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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갈 데가 없다

네타  

처음이니까.jpg

'불은 꺼줘야 돼. 그게, 처음이니까 말이야.'


일본어를 잘 몰라서 저 직역이 맞는 건가는 모르겠습니다. 역시 중간에 깽판치고 공부를 관두면 안 되는 거 였을까요.

어쨌든 이 대사와 저 장면을 1화 첫 장면으로 시작하는 마리아 홀릭은, 내가 태어난 다음 처음 본 만화, 정확히는 애니메이션 입니다.


Maria Holic.jpg

물론 태어나서 처음 같은 말 하면 좀 거창하죠. 어릴 때 본 만화영화는 뭐가 되고, 극장에 찾아가서 봤던 것들은 다 뭐가 되겠어요.

고상한 척 엣헴 하고 글을 시작했습니다만, 결국 하려고 하는 말은 '마리아 홀릭은 내 입덕 작품이에요 하악하악.'이라는 겁니다.


사람들 다 봤다는 아즈망가 대왕도, 그 유명한 카드캡터 체리도 안 봤는데, 이걸 먼저 봤던겁니다. 


안 보신 분이 이 글을 봤을 때는 대비해 내용이 뭔가 말하자면, 간단하게 '여장 변태와 백합 변태의 만남.' 이라는 내용입니다. 각자 사정이야 있지만 제삼자 입장에서는 알게 뭐에요. 마츠리카 말마따나 여장 변태랑 백합 변태랑 입으로 SM 플레이 하는 거로밖에 안 보이잖아요. 마츠리카가 그렇게 말한 적은 없지만.


머엉.jpg

뭐 내용적인 부분은 글 쓰다 생각나면 얘기하고, 그거보다는 이게 내가 처음 본 애니라는 거에 좀 더 초점을 맞추려고요.

왜냐하면 그게, 이걸 처음 보고 진짜 충격이 장난 아니었거든요. 아 이런 게 문화충격이구나 하는 걸 제대로 느꼈죠.


살면서 여자가 이렇게 많이 나오는 만화, 아니 거의 여자밖에 안 나오는 만화는 본 적도 없었고, 여장남자랑 백합 변태가 대놓고 주인공으로 나오는데 성소수자를 이 정도로 가볍게 다루다니 이게 뭐지 싶은 건 둘째치고 그 부분이 핵심 개그 소재인데다가


충격과 공포의 오프닝 엔딩 곡. 으아…아직도 오프닝은 제대로 못 들어요. 영상은 정말 고급스러운데 그 곡의 발랄함과 가벼움은 '꺄 발랄해 가벼워 꺄아'를 넘어서 '으으 내 손발이 엌ㅋㅋㅋ내 손발 어디갔짘ㅋㅋㅋ' 수준이거든요. 안 그렇다고요? 나는 그렇습니다. 이제 슬슬 적응해야 되는데 아직도 오프닝은 못 듣겠어요. 엔딩은 잘 들어보면 되게 좋은 곡이라 그냥 듣겠는데 말이에요.


다 보고 기억에 남은 건 헐 이런 세상이 있었다니 하는 충격이었죠. 그 때 까지만 해도 이런 건 말로만 조금씩 듣던 거고, 사람들이 안여돼 안여돼 하지만 차별은 나쁜 거잖아 그러면 안 되지 말만 하던 문화였으니까요. 옆자리 남자애가 PMP로 보던 게 막 방영을 시작한 어떤 마법의 금서목록 애니메이션 제 1화 였다는 걸 알게되는 날이 올 줄은 몰랐던 시기의 이야기에요.


충격을 받은 뒤 이어서 본 게 'PSG', '신무월의 무녀' 그리고 '요스가노소라'였던 덕분에 절대 돌아가지 못할 길을 걷게 됐습니다만, 뭐 어때요. 지금 즐거운데. 살면서 이런 매니악한 애니메이션 한 편 안 본 사람은 인생을 좀 손해보고 있는 거라고 생각해요. 이렇게 말하면 화내는 사람도 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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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그리고 시간이 흘러서 나는 이렇게 개인적인 역사에서 의미있는 애니메이션인 마리아 홀릭을 다시 봤습니다.

하드 정리는 다 끝났는데 갑자기 다시 보기를 한 이유는 역시 좀 더 쥐어짜볼까 하는 심정에서 다시 본 거였어요.

혹시 다시보면 어딘가 부족한 게 있는 거 아닐까, 어딘가 이건 보관을 관두고 새로운 식구를 맞이해야 하는 게 아닐까 했던 거죠.


하지만 결과는 뭐, 역시 재밌다는 최종 평가입니다. 아니, 그냥 재밌다 정도가 아니라 나 이걸로 입문하길 잘 한 거 아닌가 싶어지기까지 했으니까요.


마리아 홀릭의 기본적인 배경과 이야기의 전개는 이후 수 많은 서브 컬쳐 애니메이션에서 봤던 그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내가 충격을 심하게 받았던 것과는 별개로, 여자 애들만 잔뜩 나오는 애니는 흔하고, 백합 냄새 진하게 풍기는 것도 흔하고, 여장남자 소재 마저도 흔한 거 였으니까요.


마리아 홀릭이 다른 비슷한 것들과 차별되는 점이라면, 역시 정확히 뭐라 말할 수 없는 고급스러운 느낌이겠죠.

연출의 차이를 고급스럽다고 하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마리아 홀릭에는 비슷한 다른 만화와는 다른 어떤 고급스러운 느낌이 있어요.

마치 다른 종류의 애니메이션에나 나올 법한 진지한 장면들이 여기저기 산제해 있다고 할까요.


진지함!.jpg

그렇지 진지함! 마리아 홀릭은 이야기의 중간 중간 진지한 척을 굉장히 잘 합니다. 그냥 생각없이 보고 으히히 재밌다 이렇게 넘어가면 충분한 애니메이션일텐데, 말 하는 대사나 나오는 장면들이 의외로 꽤 진지하고 멋있는 부분이 많습니다.


가방에서 기어오는 정체 불명의 촉수 같은 현실과 너무 동떨어진 이야기를 하다가도, 사상 초유로 귀엽게 괴롭히는 아이들의 변명이나 카나코의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미안함이 진지한 분위기에서 나오죠. 그러다가 다시 멍청한 탐정 = 멍탐정 카나코의 말도 안 되는 추리 이야기가 나오는 식이에요.


류켄과 엮이는 이야기, 키리와 친구가 되기 위한 이야기, 그리고 그것 때문에 감정적 갈등을 겪는 이나모리의 이야기 같은 건 '뭐야 만화 장르 바뀌었어?' 싶을 정도로 현실적이고 진지해요. 결국에는 비중이 없던 카나코와 얼굴만 비추던 마리아가 나타나면서 다시 개그로 돌아오는 거죠.


이런 성향은 이야기의 마지막까지 계속 되어서, 피로 수영장과 우주를 물들인 카나코 이야기는 계속된다 쭈욱 이런 느낌으로 끝나던 게 갑자기 '그 팬던트는?!' 하고 떡밥을 던지는 거에요.


그리고 내가 원을 풀은 그 글에도 썼지만 2기의 떡밥 회수는 정말 잘못됐습니다. 원작에서 그렇게 끝냈어도 그걸 그렇게 끝내면 안 되는 거였어 이 양반들아 차라리 떡밥을 더 뿌리고 더 이상 나오지 말던가 팬스가 마냥 그게 차라리 재밌지 으으….


무게감각.jpg

이전에 PSG가 이후 좋아하는 만화 그냥저냥인 만화 별로인 만화를 가르는 기준이 되었다는 의미의 말을 한 적이 있었는데, 마리아 홀릭을 다시 보니 아무래도 PSG 보다는 마리아 홀릭이 더 먼저 기준이 된 거 같아요.


진지한 부분과 가벼운 부분이 공존하는 환상적인 무게 감각. 이건 내가 언제나 찬양해 마지않는 부분이거든요.

내가 처음에 진지한 작품으로 이 문화를 접했다면, 혹은 가벼운 작품으로 이 문화를 접했다면 반대쪽에 대해서는 어느정도 색안경을 끼고 봤겠죠. 이런 게 진짜 애니메이션이다 이따위로 말하면서요.


하지만 마리아 홀릭은 그 가운데 있는 작품이에요. 그렇게 무거운 내용이 절대 아니면서도, 사뭇 진지한 이야기, 뭔가 말이 되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느낌을 줍니다. 이런 걸 처음 봤으니까 내가 사이코 패스랑 GJ부를 같은 시기에 보고 같은 시기에 재밌다고 말하게 된 거다 이거죠.


마리아 홀릭은 재밌는 작품입니다. 내가 처음 본 거라서 재밌는 게 아니었어요. 2기는 어쩌다 그렇게 망했을까요? 보고 재미가 없었다, 1기에 비하자면 별로였다 이런 기억은 나는데 그 이유가 기억이 안 나네요. 특히 1기가 이렇게 재밌는데 2기가 대체 왜 어쩌다가? 다시 보고 감상을 남겨야 하는 걸까요. 모르겠습니다. 다다미 세계일주도 봐야 하는데.


PS.

AT필드!.jpg

에반게리온을 모르던 때 본 거라서, 이런 게 있는 줄을 몰랐네요. 알고 보니까 뿜은 장면입니다.


PS 2.

아, 애니메이션을 접하게 된 계기요? 말하자면 복잡하지만, 아는 언니가 생각없이 나에게 말 해줬다가 그만 잘못 빠졌다고 하면 정리가 쉬울 거 같습니다.

연락은 안 되지만 마지막을 생각하면 나를 오타쿠로 만들었다고 자괴하고 계실텐데, 안 그랬으면 좋겠네요. 어쨌든 난 즐겁게 지내고 있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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