없었다.

다음날 아침 소년은 마음을 다잡고 아저씨에게 말을 건넸다.

아저씨. 그 상자 뭐에 쓰시는 거였어요?

- 상자...? 무슨 얘기를 하는거니?

그... 창고에 가져가시는거 말이에요. 어제 얼핏 보이길래...

- 너... 그걸 본거야? 봐 버린거니?

에..? 아뇨.. 일부러 본건 아니고.. 아..

- 어쩔 수 없구나. 나중에 보여주려고 했는데. 이래서 성질급한 아이는...
  조금 이르지만 어쩔 수가 없지. 좀 따라와라.

으... 싫... 싫어!!!!

소년은 그대로 뛰쳐 나간다. 왜 내 인생은 이렇게 되는걸까. 내가 고아라서? 
내가 정할 수 없었던것 때문에 내가 정할 수 있는게 전부 사라진거야?
이대로 죽을 순 없어... 싫어 싫어 싫어 싫-

탁.

언덕을 내려가던 소년의 발끝이, 돌부리에 걸려 크게 넘어졌다. 소년의 몸이, 계속해서 굴러 떨어진다.
내 인생은 마지막 까지도 이렇게 비참한거야...?
희미해져 가는 의식속에서. 소년은 자신의 뒤를 쫒아온 한 남자의 모습을 보았다.





- 정신이 들었니?

제일 먼저 귀에 들어온건 듣고 싶지 않았던 목소리.
소년은 더이상 도망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 이젠 끝이구나.
이어서 눈꺼풀을 들어올리자.
그곳에는

작은 화실이 있었다.

어...?

- 사실 작품이 완성되면 너한테 보여주려고 했는데... 어젯밤에 화구상자를 집어넣는걸 보였을 줄이야.. 하하..
   그림을 잘 그리는 편이 아니라 내가 납득 할 수 있는 작품이 완성되면 널 부르려고 한건데...
   뭔가 오해를 하게 해버리고 만거 같구나.

눈앞에 펼쳐진건 '빨간' 수박그림. 반으로 잘린 단면을 그린듯한 그림이 몇폭이나 있었다.
그 외에도 시골풍경을 그린듯한 수채화가 몇개나-
그건... 물감이였던거야? 화구상자라고...?

- 사실은 네 생일이 얼마 안남았다고 해서 그때까지는 완성시키려고 했었어.
   내가 워낙 말주변이 없어서 그때 여러가지 얘기해주려고 했었는데..
   
아저씨는 이상한 사람 아니죠...? 저한테 무서운 일 하려는거 아니죠...?

- 내가 너한테 뭐하러 해코지를 하겠니? 나랑 같은 처지인 너를 데려왔으면서.

같은처지...?

- 사실 아저씨도 너랑 똑같은 고아 출신이란다. 그것도 같은 고아원 말이야.
  조금만 옛날 얘기를 하게 해주지 않을래?
  지금은 이런 시골에서 수박이나 키우고 있는 농부 아저씨지만, 나도 젊었을적엔 화가가 되고 싶다는 꿈이 있었어.
  아, 물론 수박이 싫다는건 아니야. 수박은 훌륭한 과일이거든.
  예술이라면 출신도 배경도 상관없이 재능으로만 승부 할 수있다고 생각한 난, 거침없이 그림을 그렸지.
  그리고 자신있게 대회에도 작품을 출품했어.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거 같니? 
  내가 그린 그림은 장려상.
  그위로 금상,은상, 동상, 특선, 가작 마져도 전부 예술가 집안의 도련님들이 받아갔지.
  결국 예술의 세계에도 내가 있을 곳은 없었어.
  의기소침해진 난 여기로 내려와선 수박이나 키우며 지내는 유유자적한 삶을 살게 되었지.
  지금도 그림은 좋아하지만 말이야.

근데 왜 저한테 그림을...?

- 원장님이랑은 잘 알고 지내는 사이거든. 학교에서 괴롭힘받는 녀석이 있는데, 어떻게든 안될까... 하고 고민하고 계시더라고.
   고아라는 이유만으로 울어야하는 사람의 괴로움은 내가 잘알고 있었지.
   게다가 그 녀석은 그림 그리는데 소질이 있다고 하니, 내가 거두지 않을 이유가 없더라구.
   그림 이야기는 네 생일이 지나면 하려고 했건만... 하하..

소년은 혼자서 두려워 했던 사실이 부끄러워졌다. 이 사람은 누구보다 내 괴로움을 알고 있는 사람일텐데,
그런 사람은 의심하다니...  한번이라도 아저씨에게 괴로움을 털어놓으려고 하지 않은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 갑자기 이런 얘기해도 혼란스러울 뿐이겠지...
   자, 이리로 와보렴. 여기 앉아서 붓을 잡아봐. 그래.. 수박을 그려보는건 어떻겠니? 지긋지긋할지도 모르겠지만.
   수박처럼 좋은 과일도 없거든. 얼룩덜룩 줄무니로밖엔 보이지 않지만 그 속엔 수많은 씨앗이란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녀석.
   부모없는 자식들로만 보이는 우리에게 딱 맞는 과일이잖아?

소년은 화구상자에 손을 뻗는다. 신기하게도 더이상 두려움은 느껴지지 않았다.

- 그래. 그렇게 그리는거야. 이거 내가 가르칠 필요성도 없겠는데?
   그럼 조금 이르지만 들켜버린김에 생일 선물을 줘야겠네...

아저씨가 내밀은 건 한번도 사용하지 않은 새 화구세트였다.

- 새삼스럽지만 우리집에 온걸 환영한다. 아들아.


바보. 소년은 자기 자신이 바보같았다. 뭐가 마음을 털어놓기 위해선 아저씨의 이야기도 듣고 싶다는 거야.
이렇게도 자신을 생각해 주는 사람이 옆에 있는데, 뭐가 살인이고 뭐가 공포야.

이런 한심한 자신이라도, 지금이라면 이 한마디를 할 수 있을것 같았다.
여태까지 쭉 하고 싶었지만 할 수 없었던 말 한마디.


아빠. 고마워요.

 










17:22 종료

아 원래 어두메 다크한 소재 잘 안쓰는뎅 살인은 너무 힘들당

퀄이 유감스러워서 죄송합니다 고갱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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