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GM) 중2병 리즈시절에 쓴 소설 - "허위의 판타즈마" 제1화 (2)
2012.01.25 11:59
어릴 때부터 동경해왔던 그 사람에 비하면, 나같은 능력으로는 뭘 저지르기도 어렵다. 홀홀단신으로 조직폭력배의 본거지를 초토화 해버리는 아이디어는 역시 성격에 맞지 않아서 그만두었다. 요란하게 와장창 저지르는 스타일은 거부반응이 있는 듯 하다. 흑막의 뒤에서 낮은 소리로 세계를 요리하는, 인텔리하면서 카리스마 있는 사람이 되고 싶은게 소원이다만, 현재 손에 쥐게 된 이 능력은 안타깝게도 뭐든치 파괴하고 싶은 전기톱같다.
"휴우...."
그저 아무 생각없이 완만한 오르막길을 넘는다.
마음만큼이나 우울한 풍경이 탁 트여진다. 주머니 속에 넣고 깜박한 초콜릿처럼 흐물흐물하게 휘어버린 철교들과, 중성자 조사로 인해 검게 그을려진 콘크리트 교각들이 강 중심류에 거꾸로 처박혀있다. 강 너머 강북은 불과 두 달 전에 통금조치가 풀렸을 정도로 초토화되었는데, 가이거 수치가 인체 유해량을 넘길 듯 말듯하니 사람의 발길은 없다고 해도 무방한 폐허다.
때마침 출발하려는 나룻배-라고는 해도 모터보트다-를 타서 쉽게 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손목시계의 패널이 불그스레 변했다.
군데군데 유난히 방사능 낙진이 심한 곳이 있는데 아마 이 근처인가보다.
"어이 학생, 무슨 일로 위험한 곳에 온거냐?"
배를 운전하는 아저씨가 말을 걸어온다. 군인 분위기가 풍겨져오는 스포츠틱한 헤어스타일과, 같은 남자가 봐도 감탄할 튀어나올 역삼각형 몸매의 다부진 근율질이 셔츠 단추가 터질 듯 팽팽하다.
"아... 학교 과제 조사에 도움이 될까 싶어서요. 하핫."
물론 거짓말이다. 내 말에 아저씨는 "강기슭에 도착하면 이 지도를 봐. 여기 붉은 마커가 위험지역이야, 하고 설명까지 해주며 품속에서 여분의 지도를 꺼내 준다. 아마 나처럼 겁과 개념이 없는 사람을 위해 국가가 만들어준 것 같다. 고맙습니다, 하고 꾸벅 인사한 나는 건너편에 도착하자 마자 약속장소로 향하기 시작했다.
오던 길에 사온 이런저런 물건이 담긴 작은 가방을 어깨에 걸치고 지도를 잘 보며 걸어간다. 6차선으로 쭉 뻗은 아스팔트 도로는 누가 양탄자를 밟고 미끄러진 것처럼 주름이 물결치듯 일어있다. 전신주는 줄줄이 넘어져 있는 것과 더불어, 검은 그물 같은 고압전선이며 통신선이며 온갖 전선줄이 바닥에 널려서 걸어가는 게 의외로 힘들다.
미쳤군, 약속장소를 이런 곳으로 정하다니.
와드득 밟히는 유리조각을 무시하고 툴툴거리며 걸어갔다. 내가 서둘러서 일찍 가는 이유는 '낮에 가면 더우니까'였는데, 현명한 판단이었다고 확신한다. 발 아래를 조시미하며 한 걸음씩 내딛는 것도 신경질이 나는데 날까지 더우면 돌연사할 수도 있다.
"그나저나, 뉴스에서 나온 거보다 심각하네."
중성자탄이 투하된 건 중구 단 한 곳뿐이라고 알았는데, 여기 용산도 꼴이 말이 아니다. 아차, 휴대폰을 꺼냈다. 무정하게도 통화권 이탈이다. 폐허에서 길이라도 잃었다가는 구조될 길이 없다. 지도에 집중하면서, 길거리 곳곳에 흩어진 백골은 못본 체 그저 걷기만 한다. 어디선가 작게 들려오는 "매앰─── 쓰르르르..." 매미 소리만이 이 황폐한 곳에서 느낄 수 있는.
나 이외의 생명체.
슬슬 폐허 감상도 지루해지고 아스팔트가 달아오르기 시작할 10시 정각에 약속장소에 도착한 나는 김이 탁 풀렸다. 구 서울역이라면 아마도 이 KTX역을 뜻하는 것일...까나?
아니다. 직감적으로 고개를 왼쪽으로 돌렸다. 뭐, 직감이라고 해 봤자 반반의 확률이지만, 전화를 건 여성으로 추정되는 사람이 한참 전의 서울역──그러니까 폭격 전에는 예술관──광장에 서 있었다. 키하고 체형을 보면 아까 마주쳤던 중2,3 뻘인 듯 한데, 내가 아는 사람 중에는 여자, 게다가 이 곳을 약속 장소로 잡을 지성을 갖춘 10대 여자애는 절대 없다.
여름도 절정으로 치달을 때이지만 이 여자애의 옷은, 이런 전장의 손톱자국과 어울리지 않는, 갈색으로 통일된 긴팔의 캐주얼한 의상이다. 누구를 초조하게 기다리는지 폐건물의 그림자 아래에서 손톱을 잘근 씹고 있다.
"여어."
왼손으로 가방을 지고 오른팔을 흔들어 시선을 끌었다.
여자애는 이 쪽으로 얼굴을 홱 돌리더니───
"하아아~ 이게 누구야." 하고, 굉장히 건방진 리액션을 취한다.
"나야말로 하고 싶은 말이다. 어째서 이 곳에서 만나자고 한 거야? 아니 그보다 넌 누구야?"
"글쎄... 네가 무슨 말을 하는 지 모르겠는데. 난 널 몰라. 너를 이 곳으로 부른 건 내가 아니야."
손을 허리에 짚고 날 올려다보며 뻔뻔하게 말한다. 양달에 서 있는 내 편이 그늘이 되어줘서 여자애를 가리키는 형상이다. 그보다, 나를 부른 건 자신이 아니라고 말하렸다.
"그럼, 여기처럼 으슥한 장소에 왜 네가 있는 거지?"
"그야..."
여자애는 숏컷인 머리를 벅벅 긁으면서 중얼거렸다.
"설명하긴 힘들지만───순간 이동 비슷한 거야."
"응?"
"난 이 세계의 사람이 아냐."
....후우... 뭐냐 이거.
"너, 혹시 일사병?"
"아니야! 아야── 왜 갑자기─ 어디로 끌고 가는 거냐?!"
시끄럽게 칭얼거리는, 살짝 맛이 간 듯한 여자애의 손을 잡고 구 역 본관으로 끌고 들어간다.
뭐, 긴장되거나 두근거리는 일이 아니라서 실망했지만, 여기서 소풍 분위기를 내는 것도 그럭저럭 삶의 스타카토가 되겠지. 게다가 이 여자애는 나사라도 하나 풀린 것 같은 소리만 중얼거리지만 말벗으로 하루 정도는 같이 있어도 재미있을 듯 하다.
"자자~ 이쯤이면 되려나."
2층 휴게실에서 멈춰선 우리는 통유리가 기적적으로 깨끗하게 날아가버린 뒤의 풍경에 잠시 할말을 잃었다. 지평선 끝까지 회색빛 폐허에, 잡초 하나 없는 경광에는 「삭막」 그 외의 모든 이미지는 거세된 차가움만이 있다. 호오, 여자애가 정신이 팔려있는 사이에, 가방에서 주스캔 두 개와 두툼한 신문을 짝을 맞춰 꺼냈다.
"보기보다 준비성 있네."
여자애는 빨간 플라스틱 의자를 신문지로 탁탁 턴 뒤 그것을 깔아앉았다. 아무리 뜯어봐도 나보다 어려보이는데 처음부터 말을 놓으니 그러려니 싶어서 나는 네네, 하고 맞받아친뒤 옆자리에 앉았다. 하늘은 푸르고 부드러운 바람이 불어온다. 느긋하게 캔뚜껑을 딴다. 옆에서는 "내 이름 혹시 알아?" 뜬금없이 질문을 해온다.
"아니. 알 턱이 없잖아."
"그치만 난 너를 아는데. 헤에──섭섭한데, 교빈 군?"
"비꼬는거야 놀리는거야? 이 쪽은 초면이니까 너도 이름 정도는 밝혀야 예의라고."
"아─── 내 이름은 정다빈이야."
다리를 앞뒤로 흔들흔들, 머나먼 풍경으로 시선을 향하는 다빈은.
"골치 아픈 일에 얽혔는 것 같으니까, 날 좀 도와줘. 그 전화과 관련된 일이야."
진지한 목소리로 말한다.
"이 세상은 「급조」된 세상이야. 아마 '서민'이의 의식을 구성한 듯 하지만, 확실한 건 몰라. 아마 여기가, 연합국의 공격을 받은 한국연방의 수도인 서울... 맞지?"
"당연한 소리지. 폭격이 반년 가까지 계속되고 있잖아."
이름이 '다빈'인 이 애, 산에서 도를 닦다가 방금 하산했을 수도 있다. 상황이나 정신상태를 보면. 왠지 답답해서 손에 쥔 캔쥬스를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너는 어릴 때, 알 수 없는 생명의 은인에게서 구해져 생사의 경계에서 돌아오게 되었고, 사랑하는 여동생과는 얼마전 연합국의 침공 때 헤어져서 현재 생사는 불명. 부모님은 연합국의 끄나풀에게 목숨을 잃었고, 여동생을 찾으러 너는 네 배짱만 믿고 학교까지 그만둔 뒤 한강 이남 지방을 전전하고 있다... 대충 이런 걸로 기억하는데. 어때, 맞아?"
술술 말을 풀어나가는 다빈은 할 말을 다하자 나를 똑바로 쳐다본다. 맞고 자시고, 할 것도 없다. 기분 나쁠 정도로 정확하다고. 와아 ─ 신기하다. 역시 도를 닦은 사람은 대단하다아아...?
잠깐잠깐─────
"너, 너너너너어, 스토커냐앗?!!"
나는 앉은 자세에서 비공인 세계신기록 수준의 점프력으로 펄쩍 뛰었다.
"내, 내 과거를 어떻게 아는 거야?! 내가 그 분을 만난 건 평생의 비밀인데! 나 술김에 헛소리 했었나? 무슨 말이지, 난 술은 입에 댄 적도 없잖아─ 그럼 잠, 잠꼬대? 너 내 잠꼬대도 엿들었어?!"
"침착해, 침착. Calm down. 그렇게 방방 뛰다가 건물 무너져, 교빈아."
상황은 반전, 되어서.
다빈이가 나를 달래는 분위기가 되어버렸다.
"이 정도는 말해야 내 말을 믿을 거 같았어. 어때, 이제 날 믿을 수 있겠니?"
"으-응? 뭘 믿어야 할지 선택지를 제시해야지."
"아아... 내가 이 세계 사람이 아니라고 했던 말. 제일 처음에 말했는데 기억 안나?"
그 말을 뜻한 거였나. 하도 말도 안되는 소리길레 듣는 즉시 에빙하우스 망각 곡선의 수렴점으로 날려보내 버렸는데.
"진짜야, 그거. 나는 이 세상의 창조자와 친구 사이인데, 악마와 내기를 잘못 해서 그만 이 곳에 빨려와버렸어. 내기를 걸 때에는 조건에 조심해야 하는데 깜박 속았지 뭐야."
"차... 창조자? 악마?"
당최 무슨 헛소리인지 갈피도 못 잡는 소리를 한다.
"못 믿겠──"
"믿어! 무조건 믿어! 안 믿으면 죽어!"
욱, 협박까지. "우웅-!" 하면서 주먹을 꽉 쥐는 모션을 취하는데 무섭다기보단 귀여울 따름이지만.
자리에서 일어난 다빈은 또 머리를 긁적이며 말한다.
"믿지 않는 선택지는 없어. 이 세상은 '안서민'이라는 내 친구의 상'상'이 세'계'에 간섭되어서 생긴 급조된 세상이야. 시작도 끝도 없다는 점에서는 신세계나 다름없지만, 오로지 이 세상의 창조자가 의도하는 대로 일이 굴러가게 되는게 이 세상의 현실. 내가 이 곳에 빨려온 이상, 서민의 상상에서 주인공 역할을 해야 돼. 너하고 나, 둘이 이 세상의 「주인공」이야.
주인공의 친구나 지나가는 행인 따위가 아닌, 당당한 주인공이라고. 자부심을 느끼든 말든 상관 없지만, 교빈아, 세상의 수레바퀴를 가속시키자. 나 지금 무지하게 급하니까."
이 글을 05년도인가 06년도에 썼으니까 쓴지 6년은 되었음
줄바꿈이랑 오타같은 거 빼고는 그대로 옮김
나도 이거 쓴거 완전 까먹고 있었는데 타이핑으로 옮기면서 보니까 내용 신박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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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저나 이거랑 비슷한 소설을 구상했던 게 기억이 나는 것 같기도 하고요…그냥 머릿속에서 지워버렸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