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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갈 데가 없다

만듦

온기

2012.03.19 04:23

무언가 조회 수:230

 어릴 적, 에덴동산에 올라간 적이 있었다. 한가운데에는 커다란 사과나무가 있었고, 그곳에는 선악과가 매달려있었다. 나는 그 선악과를 따먹었고, 그 결과, 두 갈래 혀를 가진 악마에게서 진실을 볼 수 있는 눈을 받았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신으로부터는 천벌을 받게 되었다. 

 벌은 가장 불합리해야만 한다. 진실을 볼 수 있는 나는 진실을 이야기할 수 없게 되었다. 그 어떤 진실도 이야기할 수 없고, 이야기해서는 안 되는 입. 그것이 나에게 내려진 천벌이었다. 

 그리고 나는 거짓말쟁이가 되었고, 말이 없는 아이가 되었다. 


「온기」

by J.Rhee


 누군가 선생님께서 가장 아끼는 꽃병을 깨트린 사건이 일어났다. 아이들은 선생님께서 보기 전에 재빨리 수습한다고 유리조각을 주웠다. 너무 허둥대다가 한 여자아이는 유리조각에 손가락이 찔렸다. 그리고는 선생님께서 들어오시기 전에 모두 조용히 앉아있었다. 

 선생님은 들어와서는 먼저 아이들에게 오늘은 웬일로 이리 조용히 앉아있느냐고 물었다. 그리고는 꽃병이 어디 갔는지 물었다. 아이들은 열심히 이야기를 지어냈다. 하지만 급조한 이야기는 금방 들통 나버렸다. 선생님은 논리가 맞지 않는 아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찡그린 표정으로 손가락을 빨고 있는 아이를 보았고, 대충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감을 잡았다. 선생님은 쓰레기통을 확인하셨고, 그곳에는 산산조각이 난 꽃병이 들어있었다. 

 선생님은 화를 내며 누가 깨트렸느냐고 아이들을 추궁했다. 아이들은 모두 자기가 한 짓이 아니라는 듯 선생님으로부터 눈을 돌리고 있었다. 결국, 선생님은 범인이 나오기 전까지 아무도 교실을 나가지 못한다고 선언했다. 그게 진심이라는 게 내 눈에 보였다. 

 사실 그것만 보이는 게 아니었다. 오늘 아침, 실수로, 미희가 깨트렸다는 것도 내 눈에 보였다. 

 부지런한 미희는 작은 가방에 리코더를 꽂고 오늘 아침 누구보다 일찍 학교에 왔다. 미희가 뿌듯함을 느끼며 자신의 책상으로 가던 도중, 가방에서 툭 튀어나온 리코더가 꽃병을 툭 쳤다. 조용한 교실에 쨍그랑 소리가 울리고, 꽃병이 깨진 광경을 보고 겁에 질린 미희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못한 채, 교실을 도망치듯 나갔다. 그리고는 다른 아이들이 깨진 꽃병을 보고 놀라서 허둥지둥 수습하고 있을 때 조용히 들어온 것이다. 

 모든 전말이 보였지만 말할 수는 없었다. 조용히 있었다. 

 교실에 남겨진 아이들은 누가 그랬느냐며 아우성치기 시작했다. 꽃병을 깨트려놓고 나오지 않는 사람을 비난하며, 분노를 폭발시키기 시작했다. 그 비난이 거세지면 거세질수록, 미희의 얼굴은 창백해져 갔다. 미희는 가끔 덜덜 떨고 있던 입술로 누가 그랬냐고 소리쳤다. 자신을 위장시키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 모습은 모든 걸 알고 있는 내 눈에는 너무나도 어색해 보였다. 

 끝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결국, 내가 일어섰다. 모두의 시선이 나에게 쏟아지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교실 문을 열고 계단을 내려가 교무실로 갔다. 그리고 선생님에게 거짓말을 했다. 

 "제가 했어요."

 선생님은 나를 노려보더니 구석을 가리키며 무릎 꿇고 손들고 있으라고 하셨다. 나는 그대로 시행했다. 선생님은 교무실을 나가셨고, 잠시 후, 기쁨에 차서 모두 우르르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 후, 선생님께서 교무실에 돌아와서는 나에게 말했다. 자신이 아끼는 꽃병을 깨트려서가 아니라 안 한 척 거짓말을 해서 다른 학생들에게 폐를 끼친 벌이라고. 그날, 나는 대략 한 시간 동안 그렇게 벌썼다. 끝나고 가방을 들고 집에 돌아갈 때 팔이 욱신거렸다. 

 집에 돌아와서 어머니께 선생님께서 아끼는, 귀중한 꽃병을 실수로 깨트려버렸다고 말했다. 어머니는 나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으셨다. 다음 날, 어머니는 교무실에 찾아가셨고, 자초지종을 들은 뒤, 꽃병 값을 내셨다. 어머니는 나를 혼내지 않으셨다. 실수는 누구나 하는 거라고. 누구나 그런 상황이 되었으면 두려웠을 거라고. 늦게라도 용기 내서 나간 건 잘한 일이라고, 오히려 칭찬하셨다. 

 그런 어머니가 좋았다. 


 어느 날, 어머니의 죽음이 눈에 보였다. 나는 펑펑 울었다. 그런 나를 어머니께서는 갑자기 왜 우냐면서 꼭 안아주셨다. 나는 진실을 말할 수 없었다. 결국,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냥 울었다. 

 어머니는 계속해서 나를 품에 안고 계셨다. 따뜻했다. 그 따스함이 좋아서 나는 계속 울었다. 눈물샘이 말라버린 이후에도 일부러 우는 척했다. 어머니가 계속 나를 안아주기를 바라며. 조금이라도 그 따스함을 더 많이 느끼고 싶었다. 마지막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에. 

 어머니는 처음의 왜 우냐는 질문 이외에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으셨다. 차가운 무관심이 아니라 따스한 배려였다. 그 배려가 좋았다. 

 그날 밤, 결국, 나는 어머니께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잠들었다. 다음날, 어머니께서는 차에 치여 돌아가셨다. 장 보는 날도 아닌데 장을 보러 나가셨다가 차에 치이신 것이다. 

 정작 장례식장에서는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빨간 눈은 건조했고 따가웠다. 마치 메말라버린 오아시스와 같이. 


 꽃병 사건 이후로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 아이들은 없었다. 나 또한 그들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교실에서 나는 없는 존재나 다름없었다. 

 학년이 올라가고, 반이 바뀌었다. 같은 반에 있었던 아이들과 친한 아이들은 소문을 듣고 그들과 똑같이 나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하지만 그 소식을 듣지 못한 사람은 똑같이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그때마다 나는 거짓말을 했다. 

 거짓말은 비수처럼 사람의 마음을 후벼 팠고, 잘못된 표지판처럼 사람을 속였으며, 사람들이 넘지 못하는 견고한 벽을 만들었다. 점점 나는 학교 전체에서 외면받는 존재가 되었고,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 나는 같이 기뻐할 부모님도, 친구도 없이 혼자서 졸업장을 받고 집으로 돌아왔다. 


 배정받은 중학교에는 내가 다녔던 초등학교에 다녔던 아이들이 많았다. 개학 첫날부터 소문은 퍼졌고, 그 누구도 나에게 말을 걸어오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수업이 끝나고 유령처럼 사라지려고 했다. 그때, 그녀가 나에게 다가왔다. 

 나에게 같이 집에 가자고 말하고선 대뜸 나에게 자신을 기억하느냐고 물었다. 모른다고 했다. 그녀는 서운한 듯 자기 이름을 말했다. 

 "미희야. 기억 못 해? 초등학교 3학년 때 같은 반이었잖아."

 못한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녀는 그 일도 기억하지 못하냐고 물었다. 나는 그 일이 뭐냐고 물어봤다. 그녀는 진짜로 서운한 듯 울상을 지었다. 그런 그녀를 무시한 채 나는 앞을 보고 걸어갔다. 그녀는 옆에서 계속 초등학교 3학년 때 있었던 일을 말하며 기억 안 나느냐고 나에게 물어봤다. 대답하지 않았다. 

 몇 분이 지났을까, 그녀는 갑자기 내 앞으로 와서 교복 멱살을 잡고 왜 자꾸 무시하느냐며 소리를 질렀다. 그녀의 눈을 봤다. 화난 듯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 손을 조용히 풀고 걸어갔다. 그녀가 어떤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을지 상상하며 자조 섞인 웃음을 지었다. 

 또 한 사람의 마음을 후벼 판 것이다. 


 다음 날 아침, 집 앞에 그녀가 있었다. 그녀는 웃으면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이해할 수 없는 장면이었다. 어째서 다른 아이들처럼 날 무시하고 싫어하고 피하지 않는 걸까?

 그녀에게 손을 흔들어주지도 않고 나는 현관문을 닫았다. 조용히 학교를 향해 발을 옮기고 있으니 그녀는 옆에서 그때는 자기를 위해서 일부러 거짓말을 해준 줄 알았는데 원래부터 거짓말쟁이여서 실망했다고 조잘조잘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그녀는 나에게 대뜸 물어봤다. 

 "어제 그렇게 심한 꼴을 당했는데 왜 오늘 벌써 이러는지 안 궁금해?"

 궁금했다. 대답은 달랐다. 아니라고 말했다. 그녀는 개의치 않고 말했다. 

 "네 눈은 토끼 눈을 닮았어."

 "토끼는 외로우면 죽잖아? 네 눈을 보면 곧 죽을 것 같아."

 어이가 없어서 피식하고 웃음이 나왔다. 그런 도시 전설을 진짜로 믿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녀는 웃는 모습은 처음 봤다며 깜짝 놀랐다. 나는 웃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녀는 놀리듯 웃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나에게 물어봤다. 

 "외롭지?"

 잠시 뜸을 들이다가 나는 아니라고 대답했다. 


 그 후로 그녀는 방과 후나 아침, 수업시간에 나에게 다가와서 말을 배운 카나리아처럼 떠들었다. 그녀가 무언가를 물어봐도 나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그럼에도 계속해서 나에게 다가왔다. 가끔은 말을 하라고 때리기도 했다. 그때마다 대충 거짓말을 지어서 하긴 했지만 그러면 또다시 거짓말을 한다고 막 나를 때렸다. 

 익숙하지 않은 친절함을 성가시고 귀찮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친구들이 그녀를 말리는 소리도 종종 들렸다. 그래도 그녀는 고집을 부리듯 나에게 말을 걸었다. 

 여름방학이 시작될 때까지 그런 생활이 이어졌다. 


 여름방학이 끝나고 2학기가 시작되었다. 교복을 입고 현관문을 열었을 때 그녀가 없었다. 방학 동안 늦잠자다가 개학시간에 적응이 안 돼서 늦잠을 잤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는 그냥 학교로 갔다. 조용히 들어가 자리에 앉았다. 학교에도 그녀는 없었다. 오겠지 하고 신경 쓰지 않았다. 

 8시 30분 종이 울렸고, 선생님께서 들어오셨다. 그때까지 그녀는 반에 들어오지 않았다. 

 TV로 방송이 나오고, 개학식이 시작되었다. 교장과 교감이 지루한 연설을 끝마치고, 학교 선생님께서 가정통신문을 나눠주셨다. 그리고는 내일 수업 준비 철저히 해오라는 말과 함께 개학식이 끝났다. 학생들이 모두 가방을 챙겼고, 나도 가방을 챙겼다. 그때까지 그녀는 오지 않았다. 

 약간 이상한 기분이었다. 귀찮던 게 없어진 듯한 후련한 기분은 아니었다. 익숙하지 않은 기분이었다. 진실은 금방 보였다. 사랑이었다. 

 무심결에 아니라고 부정했다. 이 능력이 틀린 적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아닌 이유를 조목조목 생각했다. 하지만 머릿속 한편에서는 그 이유를 전부 반박하고 있었다. 

 안절부절못하게 되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처음 대면한 상황에 나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 

 차라리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처럼 무시하는 척이라도 할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외롭지?"

 그녀가 그렇게 말했던 게 떠올랐다. 


 그 이후로도 약 사흘간 그녀는 학교에 오지 않았다. 나흘째 되는 날, 현관문을 열었더니 그녀가 보였다. 언제나처럼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달려가서 안고 싶었다. 하지만 예전과 같이 아무 말 없이 현관문을 닫고 나왔다. 

 그녀는 이전과 똑같이 묻지도 않은 것들을 나에게 말하기 시작했다. 방학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여름에 수영장에 갔는데 사람이 얼마나 많았는지, 모두 쓸데없는 것들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것에, 그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약간 힘들어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녀의 안색을 살짝 보았다. 안 좋아 보였다. 

 그녀는 내가 보고 있다는 걸 알았는지 히히 하고 웃었다. 눈을 살짝 돌렸다. 


 점점 그녀가 학교에 나오지 않는 빈도가 잦아졌다. 동시에 그녀의 안색도 점점 창백해져 갔다. 그리고 어느 날, 그녀는 학교를 자퇴했다. 학생들은 모두 수군거렸다. 공부도 잘하던 그녀가 왜 자퇴했는지, 수많은 추측이 오갔다. 몇몇 아이들은 심지어 나에게 혹시 뭔가 아느냐고 물어보기도 했다. 그때마다 난 모른다고 답했다. 

 학교가 끝나고, 나는 바로 집으로 돌아가는 대신 버스를 타고 대학병원으로 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15층까지 올라갔다. 그리고 병실 문을 똑똑 두드렸다. 안쪽에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들어오세요."

 나는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녀의 눈이 동그래졌다. 나는 그녀에게 아네모네 꽃다발을 주었다. 그녀는 실감이 나지 않는 듯 꽃다발을 받고 한참 동안 꽃다발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옆에 있던 의자에 앉아있는 나에게 물었다. 

 "알고 있었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었다.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꽃이 아네모네라는 것, 일부러 자신의 병을 숨기려고 했던 것, 그리고 그 병이 불치병이라는 것까지도 모두 보였다. 

 "다른 애들한테는 말하지 말아줘."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 후로 학교가 끝날 때마다 병원에 갔다. 그리고 그녀의 옆에서 책을 읽으며 조용히 앉아있었다. 그녀는 항상 낮잠을 자다가 일어나서는 오늘 병원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했다. 이야기를 시작할 때마다 책을 덮고 조용히 그 이야기를 들었다. 

 초록색 이파리들이 붉은색으로 바뀌었다. 병실에 들어갈 때마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 보였고, 조용히 자는 그녀가 보였다. 

 하루는 너무 피곤해서 깜빡 잠에 빠졌던 적이 있다. 꿈을 꾸었다. 꿈에서 그녀는 흰 드레스를 입고 손을 가슴에 가지런히 모은 채 누워있었다. 그 주변은 안개꽃으로 장식되어 있었고, 손에는 아네모네가 들려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키스했고, 그 순간 잠에서 깼다. 

 잠에서 깼을 때, 나는 그녀의 침대 이불에 머리를 누이고 있었다. 그녀는 조용히 내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계속 자는 척했다. 

 "…짓말만 하는 걸까 너는? 아니면 맨날 입 다물고 있고. 마치 거짓말을 해야 하는 것처럼."

 "그것 때문에 가장 상처받는 건 너잖아. 진짜로 거짓말만 해야 하는 거야?"

 "아마 물어봐도 안 가르쳐주겠지?"

 거짓말하고 싶지 않았다. 가르쳐주고 싶었다. 그리고…

 "사실 그때 이후로 쭉 좋아해 왔는데. 너는 어떤지 물어봐도 아무 말도 하지 않겠지?"

 말하고 싶었다. 

 "이해할게. 분명히 이유가 있을 거라고."

 그리고 그녀는 몸을 숙여 내 머리를 살짝 끌어안았다. 그리고서는 볼에 살짝 입을 맞췄다. 그렇게 움직이는데도 사람이 안 깨겠냐, 바보야. 

 그래도 계속 자는 척했다. 따스했다. 


 다시 그 꿈을 꿨다. 깨어있을 때는 부정해왔던 진실이 꿈속에서 계속해서 날 조여왔다. 언제 죽는지까지도 알고 있었으면서 불안해서 병원에 달려갔다. 그리고 그녀는 언제나 나를 반겨주었다. 그 얼굴에는 서서히 죽음의 기운이 어리고 있었다. 

 그녀를 볼 때마다 나는 안심했다. 그리고 다시 불안해했다. 


 결국, 시간은 아무렇지도 않게 흘러서, 그녀가 죽기 전날이 되었다. 그 꿈을 꾸지 않았기 때문에 천천히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녀는 식은땀을 흘리며 힘겹게 손을 흔들었다. 나는 여느 때와 같이 그녀의 옆에 앉아서 책을 읽었다. 하지만 그녀는 여느 때와는 다르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5분, 10분, 정적이 계속되었다. 갑자기 눈앞이 흐려졌다. 눈물이 활자 위로 뚝뚝 떨어졌다.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상황을 대면했으리라. 그녀는 어쩔 줄을 모르고 괜찮으냐고 물어봤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이불에 얼굴을 파묻고 울 뿐이었다. 

 그녀는 내가 자는 척하던 때와 똑같이 나를 안고 울지마 울지마 괜찮아 괜찮아 반복했다. 오랫동안 잊었던 따스함이 다시 살아나는 듯했다. 이 따스함을 내일 다시 한 번 더 잃는다는 게 서글퍼서 더 울었다. 어쩌면 잃기 전에 따스함을 최대한 느끼고 싶었던 걸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날은 어릴 적 그때처럼 울었다. 

 결국,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가방을 챙겼다. 그리고 문을 열었다. 가기 전에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잘 가."

 문을 닫았다. 그리고 그녀를 향해 달려갔다. 그녀를 꽉 안았다. 내일 죽을 정도로 그녀가 불치병에 걸린 건 신경 쓰지 않고, 어깨를 부서트릴 정도로 꽉 안았다. 과연 그녀는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나쁜 표정은 아닐 거라고 확신했다. 그녀도 나를 껴안아줬으니까. 


 다음 날, 따스함은 나를 다시 떠났다. 그녀의 장례식장에서 울지 않았다. 건조한 사막처럼 눈이 따가웠다. 

 거울을 보았다. 눈이 빨갰다. 마치 토끼 눈같이. 

 "네 눈은 토끼 눈을 닮았어."

 "토끼는 외로우면 죽잖아? 네 눈을 보면 곧 죽을 것 같아."

 "외롭지?"

 외로웠다. 

 그날 밤, 나는 잃어버린 따스함을 찾아 그녀가 눕혀있는 곳으로 몰래 올라갔다. 그녀는 흰 드레스를 입고 손을 가슴에 가지런히 모은 채 누워있었다. 그 주변은 안개꽃으로 장식되어 있었고, 손에는 아네모네가 들려있었다. 

 어수룩한 달빛이 그녀를 비추고 있었다. 백자와 같이 흰 피부와 입술은 마치 살아있는 듯, 금방이라도 나를 보며 오늘 아침 병원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떠들 듯 보였다. 

 벌은 가장 불합리해야만 한다. 그 말의 의미를 이제야 깨달았다. 이야기에서 금기는 깨어질 수밖에 없다는 걸. 

 이제는 진실을 말해도 되겠지. 

 "사랑해."

 나는 처음으로 진실을 말했다. 그녀의 입술에 키스하는 순간 세계는 잿빛이 되어 부서졌다. 나는 산산조각이 난 시공으로 빨려 들어갔다. 이윽고 눈을 떴을 때는 이미 모든 것이 사라진 채였다. 살짝 닿았을 뿐인 그녀의 따스함만이 내 입술에 남았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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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짓는 게 너무 어려워서 대충 지었다는 게 함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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