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그대에게 죽음이 내려오지 않기를 (라한대 출품작.)
2012.11.26 04:34
기(起).
오늘은 현우가 사라졌다.
최근 들어, 매일 남자 한 명씩 우리 학교에서 사라지고 있다. 그 전날은 준수였다. 그 전 전날은 현재였다. 그 전 전날은 순재. 그 전 전 전날은…….
사라진다고 해도, 완전히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모두들 일주일 후면 어김없이 돌아왔다. 이상한 점은, 마치 일주일 간의 기억이 싹 날아간 것처럼, 아무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기억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모두들 마치 뭔가에 홀렸던 듯, 교실에 달려 들어와서는
"야, 오늘 X월 Y일이야?"
라고 묻곤 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어떤 초자연적 힘이 우리 학교를 감싸고 있는 걸까.
물론 사라졌던 사람이 일주일 간의 수업을 따라잡아야 한다는 것 이외에는 딱히 해가 없었고, 모두들 돌아왔기에, 흉흉한 분위기나 소문은 덜한 편이었다.
승(承).
"저기, 저한테는 무슨 일이신가요?"
"음, 방과 후에 과학실로 와줘."
모두의 우상, 천재 과학특기생 현지 선배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자마자, 모두들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내 귓볼이 빨개지는 게 느껴졌다.
"알았지?"
현지 선배는 아름답게 웃더니 꼭 와야돼,라고 덧붙인 후 1학년 복도를 걸어 나갔다. 나는 그곳에 잠시 얼어있었다.
'모두의 동경을 받는 선배에게…….'
가슴이 두근거렸다. 온몸이 찌릿거렸다. 설마, 설마 그런 걸까?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순간, 나는 반을 둘러보았다. 남학생들의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나는 튀어나오려고 하는 웃음을 애써 참으며 내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잠시 후, 누군가 내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고개를 돌려 보니, 민아가 나를 째려보고 있었다.
"가지 마."
민아는 대뜸 그렇게 말했다.
"왜."
"다음으로 없어지는 건 네가 될 거야."
"어째서?"
나는 반문했다.
"내가 조사해봤어."
민아가 종이를 내 책상에 펼치면서 말했다.
"준수가 사라졌던 날, 준수는 현지 선배에게 똑같은 말을 듣고, 과학실로 갔어. 현재도, 순재도, 그 전에 사라졌던 남자들도 마찬가지야. 한 번 뿐이라면 모르겠지만, 예외는 없었어. 분명히 뭔가가 있어. 그러니까 가지 마."
"아직도 탐정 놀이 하는거야?"
나는 종이로 비행기를 접으며 말했다.
민아는 소꿉친구였다. 어릴 적부터 '곰돌이 탐정 테드'라는 작품을 자주 보고 그걸 따라하곤 했다. 그건 중학교에 온 지금도 마찬가지였고, 수상한 일이 일어나면 언제나 자신만의 추리를 내놓곤 했다. 맞을 때도 가끔 있었으나, 틀릴 때가 더 많았다.
"이제 그만할 때 되지 않았어?"
나는 접은 비행기를 휙 날리며 말했다.
"놀이같은 거 아니야. 제발 좀 믿어줘. 걱정돼서 하는 말이니까."
"아니면 질투하는 거야? 그래서 일부러 거짓말을……."
"누, 누가 질투한다고 그래! 뭐야! 그렇게 믿기 싫으면 믿지 마!"
민아는 살짝 얼굴을 찌푸리고 말했다. 그리고선 내가 날린 비행기를 줍더니 구겨서 쓰레기통에 버리고, 자기 자리에 앉았다.
전(轉).
나는 과학실 문을 열었다. 과학실은 어두웠다. 창문은 커튼으로 가려져 있었다. 선배는 실험기구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실험기구에서는 흰 연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저기. 저 왔어요."
나는 선배를 불러봤다. 그러자 실험용 안경을 쓴 선배는 나를 보더니, 내게 다가왔다.
"와줘서 고마워."
선배가 웃으며 말했다.
"부탁할 게 하나 있어서 불렀어."
"뭔데요?"
선배의 부탁이라면 뭐든지 들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자."
선배가 내게 뭔가를 건내줬다. 갈색, 직사각형…….
"초콜릿이야."
"초콜릿이요?"
나는 선배가 내게 준 초콜릿을 받아 들었다.
"먹고서 소감을 말해줘."
"먹어도 되는 거예요?"
선배는 고개를 끄덕였다. 초콜릿을 보다가, 잠시 선배를 쳐다보았다. 선배가 만들어 준 초콜릿. 나는 다시 초콜릿으로 시선을 옮겼다. 너무 달콤할 것 같다. 선배가 만들었다면 분명히 뭐든 맛있을 거야. 나는 그 초콜릿을 한 입 먹기 위해 입을 벌렸다.
그 때, 쾅 하며 과학실 문이 열렸다. 나는 초콜릿을 입에 넣기 직전에 눈을 돌려 과학실 문 쪽을 보았다. 그곳에는 민아가 있었다.
"잠깐."
그러더니 민아는 내게 달려와서 초콜릿을 빼앗았다.
"뭐하는 거야!"
나는 민아에게 소리쳤다. 그러자 민아가 웃으며 말했다.
"이게 사건의 진상이야."
그러더니 민아는 초콜릿을 한 입 먹었다.
"안 돼, 내 초콜릿! 선배가 준 내 초……."
나는 마지막 말을 끝내지 못했다. 민아가 초콜릿을 꿀꺽 넘기자마자 풀썩 쓰러졌기 때문이다. 선배가 만든 초콜릿이 바닥에 떨어졌다. 잠깐,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야."
나는 민아를 불렀다. 민아는 눈을 감은 채 쓰러져 있었다.
"일어나."
나는 민아에게 다가가 어깨를 흔들어 보았다. 민아는 식은땀을 흘린 채 축 늘어져 있었다.
"일어나 봐, 야, 일어나, 민아!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이번에도 실패인가."
뒤쪽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려보니, 선배가 수첩에 뭔가를 슥슥 적더니 그 수첩을 주머니에 넣는다.
"일주일밖에 안 남았는데, 이러면 안 되는데."
그제서야 나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가 되었다. 민아에게, 다른 실종자들에게.
민아의 추측은 맞았다. 선배는 머리를 긁적이더니 뭐가 잘못된 걸까,하고 실험기구와 재료들을 확인해보고 있다.
"선배……."
"있잖아."
선배는 실험기구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말했다. 혼잣말일까, 내게 한 말일까.
"영양도, 재료도, 전부 내 분석대로 제대로 되었을 텐데, 뭐가 잘못된 걸까?"
결(結).
이대로 놔두면 희생자가 더 나올 것이다. 결국, 나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 선배에게 초콜릿 만드는 법을 가르쳐주게 되었다. 과학=요리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부터, 과학도구가 아니라 조리도구를 사용하는 법, 음식에 향미를 돋우는 법까지. 요리는 꽤 자신있었고, 초콜릿은 요리 축에도 들어가지 않으니까. 마침내, 선배는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자신있게 건낼 수 있을 정도로 맛있는 초콜릿을 만들 수 있었고, 선배에게서 모든 게 잘 된 것 같다는 문자가 왔다.
[다음 번에 요리 만들 때도 도움 좀 받아도 돼?]
나는 [네.]라고 답장을 보냈다.
덤으로 선배에게 초콜릿 만드는 법을 가르쳐 주면서 남은 재료로 따로 초콜릿을 하나 더 만들 수 있었다.
나는 초콜릿을 잘 포장해서 가방에 넣었다. 집을 나서니, 일주일 만에 깨어난 민아가 내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엄청 신기해! 눈을 떠보니까 일주일 후야! 나도 모르는 사이에 시간여행을 한 거 아냐?"
"응."
"뭐야, 하나도 재미없다는 듯이 건성으로 끄덕이고."
재미없을 만 하지. 나는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전부 다 알거든.
"그런데 과거로 돌아가는 법을 못 찾겠어.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한 번 열심히 생각해 봐. 그런 거, 네가 좋아하는 거잖아?"
나는 그리고 가방에서 초콜릿을 꺼내 민아에게 건내줬다. 민아는 초콜릿을 받아들고 깜짝 놀란 듯이 나를 바라보았다.
"이건 뭐야?"
"초콜릿."
"초콜릿? 오늘 무슨 날인가? 아니, 오늘 무슨 날이 아니라도, 네가 이걸 준비했을 리가 없는데? 일주일 사이에 무슨 변화가 일어난 거야."
"그냥 감사의 선물이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야."
"감사 선물?"
"아무것도 아냐. 왜, 혹시 초콜릿 싫어해?"
"아니."
민아가 초콜릿을 꼭 껴안으며 말했다.
"싫을 리가 없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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