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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갈 데가 없다

만듦

"치하야쨩... 저..."

 

 

평소와 같이 여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따뜻한 사무소와는 대조적으로 새하얀 눈보라가 창밖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우리 사무소는 프로듀서와 리츠코씨의 노력 덕분에 우리 사무소는 소위 '잘 나가는' 아이돌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인지도는 지니고 있는, TV에서 얼굴을 보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은 B랭크 가량의 아이돌을 다수 보유한 곳이 되어있었다.

 


그래서, 결국 하고 싶은 말이란, 모두가 적당히 바빠진지라 사무소에서 얼굴 보는 일은 점점 어려워졌고, 그나마 만날 수 있는 시간은 같이 활동을 하도록 유닛으로 편성되었을 때나 트레이닝을 할 때뿐. 그나마 최근에는 활동이 많아져서 트레이닝을 같이 하는 경우는 많이 드물게 되었다. 오늘은 하기와라씨와 CD 수록을 마무리하고, 프로듀서는 수록이 끝난 뒤 곧바로 하루카와 마코토의 유닛을 돕기 위해 가 버리고, 마지막에는 왠일인지 빨개진 얼굴로 힘껏 '치, 치하야쨩! 눈도 내리니 사무소에서 따, 따뜻한 차라도 마시고 돌아가지 않을래?' 내지른 하기와라씨의 텐션에 압도되어 같이 사무소로 돌아왔을 따름이었다.

 

나를 소파에 앉혀놓고 하기와라씨는 차를 끓이기 위해 총총 멀어져갔고, 그 동안 나는 오늘 있었던 수록에서 무엇이 부족했었고 앞으로의 활동에서 그것을 어떻게 보완해야할지 생각하고 있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은은한 얼그레이향이 창밖의 눈보라와 묘하게 어우러져 사무소를 따뜻하게 감싸고 있었다. '말차가 아니라 홍차라니, 별일이네.' 라는 생각이 잠시 들었지만 하기와라씨가 차를 워낙에 좋아하는 것은 잘 알고 있고, 그 애정의 대상이 비단 말차에만 머물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해내고는 스스로 납득해버렸다.

 


이윽고 따뜻한 홍차의 기운 때문인지, 히터를 켜서 점점 달아오르는 사무소 때문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그저 기분 탓인지 빨갛게 상기된 볼을 한 하기와라씨가 트레이에 예상대로의 얼그레이 홍차와 쿠키를 들고 내 앞에 나타났다.

 

"이, 이번 홍차는 특별히 정성을 담아서 끓여보았는데... 우음... 치하야쨩 마음에 들까나..?"
"좋은 향기가 나. 고마워, 하기와라씨."

 

그 말에 하기와라씨는 부끄럽다는 듯이 머뭇머뭇하고, 조그만 칭찬에도 이렇게 반응할 줄 아는 하기와라씨가 잠깐이지만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루카가 이 광경을 봤으면 조금 시샘을 했을지도 모르겠는걸. 모두와 함께 있을 때는 밝은 모습을 보여주지만, 단 둘이 있을 때는 어린아이가 되어버리는 하루카니깐...

 

"오늘 있었던 수록... 치하야쨩과 함께라서 좋았어.."
"그러고보니 같이 듀엣으로 노래 부른건 오랜만이지?"
"으, 응..! 정말 오랜만이라서... 조금 떨렸지만... 잘 했을까나..?"

 

하기와라씨는 스스로에 대해 자신감이 너무 적은 것 같다. 그야 이번 수록에서 하기와라씨와 함께 부른 Little Match Girl은 정말 하기와라씨를 위해 만들어진 노래라고 밖에 생각이 들지 않았는걸. 특히 마지막의 '따뜻하게 해 주세요...' 부분은 하기와라씨의 평소 모습과는 딴판으로 다른 느낌에 수록 이후까지 압도된 채로 있었던 기억이 있었다.

 

"걱정하지마. 하기와라씨의 노래는 좋았다고 생각해."
"정말...?"
"정말이야."

 

정말이라는 확답을 듣고나서야 표정이 밝아지는 하기와라씨. 분명 팬들에게는 머뭇머뭇 부끄러움 많은 하기와라씨의 성격이 도드라지게 받아들여지는 것 같지만, 하기와라씨는 살짝 미소를 머금었을 때가 가장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말야... 소..."

 

소... 까지 말하고 하기와라씨는 또 무슨 부끄럼을 타는지 고개를 푹 숙였다.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던걸까?

 

"아무것도 아니야, 치하야쨩..! 그, 오, 오토나시씨의 노래도 대단했지!"
"오토나시씨의 커버곡을 들었을 때 굉장히 그리우면서도 따뜻한 풍경과 마주한 느낌이 들었어. 그런 느낌을 제대로 전달하다니 오토나시씨는 대단하다고 생각해. 공부가 되었어."
"응, 맞아...!"

 

오토나시씨의 노래는 정말 큰 참고가 되었다. 지금 이렇게 따뜻한 홍차를 마시면서도 컵으로 전해지는 따스함과 은은히 피어오르는 연기에서 오토나시씨의 노래를 다시 한 번 떠올릴 정도니깐. 하지만... 하기와라씨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이게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

 

"치하야쨩, 그리고보니 오토나시씨는 어디에 간 걸까..? 수록이 끝나고 급하게 들릴 곳이 있다고 하셨잖아..."

 

창 밖의 눈보라는 점점 거세지고, 하기와라씨는 먼저 어디론가 떠나버린 오토나시씨가 혹여나 어디서 눈을 맞고 다니는 것은 아닌지 걱정하는 눈치였다. 벽에 걸린 시계의 시침은 슬슬 9시를 넘어가려고 하고 있었다.

 

"수록이 끝난 뒤 어디 들렀다가 퇴근을 하신게 아닐까 싶어."
"그렇구나아... 맞아. 그런 것 같아."

 

순간, 하기와라씨의 얼굴에 복잡미묘한 표정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하기와라씨는 수록의 탓인지 계속 평소보다 조금 높은 텐션을 유지하고 있었다. 처음으로 수록될 노래를 부른 뒤, 조마조마하게 가슴을 졸이다가 팬들의 환호를 듣고 나를 와락 껴안기도 했었다. 나는 그 심정이 이해가 갔다. 어찌되었든 팬들과 함께 하는 CD 수록의 기회는 아이돌로서는 놓칠 수 없는 기회이니 말이다.

 

"저, 치, 치하야쨩의 손... 차가워서 기분이 좋았어...!"

 

손, 기분 좋았어. 아, 아까 그 '소...'는 손이었구나. 말하기 어려운 것처럼 겨우 말했지만, 실은 상자에서 종이를 꺼내지 못해 곤란해하던 하기와라씨를 도와주기 위해 상자에 손을 넣고 종이를 찾다가 하기와라씨의 손을 잡았던 조그만 사건이었다. 그 때, 하기와라씨의 손은 정말 따뜻했다.

 

"하기와라씨 손... 따뜻해서 계속 잡고 싶었어."
"치, 치하야쨩..."

 

슬슬 미지근해져가는 홍차를 한 입 꿀꺽 삼킨 하기와라씨는 눈을 꼭 감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마치 '지금부터 중대발표를 할테니 듣는 사람들은 마음의 준비를 해 주세요!' 하는 것처럼. 내가 어떻게 그 표정을 읽었는지는 알 수 없다. 정말, 찰나의 순간이지만 오토나시씨의 노래처럼 하기와라씨와 내가 이심전심했던 걸지도 모르겠다.

 

"치하야쨩... 저... 나, 나... 치하야쨩... 을... 좋아해!! 계속 좋아해왔어! 아 아니 좋아한다는 거, 그 그건 같은 아이돌 친구로서 좋아한다는 의미가 아니고... 저... 좀 더 깊은......"

 

... 하기와라씨는 떨면서 말을 했지만, 전달하려는 바는 명확하게 알 수 있었다. 마치 너무나도 짧게 깎아버린 손톱처럼, 너무 확실해서 아플 정도로 말이다. 예전에 하기와라씨와 유닛 활동을 하던 당시, 하기와라씨에게는 마코토라는 짝이 있었다. 이른바 커플이라는 것이다. 하기와라씨와의 활동이 끝나고 몇 달인가 지나서 나는 자연스럽게 가까이 지내던 하루카와 선을 넘었다. 그렇게 우리들은 서로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고, 그렇기에 사무소에서 만나서도, 다시 둘이서 유닛으로 재편성 되었을 때에도 나는 별다른 감정을 갖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어렴풋이 느껴오는 것은 있었다.

 

"나... 알아... 치하야쨩은 하루카쨩과 사랑하는 사이라는거... 잘 알고 있어..."
"그런데... 왜 이렇게 치하야쨩을 만날 때마다 두근거리는건지, 치하야쨩이 노래하는 모습을 보면 왜 이렇게 황홀하게 쳐다보게 되는건지, 치하야쨩이 다른 사람에게는 잘 보여주지 않는 미소를 하루카쨩에게 보여주면 왜 괜히 분한 기분이 드는건지... 잘 모르겠어..."

 

하기와라씨는 조금 곤란한 상황에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너무나도 인기가 좋았던 탓이었다. 마코토가 여성 팬들에게 인기 절정을 달리자, 하기와라씨는 혹여나 자신의 존재가 마코토의 인기를 가로막게 되는 것은 아닐지 매일 밤 고민했다. 정말 고민이 심할때는 하루카에게도 상담을 요청해왔기에, 나 또한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가장 최근에 들은 이야기는 하기와라씨가 스스로 마음을 접고 마코토를 피하고 있다는 것. 가장 최근이라고는 해도 거의 6개월이 다 되어가는 이야기다.

 

"나... 나쁜 애지...? 하루카쨩은 밤늦게까지 내 고민을 전부 들어줬는데, 나는 지금 그 하루카쨩의 사랑하는 사람을 빼앗으려하고 있잖아...!"
"그래도... 그래도... 이 마음 속일 수가 없어... 매일매일 말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전부 참고 살았는걸... 오늘 하루 정도는 정말 말하고 싶었던 말, 해도 괜찮지 않을까... 싶었어..."

 

나는 하기와라씨가 원하는 대답을 할 수 없다.
... 뭘 어떻게 하더라도 내 마음 속에 확고부동하게 자리를 잡은 사람은 하루카 이외에는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미안해, 하기와라씨. 내 마음 속에서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사람은 하루카야..."
"처음으로 내 방에 누군가를 초대했던 날, 누군가와 처음으로 만들어 먹은 파스타, 누군가가 처음으로 나와 같이 내 방에서 잠을 청했던 날, 처음으로 포옹하고 처음으로 입술을 포갰던 기억. 하루카는 무엇을 하든간에 나에게 '처음'을 선사해줬어."

 

말하기 괴롭지만, 말했다.
하기와라씨는 작은 동물처럼 어깨를 바르르 떨고 있었고, 나는 그런 그녀를 위로해야 할지 잠깐 망설였다. 결국 내 차가운 손은 하기와라씨의 작은 어깨에 가만히 올라가서 그녀를 위로하였고, 그 덕분인지 하기와라씨의 어깨는 조금씩 떨림이 잦아들었다. 완전히 진정이 되자 하기와라씨는 눈물이 아직 그렁그렁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응.. 나도 치하야쨩이 마음에도 없는 말 하는 걸 듣고 싶지는 않았어... 하루카쨩의 치하야쨩을 빼앗아가지 않겠다고 다짐할게..."
"하지만 오늘... 오늘 밤만은 하루카쨩에게 치하야쨩을 빌리고 싶어. 이것이 정상적인 사랑은 아니지만 사랑해. 일방통행의 사랑이라도, 이심전심할 수 없는 사랑이라도 사랑해..."

 

나와 하기와라씨가 처음으로 유닛 활동을 했을 당시에 불렀던 Inferno. 하기와라씨는 그 지옥불 같은 연모의 감정을 마음 속에 지니고 있었다. 자의식 과잉일지도 모르지만, 어쩌면 하기와라씨가 지닌 그 감정의 상대는 그 때부터 마코토가 아니라 나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나는 어쩌면 하기와라씨의 모습과 하루카를 겹쳐 보고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루카는 늘 쾌활한 아이였지만, 가끔 감당하기 어려운 문제와 맞서다 무너져내리곤 했다. 하기와라씨도 분명 그와 유사한 타입이었을 것이다. 언제나 착한 아이처럼 소극적인 아이처럼 지내왔지만, 자신의 욕구를 숨기고 있었을 뿐. 그것이 쌓이고 쌓이다 오늘처럼 한계에 도달한 것일테다. 그리고... 하기와라씨에게 필요한 것은, 아마도... 나일 것이었다.

 

"하기와라씨, '단 한 번의 불장난이라도 좋으니까, 지금 당장 안아줘' 인거지?"

 

하기와라씨의 귀에 조용히 속삭인 것은 Little Match Girl.

 

"으, 응 치하야쨩...! 훌쩍"

 

사무소의 바닥에 눈물방울이 촉촉하게 떨어지고, 하기와라씨는 다시 울기 시작했다.

 

"저, 치하야쨩, 이번 눈물은 안도와 기쁨이 담겨있는, 그런 눈물인거야."
"화장이 다 지워져서 흉해졌잖아. 하기와라씨, 지금 우는 모습 웃긴걸."

 

오토나시씨의 자리에서 OL들이나 갖고있을법한 지극히 실용적인 작은 손거울을 꺼내 하기와라씨에게 보여주었다. 흐흑, 흐흐, 쿠, 쿠쿡... 역시 자신의 모습이 우스운지 쿡쿡대며 웃는 하기와라씨. '하기와라씨는 역시 웃는 모습이 좋아' 같은 말을 하려다가 그만두었다. 정말이지.. 그 정도는 말해주지 않아도 스스로 알고 있으라고!

 

창밖에는 아직 눈보라가 내리고 있다. 사무소에 들어왔을 당시보다 더욱 거세졌다. 따뜻하게 데워진 사무소의 안에서 나란히 마주보고 있는 하기와라씨와 나. 하기와라씨는 화장이 반쯤 지워진 얼굴로 수줍게 웃고 있었다. 이거... 조금 위험할지도... 아주 잠깐이지만 하루카보다 더 귀여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냐, 그럴 일은 없지. 온기에 데워져 발그레한 하기와라씨의 볼은 확실히 귀엽지만...!

 

"치하야쨩... 저... 그러니깐... 이 이제 안아줘..."
 


힘들게 말해놓고, 부끄러워 부끄러워! 하면서 어쩔 줄 몰라하는 하기와라씨가 귀여워서 나도 이제 별 도리가 없었다. 오늘 밤은 아무래도 이렇게 하기와라씨와 지내야 할 모양이었다.

 

...
...
...

 

● REC

 

"므히히... 으흐흐... 아차차..!! 소리가 새어나가면 안 돼."

 

오늘 수록 현장의 분위기는 그야말로 최고! 기록용으로 사장님에게 부탁하여 구입한 캠코더는 이미 준비완료. 내가 락커에 숨어 지켜보고 있는 것은 봉긋 피어오른 꽃봉오리인 소녀들의 아름다운 사랑. 아아.. 살아있기를 잘 했어. 코토리, 이것은 도촬같은 것이 아니야. 성스러운 사랑의 기록! 이 영상이 자칫 잘못해서 세상에 퍼진다면... 아아... 그 때가 오면 모두들 안절부절 못 하다가, 리츠코씨가 이것은 전화위복! 세일즈포인트로 만들 수 있습니다! 하고 나설지도... 그러면 내가, '차라리 765프로 아이돌 컨셉을 모두 백합으로 만드는 것은 어떨까요!' 하고 건의를 하는거야. 아아, 무슨 소리하는거야 코토리! 잠깐, 이거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걸까? ... 맞아, 제대로 녹화되고 있.. 어... 얼레? 자, 잠깐! 유, 유키호쨩! 치하야쨩! 얼굴이 가까워! 입술이 가깝다고! 유키호쨩 원래 이렇게 대담했던거야? 눈을 감고 고개를 살짝, 보드라워 보이는 입술, 치하야쨩도 유키호쨩의 얼굴을 감싸고 있는 그 두 손... 너무 자연스럽잖아! 역시 둘 다 유경험자... 꺄아, 그럼 이것은 금단의 사랑!? 사각관계인거야? 아, 이, 입술이... 아아... 하아....

 

털썩...

 

● REC
● REC
● REC

 

PAUSE

 

 

 

 

그냥 밤새 싸지른 글.

아침에 일어나서 보면 지울 것 같음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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