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중세의 흔한 영웅담 하나
2012.05.29 23:48
블로그에 싼김에 여기에도..
애니메이션도 영화 소설도 너무 뻔한 각본은 욕을 먹습니다. 너무 뻔한 반전은 그 자체로 클리셰입니다. 여기에 한 영웅담을 소개합니다.
천 년을 넘는 역사를 가진 제국이 있었습니다. 신이 창조한 이 세계에서 제국은 신의 가호를 받아 영화와 번영을 누렸습니다.
서쪽에는 바다가, 남쪽으로는 사막이, 북쪽으로는 얼음이, 동쪽으로는 이교도의 제국이 있었고 이 세계는 언제까지나 계속될 것만 같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전염병이 돌기 시작했습니다. 폭군이 등장해서 권력을 마구 휘둘렀습니다. 야만족과 이교도가 성지와 성물을 빼았아갔습니다.
십 년도 안 되어 제국은 절반 이하로 쪼그라들고 말았습니다. 아, 이대로 이 나라는 무너지는 것일까요?
바다 건너에서 구원의 조짐이 찾아왔습니다. 젊은 장군이 신성한 상징을 뱃머리에 달고 폭군을 몰아내기 위해 수도에 입성했습니다. 시민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은 젊은 장군은 황제의 자리에 올라 이교도에 대한 성전을 준비합니다. 빼앗긴 성지와 성물을 되찾기 위해 황제는 험준한
산악지대에서 작열하는 사막까지 종횡무진 대지를 가로지르며 활약합니다. 위기에 빠진 군대를 일신의 초인적인 무용으로 구원하기도 합니다.
이윽고 이교도의 성지를 점령하여 보복하고, 고대의 유적지에서 이교도 제국의 군대와 마지막 결전을 벌입니다. 황제는 적장과의 일대일 승부에
응하고 단칼에 그 목을 날려버립니다. 그렇게 성전은 승리로 끝나고 황제는 위풍당당하게 영원의 도시, 제국의 수도로 개선합니다....
위기의 제국, 화려한 등장, 성전, 극적인 역전, 초인적인 무력, 승리. 이 모든 매력적이면서도 상투적인 요소가 버무려진 이 이야기에 어떤 평가
를 내리시겠습니까? 진부하다, 밋밋하다, 이런저런 이야기가 나올 수 있는 이 질문에 역사는 '걸작'이라고 대답합니다.
세계사 교과서에도 등장하는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와 비잔틴제국, 즉 로마제국의 중흥기는 6세기 말엽 붕괴되기 시작합니다.
서방영토의 회복은 예상외의 강력한 역병으로 인해 결과적으로 무리한 확장이 되고 말았습니다. 여기에 폭군 포카스가 제위를 찬탈하자
조로아스터교를 신봉하는 페르시아의 왕중왕 호스로는 선제의 원수를 갚는다는 명분으로 로마에 대한 대침공을 개시합니다.
우리의 주인공이 반격을 개시하기 직전의 상황. 유럽에서는 야만족인 아바르족이, 소아시아와 레반트, 이집트 지역은 페르시아가 제 땅인
마냥 활개를 치고 다녔습니다. 로마가 제국으로 성장한 이후로 겪는 최대최악의 위기가 닥친 것입니다.
이 때 등장한 것이 카르타고 총독의 젊은 아들 헤라클리우스입니다. 헤라클리우스는 카르타고를 출발해 세력을 규합하고 콘스탄티노플에
입성해 폭군을 몰아내고 반격의 칼날을 갈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경과는 앞서 말한 영웅담 그대로입니다. 서기 623년 반격을 시작한
헤라클리우스는 627년 고대제국 앗시리아의 수도 니네베 근방에서 마지막 페르시아 군대를 격파하고 성전을 승리로 이끕니다.
하지만 역사 속에는 영웅담에는 없는 슬픈 결말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불과 10년도 지나지 않아, 선지자 무함마드의 뜻을 받드는 이슬람
제국이 폭발적으로 성장하여 헤라클리우스가 이룬 모든 것을 먼지로 되돌려버리고 말았습니다. 이제 늙고 쇠약해진 황제는 야르무크 강변
에서 이슬람 제국에 맞서 싸웠지만 패배하였고 실의에 빠져 쓸쓸하게 숨을 거둡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구해낸 로마 제국, 후대에 비잔틴 제국으로도 불리는 이 나라는 새로운 천 년을 버틸 힘을 품게 됩니다. 헤라클리우스
의 활약으로 ,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고 로마제국이 멸망하는 1453년까지 제국의 수명은 800년 이상 연장된 것입니다. 이쯤이면 그를 영웅이
라고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을 듯 합니다.
애니보다 뻔한 각본을 가진 영웅의 이야기. 뭐 하늘아래 새로운 것은 없으니 창작물의 각본이 역사에서 따온 경우도 많겠지요
댓글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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뀨뀨함폭
2012.05.30 00:54
-
사람사는곳
2012.05.31 22:51
공감합니다. 저도 들은 얘기인데... 인간은 실제 존재하는 것(혹은 인지 가능한것)만을 상상할수 있다라고 합니다(라는 주장).
가령 신을 상상한다는것은 실존하는 신이 있기때문에 상상이 가능하다는 주장이죠.
무에서 유가 창조될수 없다는 일반적인 명제와도 연결된듯 합니다.
또, 천재적인 발견이나 발명은 단순히 그 사실을 라디오처럼 수신하는데 성공한것에 불과하다는 얘기하고도 비슷합니다.
더나아가... 미래예지란 것도... 그것이 존재하는 미래이기 때문에... 상상이 가능(혹은 전파수신이 가능)했다란 논리도 가능해 보입니다.
말을 정리하면 이미 있는 얘기(혹은 현실,역사)를 얼마나 자기것으로 만드느냐가..
남에게 새롭게 들려줄 얘기의 격을 결정한다고 생각합니다. -
사람사는곳
2012.05.31 20:51
흠... 저기에서 재미를 느끼느냐 못느끼느냐의 첫번째 조건은 아마도 결과에대한 예측성이겠죠.
어떤 이야기는 프롤로그만 읽어도 전개와 결말을 볼수 있는가 하면 전개도 평범, 결말은 무난 한데도
도저히 눈을 뗄수가 없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문제는 결과를 어떻게 해서든 독자로 부터 은폐하면서 전개 과정에서 얼마나 독자를 따돌리느냐 인데
보통 이런 부분을 아우르는게 연출의 영역이겠죠. (근데 각본이랑 연출이랑 그렇게 차이나는 거였던가..?)
본문의 역사도 위인전으로서의 서술이냐, 군사교리논문으로의 서술이냐, 전기소설로의 서술이냐, 혹은...
헤라클리우스와 바실레이오스간의 불꽃튀기는 BL이냐에 따라...
동일한 각본은 독자에게 전혀 다른 이야기로 비취지겠죠.
정리하면 본 스토리는 단순할수록, 이해하기 쉬울수록 좋되 그 전달법은 가능한 좋은 의미에서 독자를 기만할 수록 좋다..
정도로 전 생각하고 있습니다. -
사람사는곳
2012.05.31 23:01
뭐 에바도 전개는 그렇게 복잡하진 않죠.
로봇에 타고 적들과 싸우는 과정을 되풀이하다가.. 결국 재앙은 못막았는데 어찌어찌 쥔공은 살아남았다...(구극장판?)
근데 그걸 전달하는 통로(서술관점)를 종래의 로봇물이 그러듯 로봇의 전투에 둔게 아니고...
타고 있는 조종사의 심리와 주변인물과의 관계변화를 집요하게 파들어 가다 보니...
거시적인 현실은 마치 세카이계의 그것과 같이 주인공과 동떨어져보이고..
결말엔 짠! 세계와 주인공의 동일화!
독자&시청자들은 방영내내 놀아나다가 폭발!! 서드임펙트!!!
그리고 그 폭발의 잔향이 20여년이 다되가도록 남아있죠^^.
팔리는 이야기는 뭔가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매력이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
리카아메
2012.05.31 21:22
듣고보니 뭔가 에반게리온이 생각나는듯도.. -
하야테2
2012.06.02 14:07
동로마이야기구만.... 근데 무슬림들이 쟤네보다 훨씬 인정많음. -
리카아메
2012.06.03 01:36
글쎄요.. 중세의 무슬림이 관대하다는 이미지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그들이 유럽-중동 세계에서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고 난 다음, 나라 안의 피지배민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처음 세력을 일으켰을 때, 페르시아와 로마를 무너뜨리고 확장을 거듭할 때도 관용적으로 피흘리지 않고 나라를 넓힌 게 아니었습니다. 폭발적인 팽창이 끝난 후에도 사라센 제국은 툭하면 로마제국령에 쳐들어와서 약탈과 살인을 저질렀기에 동로마 제국은 중흥기가 찾아오기 전까지 방어에 치중할 수밖에 없었고, 동로마 제2의 도시 테살로니카와 소아시아의 요충지 아모리움을 함락시켰을 때 무슬림이 저지른 대학살은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십자군의 그것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는 않았습니다. 훗날 중동의 십자군 왕국을 완전히 몰아낼 때도 십자군에게 당한 그대로 갚아 주었습니다. 무슬림이라고 언제나 피해자이자 관용적인 지배자는 아니었으며 오히려 근대 이전까지 '가해자'의 입장에 서 있었던 것은 이슬람 세력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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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의미에서, 저런 중세의 ‘동화적‘ 사건을 모티브로 한 이야기보다는 근현대의 더 극적인 사건을 모티브로 하는 이야기가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이를테면 전 인류가 둘로 갈라져 싸운 '모든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쟁', 그 전쟁이 끝나고 찾아온 굶주림, 그리고 그 누구도 발발을 예상치 못하였으며 강력한 전설적 병기의 사용으로 끝마친 두번째 대 전쟁, 전쟁의 승자들이 세계를 다시 이등분하여 시작된, 전설적 병기의 공포에 모두가 떨었던 차가운 전쟁.. 그 어떤 환상문학이나 sf보다도 비현실적이면서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이지 시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