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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갈 데가 없다

일상 「제노사이드」 by 다카노 가즈아키

2012.08.15 22:42

무언가 조회 수:271

01. 개요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신'이라는 책을 시작할 때, 이런 말로 시작했다. 


 인류 역사에 뚜렷한 자취를 남긴 문명은 어떤 것들이었을까? 혹시 가장 세련된 문명이 아니라 가장 흉포한 문명이 역사의 주류를 이뤄 온 것은 아닐까?

 

  곰곰 따져 보면, 망각의 늪으로 사라진 문명이라고 해서 반드시 낙후된 문명이었던 것은 아니다. 때로는 그저 지도자가 순진하게 적들의 불침 약속에 속아 넘어간 탓에, 혹은 기상 이변으로 전투의 형세가 갑자기 바뀌는 바람에 한 민족 전체의 운명이 기울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고 나면 승리자들 편에 선 역사가들은 패배자의 멸망을 당연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자기네 마음대로 패배자들의 과거를 다시 기록한다. 그들은 뒤에 올 세대들이 과거를 반성하거나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 <패자에게는 불행이 있을진저>라는 말로 토론을 봉쇄한다. 다윈은 <자연선택>과 <적자생존>의 이론으로 그런 학살에 과학적인 정당성을 부여하기까지 했다.

 

  이렇듯 지구의 인류사는 학살과 배신을 바탕으로 전개되었고, 그 학살과 배신은 잊혔다.


From 「신」1권 by 베르나르 베르베르, 7~8쪽



이처럼 인류는 지구에 존재하기 시작한 이래로 끊임없이 학살을 자행해 왔다. 십자군 전쟁부터 시작해서, 아르메니아인 집단 학살, 운다드니 대학살, 바나나 학살, 유태인 학살과 르완다 킬링필드까지. 이는 인류 역사 어두운 단면의 지극히 일부일 뿐이며, 안타깝게도 이 제노사이드는 필수불가결한 어둠이었다. 


제목부터 학살에 관한 내용이라는 걸 표방하고 있는 이 작품은, 인류사에 계속해서 반복되는 대학살을 작품 속에 녹여놓은 후, "과연 인간은 서로 죽이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인가?"라는 무게있는 주제를 독자들에게 던져준다. 



02. 스토리 소개


"어째서 우리는 인간끼리 서로 죽이고 두려워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인가."


돌아가신 아버지가 남긴 수수께끼를 해결하려는 약학 대학원생 고가 겐토. 

불치병에 걸린 아들을 위해 잔혹한 임무를 수행하려 콩고로 잠입한 용병 조너선 예거. 

두 사람의 운명이 교차하는 순간 강대국의 추악한 음모와 인류의 미래가 얽힌 충격적인 진실이 드러난다!


-From 책 앞표지+뒷표지



03. 본작이 던지는 사회적인 화두


우선 책 제목이 시사하듯, 학살과 인간의 본성에 관한 고찰이 작품 내내 끊이지 않는다. 


예를 들어 적이 인종적으로 다르며, 언어도 종교도 이데올로기도 다르게 되면 심리적 거리가 멀어지며 그만큼 죽이기 쉬워진다. 평소에도 다른 민족과 심리적인 거리를 가지고 있는 사람, 즉 스스로가 소속된 민족 집단의 우월성을 믿으며 다른 민족을 열등하다고 느끼는 인간이 전쟁에서 손쉽게 변모하는 모습을 보인다. 평소에도 주위를 둘러보면 그런 사람을 한둘쯤 바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싸우는 상대가 윤리적으로도 열등한, 짐승이나 다름없는 사람들이라고 철저하게 가르쳐 두면 정의를 위한 살육이 시작된다


-From 본문 Page 253~254



또한 르완다 내전, 강대국의 식민 지배, 자원 분쟁, 무장 집단의 횡포 등 아프리카의 비극적인 역사와 참혹한 현실이 작중 계속해서 펼쳐진다. 이는 한 소년병의 인생을 보여주면서 정점을 찍는다. 


동시에 미국(부시 정권)의 정책과 군사 행위, 정권의 실상 등이 세세하게 묘사된다. 이를 통해 이라크 전쟁의 전후 배경과 민간 군사 기업의 비리(실제로 부시 정권 때 부통령은 군사 기업 출신이었다.) 등 강대국의 패권주의와 위선적인 태도를 통렬하게 비판한다. 



04. 서사


「13계단」을 통해 선보인 다카노 가즈아키의 저력은 6년이 지났음에도 죽지 않았다. 본작을 광고하는 문구 중 "압도적인 힘과 장대한 스케일"이라는 문구가 있는데, 이는 전혀 과장이 아니다. 

개인적으로 이 책을 처음 접했을 때 든 생각은 '엄청 두껍다. 이거 언제 다 읽지.'였다. 그도 그럴 것이, A5 종이로 700페이지다. 그 안에 활자를 꽉꽉 채워 넣었다. 그렇게 재밌다, 대단하다 광고를 했는데 700 페이지가 재미가 없다면? 나랑 맞지 않다면? 그러한 걱정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특히나 다카노 가즈아키의 작품은 앞서 언급한 「13계단」밖에 보지 않았기에 더욱 그러했다. 누구나 한 권 정도는 우연히 명작을 지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에. 

책을 펼치고, 100페이지를 넘겼을 때, 그런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다는 걸 깨달았다. 이 방대한 분량 내에서 독자를 이끌어가는 페이스가 떨어지는 부분이 없다. 굉장히 촘촘하고 철저한 구성에, 예측하지 못한 방향으로의 전개. 이 모든 것이 이 작품을 재밌게 만들었다. 



05. 문체


「13계단」을 통해 다카노 가즈아키의 문체를 처음 접했을 때, 기묘한 느낌이 들었다. 독자에게 최대한 느낀 바를 정확하고 공감가게 전달해야 하는 "리뷰"라는 글에 쓰기는 부끄러운 묘사이지만, '형용할 수 없는' 뭔가였다. 미야베 미유키가 말했듯 "이지적이다."가 어쩌면 유일하게 맞는 묘사일지도 모른다. 기묘하면서도, 빨려들어가는 듯한 느낌. 그런 느낌이 굉장히 마음에 들었다. 

이 「제노사이드」라는 작품에서도 그만의 이러한 독특한 느낌은 죽지 않았다. 전작을 읽어서 어느 정도 익숙해진 탓인지 약해졌다는 느낌은 들었지만 말이다. 

또한, 여타 다른 작품들을 읽으면서 챕터를 거의 몇 쪽마다 갈기갈기 나눠놓아서 집중력을 흐트려놓는 점이 참 불만이었는데, 이 작품은 그런 것 없이 깔끔한 게 참 마음에 들었다. 작품에 더욱 몰입할 수 있도록 해주는 요소임에는 틀림없다. 



06. 이것은 미스터리입니까?


일본 서점 대상 2위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1위

주간문춘 미스터리 베스트 1위

제65회 일본 추리작가협회상 수상

제2회 야마다 후타로상 수상

145회 나오키상 후보작

제33회 요시카와 에이지 문학신인상 후보작


본작의 수상경력을 보면 미스터리 관련 상도 많이 받았다는 걸 알 수 있다. 다만, 이 작품은 흔히 우리가 생각하는 '미스터리'라기보다는 오히려 가깝다면 SF쪽에 가깝다고 느꼈다. 이는 어쩌면 리뷰를 쓰는 장본인이 사회파 미스터리보다는 신본격 미스터리를 좋아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왜냐 하면, 이 작품이 미스터리와는 약간 거리가 느껴진다고 생각한 이유가 '수수께끼의 부재'였기 때문이다. 사회파 미스터리 쪽에 서있는 다카노 가즈아키의 소설은 신본격이 원하는 수수께끼 풀이보다는 사회적인 화두를 던지는 데 집중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미스터리 팬들이 재미를 느낄 수 없다는 말은 아니다. 미스터리 팬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재미를 선사할 만한 작품이다. 



07. 그렇다면 이것은 SF입니까?


[日출판계 돌풍 SF소설 ‘제노사이드’ 작가 다카노 가즈아키 씨] 동아닷컴 뉴스


이처럼 이 작품을 아예 SF 소설이라고 소개하는 신문 기사도 있는 걸 보니 본인의 생각이 본인만의 고집은 아닌 것 같아서 어떤 면에서는 기쁘고, 어떤 면에서는 씁쓸하다. 왜냐하면 이 소설의 장르를 SF라고 소개하게 되면, 어쩔 수 없이 사이비 SF라는 말을 들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본작의 과학적 근거가 상당히 부실하기 때문이다. 아니, 인류학/진화론/국제정치/밀리터리를 넘나드는 분야를 작가가 철저히 조사한 증거가 보이는데 부실하다니? 이게 무슨 말인가? 

본작의 중요한 키워드 중 하나인 "하이즈먼 리포트"에는 이러한 내용이 나온다. 


생물 진화가 유전자의 점돌연변이(DNA 상의 염기 서열에 변화가 생겨 일어난 돌연변이)에 의해서만 초래된다는 말은 의심스럽다. 화석 자료만 봐도 생물 진화는 점진적이며 또한 단속적(斷續的)이다. 진화라는 현상에는 점진과 단속의 두 가지 방향에서 생물종을 탄생시키는 미지의 메커니즘이 잠재한다. 그리고 이 주장은 우리 영장류에게도 해당된다.



이는 스티브.J.굴드의 단속평형론을 도입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리처드 도킨스가 이러한 이론을 허수아비 공격의 오류라고 지적한 바가 있다. 리처드 도킨스는 이 단속평형론이 기본적으로 찰스 다윈이 주장한 바와 전혀 다르지 않다고 말했다. 

더욱 자세한 내용은 http://blog.naver.com/gpjm/10144773966 이 블로그에 들어가면 볼 수 있을 것이다. 

기나긴 과학 이론과 반박으로 리뷰 전체를 도배하고 싶지는 않기에 링크로 대체한다. 


결론은 약간 그 근거가 허황된 듯하다는 느낌이다. 물론 근거도 없는 음모론을 베이스로 소설을 쓰는 댄 브라운보다는 낫다. 


그래서 이 작품의 장르가 뭐냐고요? 미스터리와 SF의 하이브리드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두 장르의 속성을 모두 가지고 있으면서, 두 장르와 약간 거리가 있는 느낌인 듯 합니다. 



08. 소설보다는 영화에 어울리는 작품


이 작품을 지은 다카노 가즈아키는 영화 업계에 종사한 경력이 있는 분이시다. 그래서 그런 것일까, 소설을 보면서 블록버스터 스케일 할리우드 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오히려 영화에 어울리는 작품이라는 느낌. 자신이 헤드폰을 잡는 조건으로 영화화 제의가 들어온다면 만들 의향도 있다고 하니까, 이를 기대해도 좋을 것 같다. 실제로 다카노 가즈아키는 자신의 단편 영화 감독을 한 경력이 있으니. 



09. 요약 및 총평


700페이지의 방대한 분량에 장대한 스케일을 그리는 동안 사건의 페이스가 전혀 느려지지 않는 작품. 그 정도로 재밌고, 오히려 영화에 어울리는 SF+사회파 미스터리. 다카노 가즈아키 특유의 느낌도 죽지 않았으며, 유일하게 아쉬운 점은 그 근거의 허황됨 뿐. 



여담 1. 광고에 대하여. 


본작의 광고를 봤을 때, 이러한 내용을 본 적 있었다. 


특히 한일 과거사에 대한 일본 우익들의 그릇된 사고를 비판적 시각으로 그려내어 일본에서 상당한 논쟁을 불러일으킨 작품이기도 하다. 실제로 일본 최대 인터넷 서점인 아마존 재팬의 200여 독자 서평 중 거의 대부분이 ‘재미있으나 작품에 담긴 반일 사고가 불편하다’, ‘관동대지진이나 난징대학살에 대한 언급 때문에 거부감이 든다’는 등 저자의 역사관에 불만을 표출하는 의견이 상당수를 차지한다. 



하지만 정작 작품을 보니 그러한 내용은 대략 3~4페이지 정도밖에 없었다. 오히려 전체적으로 미국 정치권의 병폐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내용이다. 특히 미사일이 꽂히는 장면에서는 그 시니컬함이 너무 강렬해서 입에 비웃음이 가득차기도 했다. 네타가 되므로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겠지만, 개인적으로 많고 많은 명장면, 명대사 중에서도 가장 인상깊었던 장면이다.  

그렇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저러한 내용을 기대하고 샀다면 저 광고에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하고 엄청난 기대를 품고 책을 펼치지 않기를 바란다. 그런 쪽에 초점을 맞추면 분명히 실망할 것이다. 



여담 2. 본작의 등장인물 '이정훈'


다카노 가즈아키 본인이 故 이수현 씨를 모델로 이 캐릭터를 형성했다는 말을 했다. 책을 다 읽고서도 '그런가?'하고 생각했으나, 책을 다시 이곳저곳 둘러보면서 그 증거를 발견했다. 


그러면 아무런 담보물도 없이 자기 목숨을 위험에 처하면서까지 다른 사람을 구하려하는 사람이 있다면? 역의 플랫폼에서 떨어지는 외국인을 구조하거나 아니면 목숨 걸고 신약 개발에 뛰어든다던가, 그런 사람도 있습니다. 


-From 본문 Page 671



유학 생활을 하면서 한국인 친구와 태권도를 배우고 친분을 쌓았기에 한국에 대한 애착이 많다고 한다. 작중에 '정'이라는 개념에 대한 묘사가 나오는 것에 대해서도 깜짝 놀랐다. 그렇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반가웠다. 사실 3~4페이지나마 여담 1에 관한 내용을 언급해 준 것이 어디인가? 위안부와 독도에 대한 진실마저 외면하며 사실과 역사를 왜곡하는 일본 극우파도 존재하는 이 세상에. 



by 히키히키쨩-☆ ( @Harukana0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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