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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갈 데가 없다


현대 미술에 관심은 있는데 현대 미술이 뭘 목적으로 하는지 전혀 모르겠는 분들을 위해 하등동물인 고3 따위지만 글을 올려 봅니다. 대학교를 안 가 봐서 대학교 현대미술 교양 시간에 이런 걸 가르치는지는 잘 모르겠네요.




미술선생님께서 현대 미술에 관하여 말씀하신 비유 중에 제가 정말 그럴듯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있어요. ‘현대 미술가들은 정해진 식사 예절에 따라 잘 익힌 스테이크를 썰고 있는 고급 식당의 탁자 위에 핏물이 줄줄 흐르는 날고기를 던져 놓는 일을 한다.’


날고기를 식당의 탁자 위에 던지는 행위는 감상자들에게 순간적인 충격과 자극을 주어 미술품에 집중하게 만들고 새로운 사고를 유도하는 일이에요. 식당의 분위기와 대조되는 ‘요리’인 날고기는 식당의 식사 예절, 즉 의문을 제기하기 어려운 클리셰로부터 탈피하도록 유도하는 요리이면서 어떤 주방장의 조리, 즉 특정한 관점의 의미 부여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은 요리예요. ‘핏물’로 표현되는 존재성이 발견되며 순수한 이미지를 확인할 수도 있지만 식당에 앉아서 스테이크를 썰던 사람들에게는 흉측함과 야만스러움이 보일 따름이지요. 만약 그들 중 누군가가 미술가의 바람대로 자신의 행동을 돌아보고 날고기의 가치를 궁금해 하게 되더라도 미술가는 특정한 방향으로 감상자를 이끌지는 않아요. 그들이 날고기를 보고 떠올리는 생각은 미술가에게 주입받은 것이 아닌 본인의 것이에요.


여기서 신경써야 할 부분은 의문을 제기하기 어려운 클리셰가 어떠어떠한 것인가 하는 부분이에요. 의식 쪽에서의 클리셰라면 다르게 말해서 절대 다수가 거의 모든 상황에 인식하는 것ㅡ다인에 의해 규정된 대상의 의미, 관습, 존재 가치와 목적이라고 할 수 있겠죠. 실존주의에서는 이를 본질이라고 명명하고 실존을 가리는 것으로 간주하지요. 문제나 현상의 전제를 파악하려는 탐구심이나 이미 의식 속에서 답을 낸 것도 다시 한 번 고민해 보는 노력이 없다면 클리셰를 극복하기 힘들어요. 클리셰를 주입받은 사람들끼리 서로 영향을 주면서 클리셰를 더욱 단단하게 만들 뿐이에요. 하지만 극복하려는 의지도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한다면 가질 수 없지요. 그래서 현대 미술은 주로 감상자의 사고에 충격을 주어서 문제의식을 느끼게 하려는 것을 목적으로 하게 돼요.


제게는 쉽게 설명하는 능력이 없나 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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