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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갈 데가 없다

보험 영업 시작하려고 전화 돌리니까, 지인 중에 찾아갈 사람 꼽을라면 10명도 없는데

1달에 한 번 롤 같이 돌리던 애들이 들어준다고 하니까 뭔가 뭉클하더라.



...문득 떠올려보면 내 인생은 까이고 까이는 양파 같은 인생이였어.


내가 태어났을 땐 부모님은 이미 갈라져 있었고.

나 키울 돈이 없는 어머니는 날 둘째 이모에게 맡겼지 

초등학교 1학년이 되서야 어머니께 돌아갔어.


어릴 때 나는 라디오 제작 키트를 개조해서 무전기를 만드는 등 과학에 관심이 많았지.

어머니 밑에 있으니까 참 이사를 많이 했어. 어머니 사업이 7번인가 망했던 것 같아.


이사하다보면, 내가 얼마나 아끼던 것이든 버려야 할 때가 있더라고. 뭔가를 만들고 실험해도.

다 잃어버리고 마니까. 초등학교 졸업할 때 쯤에 뭘 만드는 것에 흥미를 잃고 말았지.


남들에게 좋은 기억을 심어줘도 1년도 안가서 헤어지고 마니까. 이사해도 남는 것에 열중했었던 것 같아.

남는거. 누구도 뺏어갈 수 없는 무언가. 내겐 그게 지식이었어.

거기에 매달려 매일 매일, 조금 조금씩. 많은 것들을 알아나갔지.


그렇게 조금조금씩 뭔가를 쌓아가도 내 자신감은 매번 가차없이 까이더라.

양파는 까면 깔 수록 작아지잖아? 내 자신감도 그렇게 작아져갔어.

그렇게 작아지는 스스로를, 자존심으로 버텨나가는게, 지난 23년이었다.


근데 가면 갈수록 깨닫는게. 안다는걸 증명하는건 자존심을 지탱할 수 있을진 몰라도

자신감을 회복시켜주진 못하더라고.


뭔가, 스스로에게 성취감을 줄 수 있는 뭔가가 필요했어. 그래서 이것저것 시도도 많이 하고. 찾아가서 배우기도 했지.

대학 생활도 정말 열심히 했다. 과제 4명서 할 거 혼자 다 하고... 뭔가를 성공시키기 위해 정말 애썼어.

더이상 실패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러다 어느날 통장 보니까. 잔고가 3천 원이라 돈을 인출할 수가 없는 거야.

고등학생 때였다면 어머니께 송금해달라고 했을 거야.

근데 교통비 줄 돈도 없다는 말을 하던 어머니의 모습을 떠올리니까 차마 그럴 수가 없더라고.

교통비로 쓸 돈조차 없으니까. 사람이 어디까지 무기력해질 수 있나 체감하게 됬어.


방학 때 방에 틀어박혀서 한 발짝도 나오지 않던 것과는 차원이 다르더라.

그땐 '안' 나갔던 건데. 지금은 '못'나가고 있으니까.


한 달 넘게 노가다도 뛰고 이것저것 알바도 하고 그랬는데. 하면 할 수록 미래가 막막하더라.

한 달에 50만원 씩 저금 시작해도 10년 뒤엔 1억 밖에 안 돼.


그때 물가는 또 얼마나 올라 있겠어. 1년에 4포인트면 대충 계산해도 50퍼센트 상승이야.

그땐 집 값을 또 얼마겠어? 차 사고 옷 사면서 나가는 돈 까지 생각하면

먹을 거 못 먹고 10년 저금했는데. 집 하나 못사는 거지.


대학 자퇴하면서 느꼈어. 돈은 자유가 아니라 자존심이라는 걸.


10년을 죽어라 일해서 작은 집 하나 장만했다고 치자. 그럼 행복할 수 있을까?

결혼해야지, 애 길러야지. 교육시켜야지. 걔네들 대학도 보내야지.

영원히 쫓기며 살 거야. 난 그냥 그런게 싫었어.


가진게 없는데도, 내 인생을 공장이나 노동에 건다고 생각하면 참을 수 없는거야.

배부른 생각이라 할 지도 모르겠지만. 그런 말을 하는 사람도 불과 몇 년 전엔 나와 같았을 거야.


죽어도 좋으니까 나 자신을 어디엔가 시험해보고 싶었어. 내 앞으로의 인생을 배팅할 만한 그 무언가는 없을까.


그러다 눈에 들어온게 영업이야.

개중에서도 보험이 영업의 꽃이라고 하더라고.

수당이... 정말 쌔더라. 10만원 짜리 고객에 최소 40만 원씩 들어온데.

삼성 생명에서 월 수당 중에서 가장 많이 받은게 14억이란 기사도 봤어.


그게 쉽진 않겠지. 검색하면 보이는건 힘들단 얘기만 잔뜩인데, 그냥 맘이 한 번 꽂히니까, 돌이킬 수 없었어.

보험 회사가 참 많았는데, 전문성을 강조하고, 교육이 가장 충실하다는 ING를 선택했어.


삼성가면 친척들이 내 쪽으로 계약 돌려준다 했는데. 도저히 그렇게 못하겠더라.

내게 기대 걸었던 사람들이, 안쓰럽다는 눈빛으로 사인하는 모습을 상상하면 목이 턱 매여서.


지점에 찾아오래서 갔더니 지점장님과의 면접이 시작됬어. 왜 ING에 들어왔냐고 묻더라. 돈 벌고 싶어서 들어왔다고 했어.

왜 돈 벌고 싶냐고 또 묻더라고. 사실 대로 말하려니 목이 매이더라 그래서 적당히 얼버무렸지.

강렬한 동기가 있어야 되는데 너무 약해보인데.  그렇게 약하면 임원 면접에서 면박 맞기 쉽상이니 단단히 준비해서 오라더라.


몇일 뒤 본사에 갔는데, 예정됬던 분과 다른 분이 오셔서 그런지, 몰아붙이진 않더라고. 심지어 '워킹 홀리데이라고 생각해라.'란 말도 해주셨어.

어찌어찌 잘 얘기한 뒤 방을 나왔는데. 내가 나가고 매니저가 들어가서 그 임원 분과 얘기하는게 얆은 벽 너머로 들리더라.

'어린 애니까 애지중지해서 잘 가르쳐라.'


하...


'워킹 홀리데이라고 생각해라.' 그 말은, 얼마 안가 세상에서 먼지처럼 털릴테니, 멘탈 관리하란 의미가 담겨있는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니까 눈물이 나더라.


거기서 나오면서 아는 사람 100명 명단 짜오라는 미션을 받았다.

핸드폰 여니까 30명 저장되어 있었어. 100명 채우려고 전화 열심히 돌렸는데.

전화 한 번 돌리니까 적과 아군이 모세가 씨발 바다 가르듯 갈라졌어.


내가 상대를 얼마나 좋아했는지에 대한 기대와, 그 사람들이 날 얼마나 좋아하는 지는 전혀 다른 문제더라.

생각지도 않았던 선후배들이 도와주고, 동기나 친구들은 가차 없었어.

내가 이제까지 인생을 어떻게 살아왔는지 알것 같았다.


윗사람에게 잘하고 아랫사람에게 베풀기도 잘했지만,

동기들은 억지로 자신을 끌고가려던 날 싫어했던 것 같아.

조금 더 잘해보자는 내가 그렇게도 싫었던 갈까? 모르겠다.


간신히 98명 채워서 보내니까 본사 교육이 시작됬어.

동기들에게 한 번 거절당하고 나니까 교육 동기들과 친해지는 것도 꺼려져서 혼자 지냈어.


강사들은 이성과 논리로는 판매가 어렵다고 하면서, 믿음으로 승부하라고 하는데.

믿었던 사람들에게 거절당하니까 믿음으로 승부할 자신이 없었어.


그래서 온갖 힘 다해 아이템 개발했어. 돈 많은 사람에게 접근할 방법 찾기 위해 홈페이지 영업도 겸해야지.

SNS랑 블로그로 날 알려야지. 설계사 시험, 변액시험, 재무설계, CMA니 CFF니 펀드니 청약이니 세금이니...

진짜 공부 많이 했다.


공부하면서 마치 초등학생 때로 돌아간 것 같았어.

학교엔 친구 없고, 집에 돌아가면 부모님 없던 그 때가 계속 떠오르는 거야.

더 이상 잃고 싶지 않아서, 잃지 않을 것에 매달린다는 본질은 달라지지 않았으니까.


내 인생은 이렇게 되풀이되는 건가?


면접으로부터 1달 반 밖에 안되는 시간인데. 15년 같이 느껴졌어.

내 첫 시작인 설계사 시험이 4월 14일인데, 사실 그게 오늘이야.


새벽에 잠이 안와서 벌써 1시간 째 이 글을 붙잡고 있는데.

이러고 있지라도 않으면 마음이 진정되질 않아.


모의고사를 풀기만 하면 100점이 나오고, 합격선은 60점인데. 뭐가 그리도 긴장되는지...


홈페이지 필요하다는 사람을 벌써 5명이나 구해두고 웹 디자이너, 실력 있는 프로그래머를 2명이나 섭외해 놨는데도

내가 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이 안 든다. 나는 언제나 못 할게 뭐냐는 생각으로 살아왔어.

하지만 그건 리스크 없는 세계에 안주했기 때문에야 말로 가능했던 태도였지.


나갈없 사태가 터졌을 때, 나는 키배 뜨면서 종종 '비겁하다'는 말들을 내뱉곤 했어.

논리로 맞서지 않고 조롱과 비난으로 회피하는건 비겁한 짓이라고 했었지.

그런데 정작 나 자신은 리스크 없는 이론의 장막 뒤에서 현실을 비판하고 있었던 거야.


스스로의 한계를 시험할 때가 다가온다는게 이렇게 긴장되는 일이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ING는 정장이 기본이라 밀리오레에 갔더니. 4만원에 살 자켓과 바지를 12만원 주고 사오고.

투 버튼이 대세라는데 원 버튼으로 사고. 곤색이라고 우겨서 샀는데 집에서 보니까 검은 색이고.

교복 와이셔츠로 땜빵하고 다니고...


그냥 모든게 너무나 큰 프렛셔야.

카카오 56% 곽엔 담배가 줄줄히 꽂혀서 더 들어갈 곳도 없는데. 억지로 쑤셔 넣으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어.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걸까. 나는 어디까지 할 수 있을까.



그런데 말야. 까이고 까여도 마지막에 남는 양파 심지처럼, 마음 속 깊은 곳엔

절대 깔 수 없는 덩어리가 있어. 수도 없이 까이던 와중에도 남아서 단단히 뭉치고 뭉친 뭔가가 있어.


그 응어리는 프렛셔에 시달리는 나를, 어린 시절 그랬던 것처럼 혼자 책과 씨름하게 만들어.

이 응어리는, 한창 논쟁하는 상대방에게 말하지. 이 병신 짓은 끝나지 않아. 내가 이길 때 까지.


난 이 응어리를 이길 수가 없어. 어릴 때 혼자 책을 수 백권씩 읽게 했던 이 응어리가

내 목줄을 잡고, 채찍을 치겠지.  더, 더 열심히 하라고. 더 최선을 다하라고.

내 응어리가 만족할 때까지 난 이 고통으로부터 절대 벗어날 수 없을 거야.

심지어 난 내 응어리가 어느 선에서 만족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


내가 알 수 있는 건 하나 뿐이지. 최선을 다 할 수 밖에 없다는 거.


이 응어리는 내 자존심이고. 나는 내 자존심을 배신하거나, 버리거나. 내칠 수가 없어.

잠시 쉬게할 수도 없고. 내 자존심이 나를 붙잡고 휘두르는걸 멈출 수가 없는 거야.


난 그렇게 죽어라 기어가겠지. 내가 될 때 까지. 난 될 수 밖에 없다. 될 때 까지 할 테니까.





여기까지 읽어준 모든 나갈러에게 고마워. 디씨에 이런 글 써봤자 면박이나 먹겠지.

지인들은 얼마나 힘들면 이런 수작질을 부리냐고 할 거고.

나는 갈 데가 진짜 씨발 여기 밖에 없다

진짜 나갈없이다.


아! 씨발 내가 트루 나갈없!!


3시간이나 썼네.


다 읽어줬다면, 다 안 읽었더라도. 여튼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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