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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갈 데가 없다

만듦

자유의 대가

2012.05.05 21:05

무언가 조회 수:375

 잠에서 깨니 묘하게 몸이 시렸다. 냉기에 삐걱거리는 목을 돌려 옆을 보니 한나는 없었다. 역시 어젯밤 그건 꿈이 아니었구나. 


 이틀 전, 모두가 자고 있을 때, 한나는 내 귀에다가 대고 다른 사람이 들을 수 없을 정도의 목소리로 조용히 속삭였다. 
 "나, 탈옥할 거야."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서 '뭐?'라고 외칠 뻔했다. 한나가 내 입을 막지 않았다면 아마 진짜로 소리를 질렀을 것이다. 그걸 미리 알고서 한나는 내 입을 막았던 것이다. 
 한나는 집게손가락을 입에 대고 "쉬잇." 했다. 내가 동의의 표시로 고개를 끄덕이자 한나는 내 입을 막고 있던 손을 뗐다. 한나는 내 귀에 대고 다시 속삭였다. 
 "비밀로 지켜줄 거지?"
 "너 제정신이야?" 나는 작은 목소리로 한나와 이마를 맞대고 말했다. 코가 닿을 정도의 거리였다. 
 "응."
 "너 탈옥하면 어떻게 되는지 알고 있어?" 
 한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탈옥하기 힘들다는 것도, 탈옥을 시도하다 걸리면 끝이라는 것도, 탈옥한 뒤에 잡혀도 끝이라는 것도, 그리고……."
 한나는 말꼬리를 흐린 채 눈을 돌렸다. 나는 그런 한나의 어깨를 잡고 말했다. 
 "말해 봐."
 한나는 떨리는 입술을 열었다. 목소리마저 떨리고 있었다. 방 안이 춥긴 했지만,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 한나는 뭐라고 웅얼거렸다. 한나가 죄책감 때문에 말하기 어렵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그때, 한나에게 대답을 강요했고, 결국 이렇게 말해버리고 말았다. 
 "넌 이기주의자야."
 결국, 한나는 울음을 터트렸다. 한나는 다른 사람들이 깨지 않도록 소리죽여 울었다. 
 '약간 심했나.' 나는 한나의 눈물을 닦아줬다. 손이 거칠었는지 한나가 얼굴을 살짝 찡그렸지만, 이내 원래 얼굴로 돌아왔다. 
 "미안해." 한나는 내 가슴에 얼굴을 품은 채 말했다. 그런 한나의 얼굴을 살짝 끌어당기며 나는 말했다. 
 "성공할 수는 있겠어?" 나는 한나에게 조용히 물어봤다. 
 한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잠시 후, 한나는 내 질문에 대답하지 않은 채 내게 물었다. 
 "막을 거야?"
 "막는다고 하면 안 할 거야?"
 한나는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나는 눈물이 걸린 눈으로 날 보는 한나에게 차갑게 말했다. 
 "막을 거야."
 한나의 눈동자에 실망과 슬픔의 빛이 감돌았다. 그 빛. 한나의 눈에는 언제나 빛이 있었다. 아마 그게 한나와 다른 죄수들을 구분하는 점일지도 모르겠다. 
 한나는 내게 등을 돌렸다. 나는 한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깨끗하게 깎여서 부드럽게 느낄 만한 머리가 없다는 게 아쉬웠다. 
 나는 한나에게 몸을 밀착한 채 한나의 어깨를 꼭 껴안았다. 기본적인 생활조건조차 보장해주지 않는 냉방에서 한나의 몸은 그나마 따뜻했다. 한나의 귀에 대고 조용히 속삭였다. 
 "그런데 내가 자고 있을 때 도망치면 피곤해서 아마 못 막을 거야."
 원래부터 막을 생각은 없었다. 내 마음을 알았는지 한나의 몸이 떨렸다. 그런 한나의 어깨를 더 강하게 껴안았고, 한나도 몸을 돌려 내 허리를 껴안아줬다. 그때, 새벽녘의 동이 터왔고, 간수가 죄수들을 깨우기 시작했다. 
 죄수들에게 밤은 너무 짧았다. 


 간수들은 죄수들을 화장실로 몰았다. 세수하고 몸을 씻으라고 하지만, 이미 나는 그런 걸 포기한 채로 인파에 휩쓸려 이리저리 부유하고 있었다. 
 100명이 수용 가능한 방에 200명을 수용해놨으면서 세수하는 시간은 10분 내외였다. 수용소 내부에 질서나 규칙은 없었고, 연약한 여자아이는 당연히 우락부락한 아저씨들에게 밀려 위생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휩쓸려 다니며 나는 이를 꽉 깨물었다. 

 한겨울의 광장은 춥다. 특히 얇은 죄수복 한 겹만을 입은 채 서 있다면 더욱 그렇다. 
 간수들은 매눈으로 죄수들 가슴에 달린 번호를 세고 있었다. 누가 빠졌는지. 
 이곳에 있는 죄수들은 대략 1천 명 정도 되었지만, 간수는 언제나 이들 중 누가 빠졌는지 정확히 찾아냈다. 
 정확히. 
 그들이 죄수가 모두 있는 것을 확인하고 빠진 죄수를 찾아오는 동안 죄수들은 미동조차 하지 못한다. 모두가 모이기 전까지는 이 광장에 그대로 서 있어야 하는 것이다. 

 예전에 누군가가 탈옥을 시도한 적이 있다. 그날, 그들은 그 남자를 찾는 5시간 동안 죄수들을 땡볕에 세워놓았다. 온몸이 뜨겁게 달아올랐지만, 죄수들은 미동도 할 수 없었다. 
 내 옆에 서 있던 죄수 한 명이 땀을 닦기 위해 잠시 팔을 들어 올렸고, 그는 그 자리에서 간수에게 발로 걷어차였다. 땀을 너무 많이 흘려서, 온몸이 너무 뜨겁게 달아올라서 쓰러진 자는 모두 간수의 손에 어딘가로 사라져서는 돌아오지 않았다. 간수 한 명이 제일 앞에서 우리를 노려보는 간수의 귀에 대고 뭐라고 말하자 간수는 우리를 막사로 다시 돌려보내 줬다. 
 우리에게 주어진 정보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실패했을까, 아니면 성공했을까. 그가 잡혀서 처형당했기 때문에 우리를 돌려보내 준 걸까, 아니면 냉혈한 간수들 눈에도 너무해 보인다고 생각했기에 우리를 돌려보내 준 걸까?

 그때를 생각하며 손을 꽉 쥐고 있으니, 이 지역을 담당하는 간수가 앞에 서서 커다란 소리로 죄수들에게 말하기 시작했다. 
 "방금 확인해본 결과, 죄수번호 10387이 사라졌다. 혹시 어디로 갔는지 아는 사람 있나?"
 나는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아무도 몰라? 그러면 찾을 때까지 여기 가만히 있어."
 [가만히 있어.] 
 드디어 이 소름 끼치는 말이 나왔다. 

 '그 사람은 실패했구나.'
 10시간째에 그걸 확신할 수 있었다. 벌써 7명이 쓰러졌고, 그들은 모두 어딘가로 끌려갔다. 멀리서 총소리가 들렸다. 
 겨울바람은 얼음 칼날과 같았다. 온몸에서 피가 나는 듯 따가웠고, 눈썹이 떨렸다. 뼛속까지 파고드는 바람에 이빨이 덜덜 떨렸다. 뇌에서는 재빨리 온  몸을 감싸라고 명령을 보냈지만, 두려움이 그 명령을 막고 있었다. 
 "에취."
 옆에 서 있던 사람이 기침했다. 자연스레 몸이 움직이기 마련이다. 간수는 그 장면을 놓치지 않고 봤다. 그걸 핑계로 간수는 그 사람을 군화로 짓밟기 시작했다. 그리고 추운 겨울에 그들을 지키고 있어야 하는 자신의 분노를 그 '것'에 풀었다. 
 꽁꽁 얼어있던 그 사람의 온 몸을 바스러트린 후, 간수는 다시 앞으로 돌아갔다. 온몸이 망가진 목각인형은 움직이지 않는 몸을 겨우겨우 일으켰다. 다행히 간수가 앞으로 가버렸기 때문에 행동이 늦는다고 차이는 경우는 없었다. 
 털썩. 
 바로 눈앞의 사람이 쓰러졌다. 그걸 보고 간수가 다가오고 있었다. 
 10분 후에 총성이 들려올 차례다. 


 3일째. 저체온증, 수면부족, 열악한 환경에서 오랫동안 지낸 탓에 생겨난 병. 죄수들이 낙엽처럼 우수수 떨어져 나갔다. 
 조금이라도 정신을 놓으면 쓰러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동시에, 이는 한나가 잡히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된다. 
 그것만이 나를 지탱하고 있었다. 
 무엇도 느껴지지 않았다. 손끝을 살짝 움직여보려고 해도 움직이는지 아닌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뇌마저 얼어버린 듯했다. 
 눈썹이 떨리는 게 느껴졌다. 그걸 어찌할 수 없었다. 
 눈썹 끝에 달린 얼음 결정이 보일 듯 말듯. 
 사고회로가 작동하지 않았다. 눈에 보이는 모든 배경이 자신과 동떨어진 듯. 
 그때, 누군가가 내 어깨를 툭 건드렸다. 안 돼…….
 내 몸은 힘없이 쓰러졌다. 
 내 몸이 내 것이 아닌 듯했다. 움직이지 않았다. 움직이기는커녕, 자기 맘대로 눈썹이 감겨오기 시작했다. 
 간수 한 명이 제일 앞에 서 있던 간수의 귀에 대고 뭐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간수는 뭐라고 말한다. 웅얼웅얼. 들리지 않는다. 
 눈앞으로 군화가 걸어오고 있다. 

 긴 꿈을 꾸었다. 
 과거의 내가 있었다. 꽤 커다란 집에서 가족들과 함께 환하게 웃고 있었다. 꽃으로 만든 화환을 동생에게 씌워줬고, 어머니 앞에서 노란색 드레스를 나풀나풀 흔들며 노래를 불렀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손뼉을 치며 잘 부른다고 해주셨고, 그 말이 참 기뻤다. 
 그 웃음은 내가 14살일 때, 독사같은 얼굴을 한 사람들에 의해 무참히 파괴되었다. 그들은 우리 가족과 같은 종류의 사람들을 모두 잡아들여 수용소에 넣었다. 
 내가 간 곳은 최악의 수용소라고 불리는 곳 중 하나였다. 나는 희망을 포기했다. 
 6월 12일, 남성과 첫 경험을 했다. 15번째 생일이라서 기억한다. 간수는 아무도 보지 못하는 곳에서 거칠게 내 옷을 벗겼고, 나는 무력하게 당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나는 기계처럼 지옥을 살아갔다. 그러던 도중, 한 여자아이가 수용소에 들어왔다. 
 한나라고 하는 여자아이의 눈에는 빛이 넘쳤다. 그 총기도 곧 사라지겠지.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 눈빛은 죽기는커녕 점점 밝아졌고, 내게는 사라진 그 눈빛에 나는 끌렸다. 
 나는 비슷한 나이대의 한나와 자연스레 친해졌다. 친해졌다고 해도, 밤에 긴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 따뜻하게 해주는 것뿐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나는 이 지옥에서 살아갈 수 있었다. 
 한나는 나와 이야기할 때 언제나 환하게 웃었다. 그 웃음이 바로 눈앞에 보였다. 
 한나는 날개를 단 채 나를 반겨주었다. 나는 내 등에 돋아난 날개를 퍼덕여 한나에게 날아갔다. 그곳은 따뜻했다. 


[Epilogue]

 "그날, 그 수용소에서 134명이 죽었습니다. 그만큼 상황이 열악했고, 그들은 최소한의 인권조차 보장해주지 않았습니다."
 할머니는 우렁찬 목소리로 마이크를 잡고 사람들을 향해 열변을 토해냈다. 사람들은 모두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나의 자유는, 우리들의 자유는 그들의 희생만큼 값진 것입니다. 우리는 그 귀한 것을 다시는 잃지 않도록 과거를 통해 배워야 하고, 그런 잘못을 다시는  저지르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모두 박수쳤다. 할머니는 눈물을 흘렸다. 그 눈물에는 아멜리아에게 같이 탈옥하자고 제안하지 못한 자신에 대한 후회가, 탈옥 직전까지 자신을 응원해 준 아멜리아가 섞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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