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자얽힘, 초코쿠키, 고목] 나쁜짓 딱 한 번만
2012.02.19 04:53
당신이 눈을 뜨면 보일 이 고목 아래가 당신을 처음 만난 곳입니다. 그때는 이렇게 아무런 잎도 없이 허름한 고목이 아니었습니다. 기억나나요? 무더운 날이면 커다란 그늘을 만들어주던, 이파리 사이사이로 비치는 햇살이 눈 부시고 아름다웠던 그런 나무였습니다. 당신이 오기 전에도 저는 그 아래에서 책을 읽기도 했고, 낮잠을 자기도 했습니다. 조용한 저만의 낙원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만의 낙원에서 당신의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저는 나무 위를 올려다보았고, 그곳에는 당신이 있었습니다. 당신은 웃으면서 내려갈 테니까 잡아달라고 했습니다. 참으로 소설과 같은 만남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평범한 만남은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좋은 만남은 아니었습니다.
당신은 제 위로 뛰어내렸습니다. 저는 그걸 제대로 잡지 못하고 넘어졌습니다. 당신은 환하게 웃으며 미안하다고 했습니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나쁜 말을 할 수는 없었으므로 저는 괜찮다고 말했습니다. 당신은 여전히 환하게 웃음 짓고 있었습니다.
당신은 그 이후로 매번 이곳에 책을 들고 왔습니다. 처음에는 저만의 낙원에 거리낌 없이 들어오는 당신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나쁜 짓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나쁜 말을 할 수는 없었습니다. 당신은 항상 웃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웃는 얼굴에 저는 침을 뱉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당신은 매일 왔습니다. 저도 모르는 사이 당신의 웃는 얼굴은 이 낙원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생각해보니 나쁘지는 않았기 때문에 저는 그대로 내버려 두었습니다.
당신은 저와 현저하게 달랐습니다. 저는 언제나 무표정이었지만, 당신은 언제나 웃고 있었습니다. 제가 오만과 편견을 읽고 있을 때, 당신은 솔라리스를 읽고 있었고, 제가 문학 개념어와 논리적 해석을 읽고 있을 때, 당신은 파인만의 물리학 강의를 읽고 있었습니다.
자연스레, 우리는 책을 바꿔 읽기도 했고, 서로 이해하지 못한 점을 질문했습니다. 저는 당신에게 《폭풍의 언덕》의 주인공 캐시의 행동을 당신이 납득할 수 있을 정도로 자세하게 설명했으며, 당신은 저에게 초코 쿠키와 모카 쿠키를 이용해 양자얽힘을 설명해 주었습니다. 당신의 설명을 저는 가끔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언제나 웃는 당신과 친해지고 싶었기에 당신에게 나쁜 말을 할 수 없었습니다. 당신도 똑같을 줄 알았습니다.
그렇게 책을 바꾸면서, 우리의 표정도 살짝 섞였습니다. 당신은 종종 무표정이 되었고, 저는 종종 웃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은 자다가 눈을 떴을 때 당신이 내 무릎에 누워서 자고 있었습니다. 모른 척 그냥 일어날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습니다. 당신의 자는 얼굴이 아름다웠기 때문에 당신의 잠을 깨우는 나쁜 짓은 하지 못했습니다.
어느 날은 나무 위에 숨어있다가 저를 놀래키기도 했습니다. 매번 깜짝 놀랐고, 당신은 나무 위에서 내려오지 못하겠다며 잡아달라고 했습니다. 어느새 당신을 익숙하게 잡을 수 있었기 때문에 나쁜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나무 위에 올라가지 말라는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마치 요정과 같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당신이 오지 않았습니다. 처음이었습니다. 저는 불안했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 아닐까. 하룻밤 사이에 어딘가로 사라져버린 건 아닐까. 그 날은 책을 읽지 못했습니다. 잠도 들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냥 언덕에서 내려왔습니다. 집에 들어가서 당신이 양자얽힘을 설명할 때 썼던 모카쿠키와 초코쿠키를 먹었습니다. 단 음식을 먹으면 잠이 잘 온다는 말을 어디선가 들은 적 있습니다. 그래서 먹었습니다. 맛있었습니다. 하지만 잠은 잘 오지 않았습니다.
다음날, 저는 붉은 눈으로 고목 아래에 앉아있었습니다. 멀리서 당신이 올라오는 게 보였습니다. 저는 당장 달려가서 당신을 안고 싶었지만, 어리광 부리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습니다. 당신은 여전히 환한 웃음으로 어제는 어딘가 다녀오느라 못 왔다고 했습니다. 자칫 잘못하다가 당신이 화나서 영원히 떠나버릴 것 같았기 때문에 나쁜 말은 하지 못했습니다.
당신이 이곳에 오지 않는 빈도가 점점 늘어났습니다. 그 때마다 저는 붉은 눈으로 밤을 지새웠습니다. 화낼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당신을 사랑했기 때문에 나쁜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낙원은 변해갔습니다. 고목은 마치 자신을 돌봐주는 요정을 잃은 듯 점점 그 아름다움을 잃어갔습니다. 푸른 잎은 언덕 아래로 떨어졌고, 점점 앙상한 뼈만을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고목은 점점 이 낙원에서 없어져갔습니다.
마침내 고목에서 잎사귀가 모두 사라졌을 때, 당신은 말했습니다. 이제 떠나야 한다고.
왜 떠나냐고. 떠나지 말라고. 고목도 없어졌는데, 당신마저 없어지면 안된다고. 소리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러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말한다고 당신이 이곳에 머물 리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마을을 떠나기까지 열흘이 남아있었습니다. 그 열흘간 당신은 이곳에 오지 않았습니다. 당신은 미리 오지 못할 것이라고 말도 했습니다. 바빴을 것입니다. 하지만 올 수도 있었습니다. 딱 1분만, 10초만이라도 얼굴을 비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당신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저는 깨달았습니다. 당신은 저를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사랑하는 만큼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그걸 비난하지는 않았습니다. 비난해서는 안됬습니다. 다만 슬퍼할 뿐이었습니다. 저는 당신이 필요한데, 당신은 제가 필요없다는 사실이 너무 슬펐을 뿐입니다.
모든 것이 반대로 바뀌어버렸습니다. 아름답던 고목은 추하게 바뀌어버렸습니다. 당신을 미워하던 저는 당신을 사랑하는 저로 바뀌었습니다. 저에게 아무 감정도 없던 당신은 아무런 감정도 없는 당신으로 바뀌었습니다. 1은 -1로, -1은 1로 바뀌었지만, 0은 0 그대로였습니다.
그렇게 모든 것이 바뀌는 동안 저는 당신에게 나쁜 말, 나쁜 짓 단 하나도 해오지 않았습니다. 당신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저는 생각했습니다. 나쁜 짓 딱 하나만 하자고. 나쁜 짓 딱 하나면 당신도 용서해줄 거라고.
그래서 저는 딱 한 번 당신에게 나쁜 짓을 했습니다. 당신이 떠나가는 게 싫었습니다. 당신마저 이 낙원에서 사라지는 게 싫었습니다. 이 낙원에 언제나 저와 함께 있기를 바랬습니다.
그래서 저는 나쁜 짓을 했습니다.
당신도 나쁜 짓 딱 하나 했잖아요?
그러니까.
나쁜짓 딱 한 번만.
용서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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